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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원동 바히네 May 13. 2021

2021년 3월. 지네 그림자.


 샤워를 하러 화장실로 들어간다. 창이 없는 화장실이라 불을 켜지 않으면 깜깜하지만, 샤워기와 샴푸 위치는 보이지 않아도 잘 찾는다. 샤워를 마치고 제일 큰 타월을 꺼내 재빠르게 온 몸을 휙 하고 감싼다. 화장실 문을 살짝 열고 그제야 불을 켠다. 새삼스럽게 밝은 화장실 조명이 내 머리와 얼굴과 감싼 내 몸을 비춘다. 꼼꼼하게 얼굴에 화장품을 펴 바른다. 좋아하는 향의 '바이레도' 바디로션은 선반 저 안에 두고 꺼내지 않는다. 세 달째 바디로션은 저 안에 그대로 있다. 


 옷을 갈아입을 때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몸이 슬쩍 보인다. 작정하고 몸을 비춰보지도 않았는데, 오늘도 나는 봐버렸다. 배꼽 아래로, 또 배꼽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도 지네가 기어간다. 다리가 많이 다린 지네는 대학교 때 동아리방에서 보고 못 봤는데, 그 모양이 내 배에 세겨졌다. 구불구불한 몸체에 다리가 여러 개다. '나는 항상 타투가 해보고 싶었는데, 잘 됐지 뭐야...' 애를 써 본다. 내일 샤워할 때도 불을 끄고 할 걸 알지만, 언제나 쿨한 사람이고 싶은 병은 수술을 해도 낫지를 않는다. 


 잠을 자려 누웠다. 눈을 감고 잠이 들기 전, 무의식적으로 배를 만져본다. 배꼽 아래로, 그리고 또 그 오른쪽으로.. 보이지 않아도 지네는 느껴진다. 엠보싱 효과가 있는 타투인가... 올록볼록 지네가 내 배 위를 지나간다. 한참 지네를 쓰다듬다 배꼽 아래를 꾸욱 눌러본다. 단단한 공 같은 것이 있었던 자리, 엎드리지도 못하게 나를 누르는 큰 공이 있던 그 자리가 쑤욱하고 들어간다. 나를 오랫동안 못살게 굴던 그 못된 괴물 같은 놈이 이제는 없다. 한참을 그 자리를 쓰다듬는다. 


 "폐경이 일찍 올까요?" 나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불안했고, 내가 계속 여자로서 매력 있길 간절히 원했다. 여성호르몬이 부족해 나타나는 폐경기 여성질환을 지금 이 나이에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여자를 여자답게 하는 건 자궁이 아니에요." 좁은 진료실에 앉아 겁에 질린 나에게 여의사는 단호했다. 의사로서 여성호르몬을 만들어 내는 기관은 자궁이 아닌 난소라는 말을 하는 거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단호한 말로 내게 남은 조금의 의심을 지웠다. 내 몸에서 자궁을 없애더라도 내가 계속 건강하고, 무엇보다도 여성으로서 매력적일 수 있을 거라고 믿기로 했다. 나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7년을 넘게 미뤄오던 거사를 조금 더 미루지 않고 마침내 치르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그날, 아무렇지도 않게 섰다. 


 "내가 너 애는 꼭 낳게 해 줄게. 걱정마라." 7년 전, 백발의 할아버지 의사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우선 애를 낳게 해주겠다고 했다. 애를 낳아야 하니, 우선 수술을 하지 말고 버텨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유명하고 권위 있는 의사의 말이었다. 이십 대 중반의 나는 의심 없이 그 말을 믿는 것 밖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나는 늘 수혈을 받아야 할 정도의 빈혈에 시달렸다. 나는 내가 살이 찌고 게을러 늘 의욕이 없고 운동을 하기 싫어한다고 생각했다. 허리가 아파 필라테스를 시작하고도, 유산소 운동은 숨이 차서 할 수가 없었다. 엎드려하는 자세도 복부 통증이 심해 할 수 없었다. 


