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망원동 바히네 Jul 23. 2021

병동에 남자 보호자가 없었다

입원기간 동안 오빠가 유일한 남자 보호자였다.

자궁적출 수술 후 두 달 뒤에 나는 한번 더 전신마취 수술을 하게 됐다. 모든 게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새벽에 복통으로 침대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 응급실에 갔다. 장 천공으로 인한 복막염이 의심되어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장천공은 오진이었다. 어쨌든 나는 복강경으로 장천공을 확인하고 복막염에 대한 처치를 하기 위해 수술을 받았다. 첫 번째 수술에서 거의 수술 자국을 남기지 않았던 것이 허무하게도 큰 수술 자국을 남기게 됐다. 입원 기간도 일주일로 더 길었다. 나는 다시 오빠에게 보호자 역할을 부탁하게 됐다. 응급 수술은 계획하고 하는 수술보다 혈연 보호자를 더 까다롭게 요구한다. 서울에 살지 않는 오빠에게는 의사가 직접 전화로 수술내용을 설명하고, 가능한 한 빨리 병원으로 오라고 요청했다. 수술한 지 두 달만에 다시 수술대에 올랐다. 따뜻하게 느껴졌던 수술 대기실의 천장 디자인과 성경 문구들을 보지도 못하고 응급실에서 바로 차가운 수술대로 옮겨졌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다시 보호자로 마주한 오빠에게 나는 이전처럼 농담을 건네지도 못했다. 내가 하겠다고 결정한 수술과, 갑자기 해야 해서 하는 응급수술은 너무나도 달랐다. 내 배에는 전에 없던 큰 상처가 있었고,  소변줄에 피주머니를 찬 것도 새로웠다. 아무도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정확히 설명해주지 못했다. 그저 일주일간 입원하면서 고강도의 항생제 치료를 받으라고만 했다. 다시, 입원 생활이 시작됐다.


오빠도 갑작스러운 호출에 제대로 일을 마무리하지도 못하고 급히 짐을 싸서 온 듯했다. 노트북과 자료를 잔뜩 싸와서는 병실에서 일을 했다. 휴가를 얼마나 내야 하는지도 모르고 급히 올라온 것이라 회사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며칠 더 휴가를 연장하는 듯했다. '오빠가 아팠더라면, 나는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생각에 미안함, 고마움에 더해, 이렇게까지 자꾸 가족들에게 빚을 지게 만드는 이 상황에 대한 원망으로 엉망진창인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다. 오빠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당황스럽고, 곤혹스러웠겠지만 또 이내 해맑은 사람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병원 근처의 더 많은 식당 메뉴를 파악하고, 시키지 않아도 정시에 보호자 체온을 꼬박꼬박 측정하며 뿌듯함을 느꼈으며, 이제 막 입원한 사람이 복도에서 두리번거리면 화장실이며 정수기의 위치를 안내해주고 다녔다.


"아니, 이 병동 전체가 산부인과랑 유방암이랑 성형외과 병동인데 남자 보호자가 나밖에 없나 봐!"

"그래? 한 명도 없어? 하긴 나도 못 본 것 같다."

"진짜 한 명도 없어. 옆방은 남편이 어제 잠깐 왔던 것 같더니 통닭만 먹고 갔나 봐. 또 오늘은 어머니가 와계시네."

"어머닌건 또 언제 봤데."

"나이가 딱 그렇지. 간병인인가? 몰라. 아무튼. 젊은 남자는 나 혼자다. 근데 환자는 다 또 젊은 여자들이여. 너처럼. 아니면 엄마 또래 거나."

"그렇지, 산부인과, 유방암이니까. 남편들은 다 어디 간 걸까. 나만 싱글인 줄 알았더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입원 병동 전체적으로 보호자는 여성이 절대적으로 많았다. 다양한 연령대의 남녀가 환자로 입원했지만 보호자는 여성이었다. 전문 간병인을 고용하더라도 여성분이셨다. 나이가 많은 여성분이 입원하시면 딸이나 며느리가 병간호를 했다. 나이가 많은 남성분이 입원을 하셔도 딸이나 며느리가 병간호를 했다. 30-40대 기혼 여성이 입원을 하면 퇴근 후 남편이 잠시 들렀다. 나머지 시간은 간병인 또는 어머니가 그 자리를 채웠다.


