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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Jul 21. 2021

엄마 아들이 인생에 도움이 됐다.

병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내일 무슨 라면을 먹을지 생각하는 오빠란 인간

바퀴가 달린 침대에 누운 채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 대기실에서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는 문구와 구름이 뭉게뭉게 그려진 천장 벽지를 보고 '아이고 요즘 병원은 참 신경을 많이 쓰네'하고 감탄이나 하고 있던 것과 달리, 정작 수술실 안의 전경은 소스라치게 차가웠다. 수술복을 입은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 수술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 다섯 명쯤 있으려나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놀랐다. 수술 대기실과 수술실 안의 전경과 분위기는 정말이지 상반되었는데, 나에게 같은 질문 - 무슨 수술을 하는지 알고 있느냐, 치아 빠지거나 한 적 없느냐, 약물 알레르기 없느냐 등 -을 반복해서 물어보는데도 그 속도감이  이전보다 한 세배쯤 빨라진다. 나에게 말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수술복을 입은 사람들이 무언가 바삐 하느라 분주한데, 거기에 기계 소리, 철이 부딪히는 소리, 알아듣지 못할 말들로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들이 한데 뭉쳐져 쏟아졌다.  

"담당 교수님 성함 뭐예요? 기억해요? 오늘 무슨 수술받으러 왔어요?"

이쯤 되면 이 질문에 짜증이 치솟는다. 아니 그걸 몰라서 물으세요? 거기 쓰여 있잖아요. 거대 자궁 점막하 근종으로 인한 자궁적출이요. 나는 이 사람들이 왜 몇번이고 이 질문을 반복하는지, 왜 그래야만 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긴장한 탓에 짜증이 난다.

"환자 번호 불러주세요."

"기억 안 나는데요."

"손목에 팔찌 보고 숫자 읽어보세요."

이런 지루한 질문을 평소의 3배 스피드로 정신이 쏙 빠지게 주고받고 있다 보면, 어느새 고요하게 마취 상태로 접어든다. 

"저기요 선생님, 예쁘게 꼬매 주세요." 나는 분명 이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는데, 진짜 내가 이 말을 한 것인지, 마취약에 취해 내가 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그 이후의 기억이 없다. 


시간이 지나 누군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환자분, 정신 드세요? 주무시지 마세요. 환자분, 주무시면 안 돼요."

정신이 드는 것을 보니 수술이 끝난 듯했다. 1월 중순 추위에 면 티 하나만 입고 밖에서 누워있는 듯이 오한이 몰려왔다. 

"너무 추워요. 선생님, 너무 추워요."

"네, 담요 두 개 더 덮어드릴게요. 이제 괜찮으세요? 아직도 많이 추워요?"

나는 다시 뭉게구름이 그려진 수술 대기실에 있었다. 

"수술은 잘 끝났어요. 여기서 마취 좀 깨고 병실로 올라갈 거예요. 통증은 어때요? 많이 아파요? 무통주사를 아직 안 놨는데, 참을만해요?"

간호사 선생님은 자꾸만 눈꺼풀이 쏟아지는 나에게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전신마취에서 깨고 복강경 수술을 위해 주입한 가스를 배출시키려면 숨을 잘 쉬어야 하기 때문에 잠이 들면 안된다.  연로하거나 마취에서 깨는 것이 어려운 몸 상태인 경우 마취를 못 깬 채로 위급상황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나는 병실로 옮겨진 뒤에도 3시간 동안 잠에 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받았다. 간호사는 오빠에게도 환자분이 잠들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간호사 선생님들은 방을 나갔다. 


"수술 잘 됐단다. 코로나 때문에 수술 대기실까지 가지도 못하고 나는 계속 여기 있으라 그래서 여기 있었다. 수술동의서에 하도 오버를 해서 나는 큰일이나 날줄 알았더니만 자궁만 잘 떼고 잘 꿰매었단다. 자지마라."

"잠이 이렇게 오는데...?"

"자면 안 된단다. 자지 마라. 마이 아프나?"

"배가 욱신거린다. 잠 온다."

"두 시간만 참아라. TV 볼래?"

예능 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가 시끄럽게만 느껴졌다. TV를 끄고 버텼다. 

"양말 좀 신겨줘. 발 시려."

