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원동 바히네 May 13. 2021

2021년 4월, 요즘

어렴풋이 외로움을 알게 된 걸까

 아직 어두운 새벽 4시 45분, 알람 소리 없이 눈을 뜬다. 밤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확인한다.  침대를 빠져나와 미지근한 물을 한 잔 마신다. 식기 건조대에 씻어둔 그릇들과 커틀러리들을 마른행주로 닦아 제 자리에 넣는다. 


  냉장고에서 쪄둔 비트, 당근, 브로콜리와 사과, 레몬을 꺼내와 함께 갈아 건강주스를 만든다. 주스라기보다 수프에 가까운 모양이지만, 천천히 두 잔을 마신다. 도자기 볼을 꺼내 그릭요거트를 크게 한 스푼 덜고, 어제 구워놓은 그래놀라를 얹고, 블루베리와 산딸기를 씻어 올린다. 무주에서 온 밤꿀을 조금 얹어 먹는다. 그리스에서 수입된 ‘Faye’라는 브랜드의 그릭요거트를 처음으로 사봤다. 요거트를 좀 먹는다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하다고 해서 주문해 봤는데, 늘 먹던 것보다 고소함이 덜 해 다음에는 그냥 먹던 것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한다. 내 두 손을 합친 크기만 한 애플망고를 하나 썰어 먹는다. 제주도의 애플망고보다 덜하지만, 그 보다 가격은 8배 정도 싼 페루산이다. 오래돼 쿰쿰한 맛없이 신선하고 달고 상큼하다. 


 핸드폰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하고 팟캐스트를 열어본다. 구독 중인 팟캐스트 중에 하나를 골라 들어야지 싶었는데, 끌리는 게 없다. 이것저것 고민하다 '비긴어게인'에서 수현이 부른 노래들만 모아놓은 유튜브 영상을 골라 튼다. 영상 제목은 <심신 안정 보이스 이수현 노래 모음>이다. 비가 그치고 화창한 날에 더할 나위 없는 목소리다 싶다. 


 음악을 들으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데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지혜, 잘 지내? 요즘 니 생각이 났어,”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대화했지?”

 “니가 해방촌 갔던 날.”

 “아, 그 날. 그 바에 갔던 날. 웃겼지 그날. 그 날 그 바에서 신나게 놀고 집에 와서 자는데 수술부위가 아파서 응급실에 갔어. 그날 밤에 바로 응급 수술을 또 했어. 다시 나는 회복 중이야.”

 “오 마이 갓. 너 되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네... 인생이 항상 우리한테 친절하기만 한건 아니더라.”

 “그러게,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있네. 아픈 건 정말 최악이야.”

 “아프면 외롭지.”


 내가 외롭나? 외로운 감정을 아직 잘 모른다고 생각했다. 늘 혼자 있는 게 더 편하고, 익숙했다. 


  “다른 의미는 없고, 나는 언제든 너랑 같이 있어줄 수 있어. 밤에도. 난 아플 때 혼자 있는 거 너무 싫더라고. 특히 밤에. 청소도 좀 해주고, 쓰레기도 갖다 버려주고.”


 눈물이 왈칵 났다. ‘친한’ 친구란 무엇인가 생각한다. 틴더로 만나 몇 번의 데이트를 했지만 친구로 남기로 했던 사람이다. 나는 그가 내 친한 친구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일 년에 세 번 정도 안부를 묻고, 서로 간단한 도움이 필요할 때 - 가령 그의 친구가 하는 식당에 예약이 어려울 때- 도움을 구하는 정도다. 그런 그가 쓰레기를 갖다 버려주겠다니... 마치 나를 관찰카메라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난주 까지만 해도 수술부위 통증이 조금 남아 있어서, 무거운 걸 들기 겁이 났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 자꾸 내가 뭘 잘못했길래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생각하게 돼. 식습관도 건강했고 운동을 안 한 것도 아니고, 술은 가끔 와인을 마셨지만 취한 적이 없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말이야. 내가 나한테 도대체 뭘 했길래...”


 스스로에게도 내뱉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던 말이 술술 나왔다. 누가 ‘요즘 어때?’라고 물으면 ‘거의 나았어. 이제 다 괜찮아. 몸은 훨씬 가볍고 좋다.’라고 즉답했었다. 


 “지혜, 너도 알잖아. 니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그런 생각은 진짜 제일 멍청한 생각이야. 이제 더 나아질 일만 남았잖아. 의사는 뭐래?”

 “이제 일상생활은 가능하데. 근육을 쓰는 운동이나 술, 섹스는 안되고. 근데 섹스랑 술이 없는데 그게 무슨 일상생활이야?”


