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 등에 불 떨어진 상태로 '앗 뜨거워'하며 뛰는 달리기
한 참됐다. 마라톤 프로그램을 등록한 것은 한 달도 더 전인 것 같다. 5km는 가끔 뛰어봤으니 시시하고, 10km는 아무래도 오버인 거 같아서 7km 프로그램을 등록했다. 한 달 동안 열심히 훈련하면 가볍게 뛰지 않겠냐는 심산. 날짜가 다가오면서 불편해지는 마음과 달리 달리기는 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달리기가 지겨워졌다. 5km도 못 뛰고 걷다 오는 날이 많았다. 숨이 찬 것도, 다리가 아픈 것도 아닌데 그냥 '지겨웠다'. 플레이리스트도 바꿔보고, 달리는 코스도 바꿔봤는데 그냥 달리기가 지루해졌다. '러너스 하이' 같은 건 글쎄, 정말 잘 모르겠더이다. 한 참 '런데이'라는 어플에서 목표 달리기를 완주하면 찍히는 도장을 받으러 다니는 재미가 끝나자, 다시 '운동은 다 재미없어' 모드로 전환된 것일까.
이제 정말 2주도 남지 않은 마라톤. 안 한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왠지 모르게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랑 같이 뛰어 달라 부탁해서 마라톤을 같이 신청한 친구가 이번 주에 동네로 와서 같이 한번 뛰자고 했다. 인천에서 먼 길을 훈련을 위해 와 준다는데, 내가 '지겨워서' 못 뛰겠다고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숙제 검사를 코 앞에 둔 애처럼 번뜩 정신을 차렸다. 혹시나 싶어 '런데이' 어플에서 모든 가이드 음성을 다시 켰다. '멋진 몸매를 만들어 준다'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 하는 것이 영 거슬려 음성 가이드를 모두 꺼둔 터였다. 다시 돌아온 런데이 아저씨는 정말 쉴 새 없이 내 귀에 소리를 질러댔다.
"와, 정말 대단해요!"
"지금 1등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속도를 조금만 줄여보세요. 중요한 것은 일정한 호흡과 속도입니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힘내세요!"
'이 아저씬 변한 게 없네...'생각하며 천천히 달렸다. 어이없게도 그렇게 지겹던 5km 넘기기를 통과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7km를 뛰었다. 워낙 천천히 달려 숨도 차지 않았고 밤 날씨가 시원해진 탓에 땀이 과하게 나지도 않았다. 무릎과 다리는 조금 뻐근했다.
갑자기 성공한 7km 달리기.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이 지긋지긋한 아저씨의 잔소리였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애초에 달리기를 시작하게 한 것도 그 아저씨였다. '날씬한 몸'에 대한 그 아저씨의 집착과, 양말부터 옷, 신발을 사라고 하는 소비 조장을 할 때마다 '아이 거참!' 하면서 핀잔을 주고받던 사이, 혼자 토라져 (왜?) 아저씨를 없애 버린 몇 달을 지나 아저씨가 돌아왔고, 그 덕에 또 7km를 뛰었다.
집 앞 놀이터로 돌아와 짧게 스트레칭을 한 뒤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기구에 누웠다. 이 기구는 아무래도 척추를 늘려 펴는 기구인 것 같다. 감나무 아래 누워 플레이리스트를 마저 들었다.
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
왜 내가 아는 저 많은 사람은 사랑의 과걸 잊는 걸까
좋았었던 일도 많았을 텐데 감추려 하는 이유는 뭘까
(이유는 뭘까 이유는 뭘까)
아하하하~ 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어 내 경험에 대해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언제까지나
아하하하 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있어 내 경험에 대해
내가 사랑을 했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언제까지나
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때
주주클럽의 <나는 나>. 독특한 보컬과 '때때 때때'하는 반복되는 구간이 특이해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유행했던 노래로 기억한다. 놀이터에서 땀을 식히며 듣는 <나는 나>의 가사가 귀에 꽂혔다. 일 년간의 짧다면 짧은, 그래도 사계절을 함께 보낸 사람과의 이별, 골든 레트리버와 말티즈를 합쳐놓은 것 같은 예쁘고 사랑스럽던 후배와의 영원한 이별, 다니던 직장과의 이별, 함께 웃고 여행하고 밥을 나누던 사람들과의 놓아버린 이별, 내 몸을 구성하던 신체의 장기가 한순간 없어져버린 이별, 지금보다 젊은 날의 나와의 이별, 옷장에 묵혀있던 옷들과의 이별. 최근 몇 년 사이 참 많이도 이별했더라. 놓아버리고 놓아진 사람들과 물건들 모두 너무 소중하다.
후배 K가 죽은 지 꼭 일 년이 되는 날이 다가온다. K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나에게 했던 말은 '사랑해요 언니!'였다. 나는 끝끝내 '나도 사랑해!'라고 다정하게 받아주지 못하고 '잠이나 자라'며 대화를 끝냈다. K가 떠난 뒤 나는 그 채팅창을 보고 또 봤다. '내 새끼'라고 본인을 불러 달라고 강아치처럼 애정을 표현하고 요구하던 K는 언제나 사랑스러웠고, 나는 언제나 무뚝뚝한 편이었다.
K는 아직도 '런데이'어플에 남아있다. 아마 내가 어제 아무렇지도 않게 7km를 뛰는 것을 보며 그 큰 눈을 더 크고 동그랗게 뜨며 '아, 대박! 아니 또 맨날 못한다고 하면서 이렇게 잘하실 거면서!'라고 연신 외치고 있을 것이다. 팔짝팔짝 뛰면서 '힘내세요 언니!!' '천천히 달리세요 언니!!' '오늘만 뛰고 안 뛸 거예요?? 힘 빼세요!!' 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