오빠는 내 발에 양말을 신겨주고, 담요를 두둑이 덮어줬다. 태어나서 오빠가 나에게 양말을 신겨준 일이 있었던가? 누워있는 나를 챙기는 오빠의 모습이 몹시도 낯설고, 고마웠다.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고문이다. 잠고문이 왜 있었는지 이해가 됐다. 배고픈데 밥을 안주는 것 보다, 졸린데 잠을 못 자게 하는 게 훨씬 더 괴로운 일이라 확신했다. 내 눈이 50퍼센트 이상 감기기 시작하면 오빠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자면 안 된다."

"몇 시야? 졸려. 아직도 그만큼 남았어?"

"아프나? 무통주사 놔달라고 할까?"

"참을 만 해. 목마르다."

두 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우리의 대화는 이 이상 진전은 없었다. 자지마-몇시야-아프나-몇시야로 이어지는 대화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드디어 두 시간 반 정도가 지났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눈을 편히 감고 잠이 들었다. 


병실 보호자 침대는 소파를 겸했다. 좁고 작고 딱딱한 소파 위에 오빠가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무통주사를 맞지 않고 견딜 수 있을 정도의 고통이었지만 그래도 누웠다 일어나는 것을 혼자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간호사가 들어와 앞으로 24시간 동안 소변의 양을 측정해서 기록하라고 오빠에게 알려줬다. 변기 아래 별도의 플라스틱 통을 두고 소변을 받은 뒤 다시 계량컵을 옮겨 소변의 양을 측정하는 식이었다. 우리는 여러 번 우리가 형제관계라고 얘기했지만, 간호사는 또 오빠를 남편으로 착각했나 보다. 소변을 누러 화장실을 가는데 나를 부축하던 오빠가 화장실로 들어오려고 했다. 

"왜?"

"소변 재야지."

"아 내가 할게. 미쳤어?"

"허리도 못 구부리는데 어떻게 하려고."

"아아아 나가!! 내가 할 거야. 못하면 부를게. 빨리 나가."

오빠는 머쓱하게 화장실 문 밖에서 문고리를 잡고 기다렸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링거줄을 정리해 한쪽에 두고, 보조대를 붙잡고 낑낑거리며 소변을 봤다. 천천히 옷을 추스르고 나서 다시 계량컵으로 소변을 옮겼다. 소변을 받은 통과 계량컵을 씻어서 고리에 걸었다. 오빠는 무슨 생각으로 화장실을 따라 들어오려고 한 걸까. 생각만 해도 너무 창피했다. 오빠가 내 소변보는 것을 도와주다니. 

"거봐, 혼자서 할 수 있다니까."

"엄마한테 말했다. 엄마 내일 온데."

"아 왜 말했어. 말하지 말라니까."

"니 혼자 집에 못 있는다. 봐라, 혼자 걷지도 못하는데. 걸을 때까지만이라도 엄마랑 같이 있어라. 주말엔 내가 다시 올게."

결국 내가 수술하는 동안 오빠는 엄마에게 내 수술 사실을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었는데, 막상 수술을 하고 나오니 생각보다 통증이 있고 거동이 힘든 것을 깨닫고 나니 차라리 슬쩍 오빠를 통해 말하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얘기지만 엄마는 처음 내가 수술을 했다는 것을 듣고 한 바탕 놀라 울고, 바로 말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로 또 울고, 이 일을 어쩌나 걱정의 과정을 지나, 수술과 입원기간에 오빠가 나와 함께 있어준 것이 기특하고 고마웠다고 한다. '어떻게 니가 혼자 동생한테 갈 생각을 했니' 물었더니 오빠는 "그럼 내가 가지 누가가노. 내가 쟤 하나뿐인 혈육인데."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세상 철딱서니 없고 해맑은 사람인 줄만 알았는데, 그래도 오빠는 오빠였나 보다. 