 한 달에 이틀은 휴가를 내고 온전히 피를 쏟으며 통증과 함께 보내야 헸다. 한 달에 적어도 네 번은 빈혈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다녀야 했다. 새벽까지 야근하는 날들도 많았지만, 그 와중에 빈혈과의 동행은 계속됐다. 애를 낳을 수도 있으니, 우선은 이렇게 해야 한다고 믿었다. 많이 괴롭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한 달에 한 번, 삼일에서 일주일 정도 피를 쏟아내며 고통스러워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여성으로 태어난 숙명이라 생각했고, 유난을 떨면 안 된다고 나를 검열했다. 나는 그 고통에 점점 익숙해져 갔고, 악성 빈혈에도 내성이 생겼다. 


 "아가씨! 아가씨! 아이고.. 아가씨! 엉덩이에..!!! 하혈했어?" 택시에 내려 집으로 올라가는 그 짧은 찰나에 내 뒤통수에 동네 할머니의 걱정이 쏟아진다. '알아요, 할머니. 나도 알아요. 그냥 모르는 척 좀 해주세요.' 수 없이 많은 옷을 피로 물들여 버릴 수밖에 없었고, 나는 어딜 가나 전전긍긍 내 뒤태를 살펴야 했다. 속옷과 이불빨래를 하느라 나는 지쳐갔다. 아랫배가 갈기갈기 찢기고 누가 그 조각들을 쥐어뜯어가는 고통보다 속옷과 이불을 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 네 시간에 두 알씩 애드빌을 삼켰다. 감기, 몸살엔 좀처럼 약을 안 먹는 내가 유일하게 쌓아두고 먹는 약이다. 


 예고 없이 찾아와서 내 삶을 잠식해버린 시뻘건 괴물. 나는 그 괴물과의 동행이 당연한 숙명이라 생각했다. 이런 게 가임여성의 삶이라도 나는 이걸 지키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한 번도 불임 여성으로 사는 삶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내 몸은 나보다 태어나지도 않은, 태어날지 안 태어날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존재해야 했다. 싱그러운 젊은 날들은 점점 핏빛으로만 물들어갔다. 


 아이를 낳을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었는가? 이십 대 중반의 나는 그냥 언젠가 아이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가능성 말고 다른 생각은 해볼 생각도 못했다. 아이를 낳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지만, 불임여성으로 살아야겠다는 확신도 없었다. 수술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정도의 상태였지만, 나는 사실을 왜곡해 진실인 양 믿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외면하고, 숙고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보지 않고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까. 


  "좋다는 건 다 해 먹였는데, 바깥 음식 안 먹이고 내손으로 다 해 먹였는데, 뭘 잘못해서 생긴 병이라니." 엄마는 자꾸 알 수 없는 이 병의 원인을 캐내려 애쓴다. "러시안룰렛이야. 현대 사회를 사는 대가로 그냥 생기는 병이라고." 나는 자꾸 짜증이 난다. 나도 모르는, 의사도 모르는 이 병의 원인을 어디서 찾아오라는 건가.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가. 운동을 안 해서 그런가." "나보다 말술을 더 먹는 애들도 멀쩡해. 와인 한, 두 잔 먹는다고 이럴 일이었으면 지구 상에 살아있는 사람 하나 없게? 그냥 자궁이 약하게 태어난 거지 뭐!" 결국 나는 또 엄마를 깊숙이 찌르고야 만다. 내 속상한 마음과 불안과 통증이 한데 섞여 엄마를 후벼 판다."그래, 다 내가 잘못했다 그래... 내가 너를 건강하지 못하게 낳았나 보다..." 얽히고설켜서 꼬일 대로 꼬여버린 모녀는 오늘 한 매듭이 더 꼬여버렸다. 


  다시 배를 더듬는다. 암막커튼이 꼼꼼하게 쳐진 깜깜한 내 방에 지네가 기어간다. 내 배꼽 아래에, 배꼽 옆에 있던 지네가 내 배를 빠져나와 여기저기 기어 다닌다. 방 구경이 끝났다면, 이제 저 창밖으로 사라져 버렸으면. 가엾은 젊은 날의 나와, 괴물 덩어리가 들어앉아 있던 자궁과, 엄마를 후벼 파던 못된 마음을 데리고 저 창밖으로 사라졌으면. 지네가 사라지고 남은 자리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내일의 내가 밝은 화장실 조명 아래에서 쓰다듬어 줄 수 있기를. 이런 그림자가 드리워지게 된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 또한 내 인생의 역사라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말할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사람도 지네의 그림자를 같이 따뜻하게 쓰다듬어 줄 수 있기를. 꼬리를 무는 내 바람의 끝을 잡고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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