출처 : http://www.datasom.co.kr/news/articleView.html?idxno=99302


실제로도 그런지 찾아보니 조사 결과가 있었다. 물론 입원을 포함, 통원치료를 받는 동안을 모두 포함한 것이 다른 점이었다. 2019년 삼성서울병원 신동욱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암환자의 대부분이 신체 및 정서지원 등을 자녀보다 배우자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의존도 면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는데, 신체활동 지원의 경우 남성 환자의 경우 배우자에게 86.1%, 여성 환자는 36.1%에 그쳤다. 여성 환자는 딸(19.6%), 아들(15.8%), 며느리(12.7%), 또는 스스로(12%) 해결한다고 답했다. 정서 지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성 환자는 84%가 배우자에게서 심리적 위안을 얻은 반면, 여성의 경우 이 비율이 32.9%에 불과했다. 여성 환자는 딸(28.5%), 아들(17.7%)에서 위안을 얻었다고 답했다. 많은 경우 여성들은 가족들에 대한 돌봄 노동을 평생 해 온 경우가 많고, 아프다고 해서 한 순간에 역으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지기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러나저러나, 환자로서도 간병인으로서도 정말 쉽지 않다.


배우자도 자녀도 없는 젊은 나는 경제적, 의사결정, 병원 방문은 스스로에게 100% 의지, 식사지원, 신체활동 지원, 정서지원의 일부를 가족에게, 많은 부분의 정서지원을 친구들에게 의지 했다. 간병인을 고용할 수 있었지만, 실비보험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이었다. 이미 1인실에 입원을 한 터라 비용 부담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수술 시 가족 보호자 필참의 규정이 있다면, 자연스럽게 가족이 간병 과정까지 도맡아 하게 된다. 간병인을 고용하면 가족의 간병 부담이 대폭 줄어들 수 있다. 암이 아닌 이상 1인 가구에게 간병지원 국가 지원 프로그램으로는 어려운 듯했다. 집에서 회복하는 동안에도 결국 나는 나이 든 엄마의 신체적, 정신적 노동력을 빌려야만 했다. 머리로는 아닌 걸 아는 일들이 막상 닥치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돼 있었다. 나는 엄마에게도 부채감과 고마움을 한데 섞어 예민함으로 토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수술 이후 나는 완전히 지쳐버렸다. 도대체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오진은 왜 일어났고, 애초에 왜 복막염이 생겼으며, 배에는 또 왜 이렇게 징그러운 수술 자국을 남겼는지도. 나는 스스로 이에 대한 답을 찾아야만 했고, 상처가 새겨진 내 몸과 마주해야 했다. 나는 모든 것을 중단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고, 사람들과 연락을 끊었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방에 누워 넷플릭스를 봤다. 일상으로 돌아가 이 모든 것들을 덮어둔 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살 수는 없었다. 그 선택이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병간호를 너무 잘해서, 언니가 아파도 걱정이 없네. 아프면 안 되지만, 그래도 어디 내놔도 모자랄 것 없는 간병인이야."

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썰렁한 농담으로 오빠를 배웅했다. 오빠는 엄마와 바통 터치를 하고 집으로 갔다.

"아프면 전화해라! 엄마도!"

며칠을 같이 있었는데도 오빠의 철든 모습은  적응이 안된단 말이야!

이전 10화 엄마 아들이 인생에 도움이 됐다.
brunch book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굿바이 포궁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
브런치 시작하기

카카오계정으로 간편하게 가입하고
좋은 글과 작가를 만나보세요

카카오계정으로 시작하기
페이스북·트위터로 가입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