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순간의 나를 떠올려 본다면
20년 가까이 부모가 만들어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밖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 채, 대학이라는 목표 하나로 500점짜리 수능이라는 틀에 짜 맞춰지며 하루에 18시간을 앉아있던 학교를 떠나 처음으로 떠난 여행. 첫 여행은 친구 두 명과 함께 남들이 다 돈다는 '서유럽 한 달 루트'를 돌았던 여행이었다. 파리 샹젤리제 거리에서 굴러가는 밤알을 보며 자지러지듯 웃었던 일, 파리에서 제네바 호수까지 당일치기 여행을 가서 정작 도착한 호수에서는 잔디밭에 누워 낮잠을 잤던 일. 한 명이 여권을 챙기지 않아 스위스로 가는 기차 안에서 낙오가 되었고, 그 친구가 파리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우리에게 편지를 쓰며 무서움을 달랬던 일, 그리고 스위스에서 돌아와 그녀를 위로하며 다 같이 너구리를 끓여 먹던 일 같은 것들이 남았다. 남들이 다 간다는 큰 도시들을 돌아서였을까, 정작 여행지에 대한 기억은 크게 없다. 동행한 이들과의 주고받은 에너지, 낙엽만 굴러가도 자지러지듯 웃는 스무 살 때의 발랄함이 아련하게 남았다.
그다음 해, 혼자 떠난 4개월간의 여행에서 나는 무엇을 경험하고 느꼈던 것일까. 인스타그램도 없고 페이스북도 안 하던 시절. 스마트폰도 없어 '론리 플래닛'을 북북 찢어가며 돌려보던 그 시절의 여행은 그 이후에 나를 계속 여행하게 만든 핵심 경험이 되었다. 미리 인스타그램으로 샅샅이 알아버린 숙소를 예약해 두는 것도 아니었고, 한 곳을 여행한 뒤 다음에 갈 곳을 정해두는 것이 어색했던 막무가내 여행의 감각을 나는 왜 아직도 붙들어두고 있는 것일까. 8인실 도미토리 룸에서 만난 사람이 괜찮으면 그 사람을 따라 그다음 여행지를 정하고,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고 탄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배 안에서 만난 사람이 집에서 재워주겠다고 하면 그 사람이 사는 곳으로 여행지를 정했던 경험은 왜 나에게 위험한 기억이 아닌 폭발적인 에너지가 되어 내 삶을 채우고 있는 것일까.
혼자서 한 4개월의 여행 이후 코로나 전까지 나는 힘이 닿는 한 여행했다. 회사를 다니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는 더욱 그랬다. 스마트폰이 생기고, 인스타그램에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서 '서프라이즈'는 줄었고 미리 하는 숙소나 프로그램에 대한 예약은 늘었지만, 여행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이야기들을 던져주었다. 여행하며 만난 사람들과는 언제나 경계 없이 소통하며 연결되었고, 크고 작은 사고와 불편한 감정들은 아무것도 아닌 듯 즉각적으로 흘려보내졌다.
언젠가 엄마가 '넌 여행이 왜 좋아?'라고 물은 적이 있다. 가만히 생각하다가 나는 '여행할 때의 내 모습이 좋아'라고 답했었다. '여행할 때의 나'. 그런 나의 어떤 모습이 나는 그토록 좋았던 것일까. 그래서 돈이 생기는 족족 여행하는데 다 써버렸던 것일까. '여행지의 음식이 좋아서', '여행지의 아름다운 자연을 경험하고 싶어서', '여행지의 어떤 문화를 경험해보고 싶어서' 같은 이유들이었을까. 표면적으론 그랬겠지만 그 아래엔 그런 경험들을 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가 어떤 것인지, 그런 경험들을 해 나가면서 어떤 면에서 충족되는 감각이 있었다.
예전에 같은 회사를 다녔던 후배는 여행이 싫다고 했다. 그는 매년 사장실에 불려 가 혼나는 한이 있더라도 (여행 일정을 시무식과 같은 전체 회사 행사가 있을 때 잡았기 때문. 의도한 것은 아니었고 그냥 나의 스케줄링 능력이 부족했던 탓.) 길게 휴가를 가고, 휴가를 다녀온 직후의 에너지가 그 전과 너무 달라지는 나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여행할 때의 내가 좋아서'. 같은 대답을 하는 나에게 그는 여행이 싫다고 했다. 여행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당연히 생각하고 있던 터라, 나는 그 대답이 너무 생소했다. 여행을 싫어하다니. 그녀는 여행을 가지 않아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 돈과 에너지를 써서 고생을 하는 느낌이라 여행이 싫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여행을 가지 않으면 뭔가 잘 살고 있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사회적 분위기가 여행에 대한 저항을 더한다고도 했다. 그때는 되게 특이한 후배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후에 만난 애인이 비슷한 이유로 여행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그 후배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나는 왜 여행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더 깊게 하기 시작했다.
내가 갔던 모든 여행이 같은 수준의 긍정적 기억으로 남지는 않았다. 어떤 여행의 기억은 시간의 순서와 상관없이 더 많이 바랬다. 일에 집착하고 매달려있을 때는 여행은 '여행하는 나'의 모습을 만끽하러 가는 것보다 '탈출구'의 역할이 컸다. 잠깐 '멈춤'버튼을 누르고 현실에서 거리를 두면서 '스스로에게 휴식, 혹은 호사를 주는 나'를 만들어야 했다. 아마도 그런 '멈춤'버튼 덕분에 견디는 힘을 배웠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여행에서는 오롯한 휴식의 감각이 지배적으로 남았을 뿐, 내가 좋아했던 '여행하는 나'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덜 남았다.
코로나로 여행을 가지 못했던 날들이 길어지면서 나는 왜 여행하는지, 여행하는 나의 모습을 왜 그토록 원하고 좋아했는지를 더 깊게 생각하게 보게 됐다. 거기에 더해 여행하지 않아도 '여행하는 나'의 모습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을 하게 됐다. 어쨌든 그 편이 훨씬 이로울 텐데 그렇게 사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여행하는 나'의 모습을 여행하지 않을 때도 찾아오기 위해서는, 그러니까 일상을 여행하듯 살기 위해서는 '여행하는 나'의 모습을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최근에 읽었던 책들과 상담의 결과들, 그리고 친구들과의 대화를 통해 훨씬 더 명료해졌다.
경계심이 없고 세상을 안전하게 인식한다. (비록 여행지는 일상보다 훨씬 더 위험요소가 많겠지만)
여행에서 만난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나를 좋아하고, 나에게 도움을 줄 것으로 인식한다.
그렇게 만난 사람들과 조금 더 교류가 이어진다면, 나는 조건 없이 내 마음을 내준다.
이미 그 여행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렌즈를 참고하기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으로 세상을 본다.
아프거나, 인종차별을 당하거나, 소매치기를 당하는 등의 부정적 사건들과 그때의 감정들을 순식간에 흘려보낸다.
여행하는 나로 일상을 살 수 있을까? 여행하는 나로 일상을 살고 싶은 나의 소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음 여행지에서 '여행하는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