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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레몬을 줬는데 레몬 머랭 타르트를 만든 이야기

영화 성덕 - 김하나, 황선우 작가 GV 후기

by 망원동 바히네

"나는 정준영의 팬이었다"


성덕사에 울려 퍼지는 '데에에엥-'하는 타종소리와 함께 나오는 이 짧지만 강력한 문장으로 영화는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성덕'을 만든 오세연 감독은 정준영의 팬, 그것도 그 커뮤니티 안과 밖에서 눈에 띄게 활동을 하던 팬이었다. 정준영의 눈에 띄기 위해 한복을 입고 팬사인회에 가서 그의 눈에 도장을 찍고, 공중파 TV 프로그램에 '정준영 바라기'라는 닉네임으로 출연하기까지 하는, 그야말로 '덕후'였다.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성범죄에 연루된 정준영을 비롯한 여러 연예인들이 몇 달에 걸쳐 신문 사회면을 장식했다. 모르긴 몰라도 오세연 감독의 인생에서 가장 크게 겪었던 좌절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 좌절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목 끝까지 차오를 지경이었을 텐데 그 경험을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는 여전히 '오빠의 팬'을 자청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남아있는 팬들을 조명하며 'K-pop 시장의 삐뚤어진 우상화'를 대단히 꼬집기 위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지만, 영화의 끝엔 옮겨간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를 찍자고 조연출을 뽑았는데, 그 조연출은 승리의 팬이었다. 중학교 시절 오 감독의 어머니는 한 달에 수일씩 야근 근무를 하느라 혼자 까만 밤을 보내는 딸이 애처로웠다고 한다. 그 무서운 밤을 목에 칭칭 감기는 이어폰을 통해 들려오는 '준영이(오 감독의 어머니가 정준영을 '준영이'라고 칭한 것조차 마음이 저릿한 포인트)'의 노래를 들으며 버텨준 딸이 장하고, 준영이에겐 고마움을 늘 느꼈었다고 했다. 어린 딸의 무서운 밤을 이기는 지지대가 되어준 그가 극악무도한 여성 대상의 성범죄를 저질렀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오 감독의 어머니는 배우 조민기의 팬이었다.


이밖에도 영화에 등장한 인물들은 강인, 가을방학 등 모두 성범죄에 연루된 연예인의 팬이었던 여성들이었다. 의도한 연출이 아니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약속이나 한 듯 눈물 없이도 볼 수 없지만 폭소 없이도 볼 수 없는 장면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 여성들은 지금은 성범죄자가 되어버린 연예인을 좋아했던 과거의 스스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황당하고 열받고 짜증이 폭발하지만, 이들은 끝끝내 그 범죄와, 범죄자들을 부정할지언정 누군가에게 열정을 바쳐 마음을 준 스스로를 탓하지 않는다.


한 번도 아이돌을 덕질해 본 적이 없었던 나는 늘 마음 한 구석에 덕질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왠지 어릴 때만 할 수 있는 순수한 사랑의 한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물며 늘 나이 많은 사람만 만나왔던 20대 시절의 연애들 덕분에 그 흔한 '곰신'생활도 안 해본 것이 덕질 무경험과 합쳐져 순수한 사랑에 대한 환상만 키웠다. 사실 덕질이나 곰신 생활 같은 것들이 모두 순수하고 열정적인 사랑도 아닐뿐더러, 사실은 그것이 미디어에서 만들고 내 머릿속에서 키워낸 상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아 나는 덕질 생활을 오랫동안 해오거나 했었던 친구들에게 '덕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늘 묻곤 했다.


오세연 감독이 정준영에 빠지기 전에 한 명을 깊이 좋아하지 않고 늘 바꿔가며 조금씩만 관심을 줬던 것처럼 나도 어릴 때는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연예인이 늘 바뀔 뿐이었다. HOT가 캔디를 부를 때 나는 리더인 문희준에게 관심을 주었고, 그 관심은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곧 그가 솔로로 데뷔하고 난 뒤 나는 내가 문희준을 한 때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몹시도 부끄러워졌고 나의 흑역사를 꽁꽁 숨기고 무덤까지 가져가겠노라 다짐했다.


오세연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는 그래서 힘이 있었다. 나의 "사람 보는 눈 없음"을 행여나 의심도 하지 않고 나의 사랑했던 마음을 마음껏 꺼내어 펼쳐놓고 낱낱이 관찰하는 용기가 너무 부럽고 대단했다. 정준영을, 승리를, 조민기를, 강인을, 정바비를 좋아했던 이야기, 우리의 판단력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 여전히 그들을 사랑했던 과거의 스스로를 따뜻하게 바라보고 보듬는 이야기는 일종의 마음 챙김 명상과도 같았다. 과거를 청산하겠다며 '굿즈 장례식'까지 거하게 치르고 나서도 다 못 버린 굿즈가 남아있다는 이야기를 - 무려 영화가 대박 나면 영화 박물관에 기증할 소중한 자료라고 유머로 승화시키는 이 귀엽고도 자랑스러운 자기 성찰의 과정은 영화가 되어 세상에 나왔다. 그냥 나온 게 아니라 메아리가 울려 퍼질 만큼 큰 극장에서 그것도 무려 황선우, 김하나 작가를 모시고 GV까지 하는 대단한 성공으로 연결됐다.


눈물 닦으면 다 에피소드고, 삶이 레몬을 주면 레모네이드를 만들면 된다는 이야기를 이토록 현실에서 잘 실현한 사례가 또 있을까? 이 정도면 그냥 레모네이드는 이미 한참 지나 심지어 썩기 직전의 좋지도 못한 레몬을 받아 들어 금가루로 장식한 레몬 머랭 타르트 정도는 구운 게 아닐지. 아마도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덕질의 마음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세연 감독이 멋지게 흑역사를 성공의 밑거름으로 만들어버리는 용기와 실행력에 감탄을 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떻게 99년생이 저렇게까지 인생을 대하는 태도가 열반의 경지와 맞닿아있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내 안의 에이지즘을 알아차리며... 멋있으면 다 언니! 오세연 감독 언니, 좋아해요.



92430fe7abdfadc551b7a173effa766e.jpeg 영화의 포스터는 오세연 감독이 직접 그린 그림. 영화 속에서 이 그림의 정준영은 손이 하나였는데, 이후 후작업을 통해 수갑을 채우면서 손이 하나 더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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