사실은 나에게 눈 감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깔짝깔짝'. 내가 요가를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면 아마 이렇게 대답해야 할 것이다. 대부분의 운동이 그랬지만 특히 요가는 꾸준히 한 적이 없다. 하고 나면 참 좋은데, 꼭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아서 흐지부지 되는 느낌이다. 여전히 그렇다. 일주일에 2회 요가를 가겠노라고 마음먹었지만 주 1회를 가는 때가 더 많다.
요가의 '요'자도 모르는 채 '깔짝' 요기로 살아왔지만 나는 내 삶에 요가를 확실히 들여놓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 확신의 근거는 없었지만, 아무튼 막연하게 언젠가는 요가를 매일 수련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별 다른 도구가 필요 없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 가서도 굳이 스튜디오를 찾아 헤매지 않아도 어디서나 달릴 수 있고, 매트 하나 놓을 공간만 있다면 하물며 매트가 없더라도 요가를 할 수는 있다. 나는 이 점이 꽤나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요가를 언젠가 잘하고 싶다고 생각한 더 큰 이유는 요기들의 몸을 동경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부자연스럽게 조각 같은 근육이 있는 몸이 아닌, '저게 가능해?' 싶게도 유연하지만 동시에 또 가장 강한 몸이 요기들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보이는 몸은 각기 다른 모양이고, 주로는 배가 근력운동으로 다져진 몸처럼 납작하지도 않지만 한쪽 다리를 목에 걸친 채 한 손에만 온몸의 무게를 실어 내 체중을 모조리 들어 올리는 그런 자세들을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났다. 유연하면서도 강한 몸. 나는 그런 몸을 가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으로 몇 년을 깔짝 요가를 했지만, 여전히 다운독 자세조차 잘 되지 않으며, 차투랑가(팔굽혀펴기 자세로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오는 자세)는 이번 생엔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만 수년째 하고 있다.
'깔짝' 겉핥기 요기답게 2박 3일의 요가와 명상, 춤을 배우는 캠프를 등록했다. 비건 음식을 파는 업체들이 간단한 음식을 팔고, 소나무 숲의 캠핑장과 그 앞의 바닷가에서 요가와 명상, 춤을 배우는 프로그램을 연이어하는 일종의 리트릿 프로그램이었다. 이틀 동안 '뭘 또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나' 싶도록 하나의 프로그램도 빼놓지 않고 모두 참여했다. 몸이 힘들면 중간에 쉬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힘들지는 않았다. 바닷가에서 싱잉볼 명상을 하고, 숲으로 돌아와 요가를 두 시간 하고, 다시 바다로 나가 훌라를 췄다. 다음 날에도 비슷한 일정이었다. 명상과 요가를 번갈아 가면서 하다가 아프리카 춤을 배웠다. 명상으로 생각을 비우고, 몸을 관찰하고 움직이며 요가를 하고, 또 춤으로 내 안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시간을 반복하다 보니 나는 꽤나 집중해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삼시 세끼를 챙겨먹는 것에 익숙한 나지만, 배도 안고팠다. 옥수수와 감자떡으로도 충분했다.
바닷가에서 요가를 하는 것은 스튜디오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바닥이 평평하지도, 단단하지도 않아서 균형을 잡기가 더 어려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신 불어대는 바람에 매트도 날리고 모래도 날려 집중을 놓치기 쉬웠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그 상황이 너무 즐거웠다. 바람소리에 강사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전히 두려움이 나를 압도해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자세가 있었지만 아쉽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것'이 요가의 미덕이라 굳게 믿으니까. 50분간 그렇게 매트 위에서 낑낑거리고 나면 바야흐로 '사바아사나' 시간이 주어진다. 온몸에 힘을 풀고 누워 눈을 감고 가만히 호흡하는 시간이다. 생각을 비워내고 가만히 호흡을 관찰하기도, 매트 위의 내 몸을 가만히 느껴보기도 하는, 1분 남짓한 짧은 시간을 보내야만 비로소 요가는 끝이 난다.
그런데 그날의 사바아사나는 여느 사바아사나와 달랐다. 50분간의 요가가 끝난 뒤 누워 숨을 쉬고, 손가락과 발가락을 조금 움직이고, 의식을 깨운 다음 슬며시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있던 모래가 은하수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내 몸 위를 덮는 것 같았다. 분명 50분간, 아니 그 전 시간에도 여러 번 그 모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잠시 눈을 감았다 뜬 사이에 완전히 새로운 모래로 바뀌다니. 모래 알아 아주 작아 몸에 감기는 부드러운 모래사장도 아니었는데, 사바아사나가 끝나고 마주한 모래는 그 어느 비단 못지않게 부드럽고 반짝였다. 자리를 옮겨 숲으로 이동해 요가를 하고 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소나무 숲 사이에 매트를 깔고 한 시간이 조금 덜 되게 몸을 '낑낑거리고' 나면 휴식의 시간이 주어진다.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눈을 감았다 뜨면 나무 사이로 갈라져 내리는 햇살이 유난히 빛난다. 나무 사이로, 또 나뭇잎 사이로, 그리고 같이 요가를 했던 사람들 사이로, 내 손가락과 머리칼 사이로 유연하게 갈라져 내리는 햇살은 눈을 감았다 떠야 보인다.
집에서 요가를 하면 사바아사나를 하려고 눕는 순간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보인다. 구석에 미처 닦아내지 못한 먼지가 보이고, 저 멀리 싱크대에 씻지 않은 설거지거리가 보인다. 요가 스튜디오는 조금 나은 편이지만 여전히 이 정도의 강력한 집중을 경험하지는 못했다. 이틀에 걸쳐 집중적으로 몇 시간 동안 수련을 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바다와 숲이 주는 장소의 힘이었을까. 아무튼 나는 돈과 시간을 들여 먼 곳까지 나를 데려오고, 또 열심히 몸을 움직인 스스로에게 찐으로 고마웠다.
작년부터 올해까지 나에게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일들이 나에게 '닥쳤다'라고 생각했다. 그 닥쳐 드는 일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 과정에서 에너지가 많이 쓰이기도 했다. 에너지가 너무 없어서 좀 채워 넣으려고 쉬기 시작했는데 생각보다 채워진 에너지보다 새어나간 에너지가 많다고 생각했다. 바닷가에서 눈을 감았다 떴을 때, 그 반짝이는 모래가 내 몸을 뒤덮는 것 같았을 때, 나는 내가 오랫동안 눈을 감는 시간이 필요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이나 눈을 감았다 뜨고 나니 그제야 채워진 에너지가 보이고, 나에게 일어난 일들이 지나간 것이 보였다. 눈을 잘 감고 있을 수 있게 떠받들고 있어 준 가족들이 보였고,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친구들이 보였다.
가끔은 눈을 감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시간이 되면 몸에 힘을 모조리 다 풀고 누워 눈을 감아야 한다. 잠깐만 눈을 감았다 뜨면 보이는 것이 많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