오빠와의 기억이라곤 내가 네 살 정도 됐을 때 자고 있는 내 배를 일부러 밟고 지나간 것, 슬리퍼를 신은 내 발등에 침을 뱉으며 놀린 것, 온 동네를 뒤져 형광색 비비탄 총알만 주워오도록 시킨 것, 컴퓨터 게임을 하는 동안 옆에 잠자코 앉아서 지켜보기를 시킨 것 같은 온갖 악동스러운 장난이 대부분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나를 너무 심하게 괴롭히던 같은 반 남학생을 혼내주겠노라고, 6학년 오빠들을 모조리 다 끌고 우르르르 내려와 흠씬 혼내준 것, 본인 친구들에게 '내 동생이 굉장히 공부도 잘하는데 엄청 예쁘다'라고 헛소문을 퍼트리고서 정작 내가 길에서 아는 척을 해서 정체가 탄로 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것 정도의 기억 같은 것들. 내 머릿속에 오빠는 그런 철없고 장난기만 많은 오빠였다. 그 오빠가 혼자 사는 동생의 든든한 보호자가 됐고, 가족 구성원 각자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누워서 한참 감격을 하고 있는데, 오빠가 컵라면에 콜라를 사들고 올라왔다. 새로 나온 신상 컵라면인데 엄청 먹어보고 싶었단다. 병원 지하 식당가에 코로나 때문에 문도 많이 닫고, 맛있는 것도 별로 없었는데 돌아다니다가 편의점에서 신상 라면을 발견했단다. 다소 신나 있는 표정이었다. 

"콜라를 왜 그렇게 먹어. 몸에 안 좋은데. 물 마셔."

"콜라 못 잃어. 라면 먹고 어떻게 콜라를 안 먹어."

"맛있냐. 나는 아직 금식인데."

"응. 엄청 매워. "

"밥을 사 먹지 그래. 그냥 환자식 시켜서 먹던가. 나가서 김밥이라도 사 먹던가."

"너는 내일부터 밥 먹을 수 있나? 내일 아침에 커피는 먹어도 되나? 여기 스타벅스 있던데. 나는 내일 아침에 커피랑 스콘 먹어야지~ 여기 옆 방에 특실인 거 알았어? 1인실보다 훨씬 크고! 막 양복 입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어! 연예인인가? 재벌인가? 이따가 스윽 또 가서 볼까?"

예전 같았으면 이런  오빠의 모습에 짜증이 났을 것이다. 내 고통에 공감을 못하는 것에 서운하고, 굶고 있는 내 눈치라도 보면서 나가서 먹고 들어올 일이지 싶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날은 오빠가 밖에서 밥을 먹는 동안 내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질까 봐, 간호사를 부르기 어려워서 소변을 참을까 봐 헐레벌떡 들어온 것이 그려졌다. 그 좁은 소파 침대에서 웅크리고 잠을 자면서도 다음날 아침에 무슨 스콘을 먹을지 생각하는 편이, 내가 왜 이런 병에 걸렸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인지 묻지 않는 편이, 내일 교수님은 몇 시에 오시는지만 파악해서 라면 냄새를 언제 풍길지 계획을 짜는 편이 내 마음을 몹시도 편하게 해 줬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하고 애를 키우고 있는 입장이었다면, 비혼인 오빠를 위해 아무 불만 없이 먼 곳까지 와서 병간호를 해 줄 수 있었을까? '그러게 왜 일찍 일찍 장가를 가지 않고서는!'이라며 은근슬적 있지도 않은 오빠의 배우자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못해 안달을 내지는 않았을까? 


몸이 회복되고 나서 오빠와 나는 또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는 무뚝뚝한 경상도 남매로 돌아왔다. 나는 오빠에게 고맙다는 말을 진심을 담아 하지도 못했다. 괜히 조카들 먹이라고 쿠키며 스콘, 파스타 소스 같은 것들을 잔뜩 만들어 보내기나 했다. 가끔 전화통화를 할 때도 여지없이 조카들과 화상통화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전화를 끊기 전에 "몸은?"이라고 짧게 물으면 "괜찮다."하고, "알았다. 쉬어라." 하면 끝인 사이. 조카들 없었으면 어쩔뻔했나 싶은 사이. 무소식이 희소식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생기면 멀리서 어쨌든 와 줄 사람이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 


어린 나이에 병이 생기고, 수술을 해야 하는 일은 물론 힘들고 좌절스럽다. 내가 선택할 수 있었다면 굳이 이런 일을 계기로 가족애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쩔 새도 없이 이미 나에게 벌어져버린 일이라면, 만약 살다가 또 그런 좌절을 겪게 된다면, 좌절을 같이 견뎌주는 사람들, 내가 좌절을 견뎌내도록 옆에서 묵묵히 있어주는 사람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싶다. 없어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런 사람들을 옆에 두고도 알아채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그리고 가까운 사람이 좌절을 겪을 때, 나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달려가 도와줄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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