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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기' 드럽게 어렵네

알아차리려 할수록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아서 오묘하게 기분 나빠...

by 망원동 바히네

물욕이 한참 없다가 헤드폰에 꽂혀버렸다. 블루투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 컬러는 실버 색상. 애플이냐 소니냐, 아니면 다른 회사의 제품이냐 고민하다가 금세 소니로 정했다. 애플은 너무 비싼 데다 비싼 주제에 음질은 소니보다 떨어진다고 하길래 소니로 마음을 굳혔다. 집 근처 교보문고 매장에 가서 소니 헤드폰을 쓰고 내 핸드폰과 연결했다. 섬세하게 음질의 영역대별로 평가할 귀는 아니기에 대충 노이즈 캔슬링 정도와 빵빵 울리는 음악이 썩 맘에 들었다. '당근'에 키워드 알림을 해두고 몇 주간 고민했다. 사람들은 그 비싼 헤드폰을 많이도 샀고, 몇 번 쓰지 않은 채 당근에 내놓았다. 가격을 비교하고 흥정하며 3주 정도 보냈다. 결국 '이거다!'싶은 아이템을 찾아 거래했다.


헤드폰을 사서 돌아오는 길, 기분이 좋아 신촌에서 집까지 걸었다. 물론 헤드폰을 끼고. 더운 날씨에 헤드폰이 지나치게 더울까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그렇지 않았다. 갖고 싶었던 것을 가져서인지 더운 날씨에 비가 살짝 뿌리는대도 신나는 발걸음으로 집까지 걸었다. 헤드폰을 구매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 귀가 더 이상 간지럽지 않았다.

작년 가을 프리다이빙 자격증을 따러 다닌 이후에 몇 주간 이비인후과를 다녔었다. 귀에 염증이 생겼다고 했다. 며칠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하고 샤워나 수영 후에 꼭 드라이기로 귀를 쫙 당겨 안쪽까지 잘 말려주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지만 그 이후로도 이따금 귀는 간지러웠다. 귀가 간지러우니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귀에 손이 갔다. 면봉도 대 보고, 면봉에 소독약을 발라서도 귓속을 닦았다. 안되는 걸 알면서도 귀이개로 귀를 긁기도 했다. 귀가 너무 간지러웠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프리다이빙 이후에도 자주 수영장에 다녔기 때문에 아마도 나는 이런 수상 스포츠가 내 귀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인가 생각했다. 헤드폰을 사용하기 전까지는.


에어팟 1세대부터 약 5년간 에어팟만 사용해왔다. 아이폰을 쓰는 사람들은 에어팟을 쓰니까, 나는 아무런 의심 없이 에어팟만 써 왔다. 매번 충전이 되어 있지 않아서 간당간당한 배터리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에어팟만을 고집해왔다. 헤드폰으로 갈아타고 난지 2-3주가 지난 지금. 간지럽지 않은 귀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헤드폰을 쓴 날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면봉이나 귀이개를 사용한 적이 없고 귀가 간지럽지만 만지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꾹 참은 적이 없다. 내 귀는 에어팟 때문에 간지러웠던 것이다.


이쯤 되니 헤드폰으로 갈아탄 것에 대한 기쁨도 잠시, 나는 에어팟이 내 귀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도 모른 채 5년이나 사용해왔다는 사실이 황당하기에 이르렀다. 프리다이빙 이후로 부쩍 귀가 더 간지러워진 것 같지만,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귀를 면봉으로 닦아낸 것은 그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깊은 생각 없이 귀가 간지러우면 간지럽나 보다 하고 넘겨왔다.


귀뿐일까?

갑자기 의심과 불안이 솟아올랐다. 나는 대부분에 예민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생각해보면 나는 상당히 둔한 사람이라는 것을 문득 발견하게 된다. 헬스장에서 덤벨을 들 때는 세상 둘 도 없는 겁쟁이지만 발이 닿지 않는 깊은 바다에 아무렇지도 않게 풍덩 뛰어들기도 하고, 저녁부터 배가 아팠지만 아침까지 배가 아프다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지 않아 아침에야 겨우 응급실에 간 그날, 조금만 더 늦었으면 큰일 날 뻔 한 맹장염이란 소리를 들었다. 상대의 마음을 읽고 원하는 것을 제 때 쥐어주는 것이 내 커리어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고, 마음먹은 일이 있으면 곧 잘 엉덩이를 붙이고 일이 끝날 때까지 끝장을 보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지루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을 모두 가지고 있고, 그 어떤 쪽이 발현되더라도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나'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도 언제나 숙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늘 감정이 풍부하고 표현이 자유로운 것이 '나'라고 생각했지만 최근 상담을 받으며 감정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내 감정을 표현하는데 내가 얼마나 미숙한지를 깨달았다.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어요?' '떠오르는 감정을 표현해 보세요'라는 주문을 받으면 곧 잘 머릿속이 하얘진다.


'나는 감정과 표현이 풍부한 사람인데?'라는 생각이 감정을 알아차리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정작 내 감정을 알아차리는 것에 나는 너무 미숙한 사람이구나'를 겸허히 수용하며 감정을 기록해본다. 자라면서 나는 내 감정 표현이 충분히 받아들여지기보다는 경상도 특유의 '뭐든지 희화화 하기'나 '쫑크 주기(무안 주기)'같은 분위기에서 자랐기 때문에 우는 것 말고는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자란 탓도 크다. 내 감정이 충분히 얘기되고 수용되며, 공감받은 기억을 잘 기억하고 떠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여전히 '화나', '기뻐', '좌절스러워', '짜증 나', '뿌듯해' 같은 표현만 돌려가며 쓰고 있다. 귀가 간지러운지 안 간지러운지, 왜 간지러운지, 에어팟 때문인지 수영장 때문인지 잘 살펴봐야 하듯 내 감정도 매 순간 잘 살펴봐야 하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다. 시간을 따로 내서 내 기분을 살펴주고, 감정이 떠올랐을 때 기록도 해보고, 그 감정이 기인한 생각이 무엇인지 적어보고, 가만히 앉아 명상을 하는 일 따위가 필요한 이유다. 익숙하지 않으면 그 일을 해내는데 대한 저항이 생기고 시간과 에너지가 많이 든다.


아무튼 헤드폰 구매 합리화하려는 건 아니고... 그냥 그렇다는 거지 뭐. 설거지할 때도, 빨래를 갤 때도 거실 스피커로 틀어놓은 팟캐스트는 늘 그냥 흘려보내는데 헤드폰을 끼고 들으면 귀에 쏙쏙 잘 들어온다. 귀도 안 간지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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