 농담이 반쯤 섞인 진지한 얘기들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가까운 친구나 애인, 가족보다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낯선 행인에게 실제로 내 속마음을 더 잘 얘기할 수 있다고 한다. 심리학에서 이에 대한 이론이 있다고 어디선가 본 기억이 난다. 요즘의 내 삶엔 기차에서 처음 만난 사람만 가득하다. 


 간단히 설거지를 하고 환기를 시킨다. 에어컨 실외기를 놓을 작은 공간이지만, 데크를 설치해서 꽤나 귀엽고 유용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테라코타 화분에 대파와 파슬리, 딜, 타임을 심어두었다. 작년에 50일 넘게 연속으로 비가 오는 장마철 모두 죽어버린 허브들을 생각하며, 올해는 꼭 잘 지켜보겠다 다짐하며 심었다. 비가 온 어제는 집 안에 들여 선풍기 바람을 쐬어 주었다. 민들레 홀씨만큼 연약했던 딜이 위를 향해 몸을 세운 듯하다. 키도 좀 자랐다. 나머지 하나의 화분에 오늘 나머지 허브들을 심겠다고 다짐한다. 먹겠다고 심어둔 대파는 자라는 걸 지켜보니 기특해서 자르지 못하고 관상용으로 둔다. 스투키와 닮아 ‘파투키’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이렇게 청량한 공기라니! 한강공원에서 홍제천을 따라 산책을 한다. 하루 만보를 걷겠다는 목표를 지키고자 억지로 나왔는데, 날씨가 좋아 내심 기분이 좋다. 뛰거나 달리지 않고 조용히 걷는다. 집에서 오분 거리에 한강 공원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다. 서울에 한강이 없었으면 난 정말 진지하게 다른 도시에서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집에 돌아와 점심을 만든다. 무농약 유기농 아스파라거스와 완두콩을 살짝 데쳐 올리브오일과 말돈 소금을 뿌린다. 메밀국수를 삶아 간장과 들기름으로 무치고 김가루와 깨가루를 뿌린다. 식탁으로 가져가 테이블 매트 위에 그릇에 올려 천천히 먹는다. 후식으로 천혜향 하나를 먹는다. 가볍고 맛있고 만족스럽다. 


 그릇을 치우고 노트북을 켠다. 하루 한 가지 나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에 대한 답을 하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요즘의 내가 마음에 드는지,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다섯 가지는 무엇인지, 후회할지라도 시도해서 좋았던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같은 질문이 아침 8시에 보내져 오면, 나는 거기에 답한다. 인생에 가장 큰 시련을 이겨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나요? 오늘의 질문에 한참 커서만 깜빡인다. 인생이 어쩐지 너무 수월했었다는 생각을 한다. 큰 시련이나 좌절이 없었다. ‘그래서 그 죗값을 한 번에 받는 건가?’ 이내 이런 생각 이제 그만해야지 단념한다.


 생협에 가서 그릭요거트와 두릅을 사고, 꽃집에 가서 모종을 산다. 돌아오는 길에 새로 오픈한 와인숍에 들러 시칠리아 화이트 내추럴 와인을 한 병 샀다. 곧 마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시칠리아에 갔을 때 있었던 온갖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추억해본다. 집에 돌아와 마지막 화분에 바질과 로즈마리, 애플민트를 심었다. 루꼴라와 대저 짭잘이 토마토를 씻어 올리브유를 뿌리고 고구마를 구웠다. 오트밀크에 콩가루와 팥가루를 넣어 따뜻하게 데워 같이 먹었다. 


 잠시 집에 친구가 들렀다. 짧게 서로의 근황을 나눴다. 입원했을 때 맡겨둔 물건을 돌려줬다. 다음 주에 병원에서 결과가 잘 나와 술을 먹을 수 있게 되면 함께 와인을 마시기로 했다. 구워둔 애플 시나몬 케이크와 애플망고 하나를 싸서 선물했다. 친구는 가는 길에 쓰레기를 내다 버려주겠노라고 봉투를 들고 갔다.


 샤워를 하고 눕는다.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오가며 이것저것 보지만 딱히 재미가 없다. 티브이를 끄고 카톡을 한다. 

 “잠깐 ‘멈춤’ 버튼 누르고 어디로 여행 가고 싶다 지혜야. 본사에서 너무 쪼아서 미칠 것 같아.”

 “그러게, 나도 어디로 가고 싶다. 템플스테이라도 가볼까봐.”

 "넌 이미 그러고 있지 않니? 목탁 소리만 틀어놓으면 너 지금 템플스테이 하는 거 아니야?”

 별 의미 없는 말에도 기분이 상한다. 답장은 하지 않았다.


 누군가 내 옆에 같이 누워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남들이 말하는 외로움이라는 건가 싶다. 응급실에 간 날이 또 떠오른다. 그 날 내 옆엔 누군가가 있었다. 진통제를 먹고 거실에 엎드려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너 집에 가. 나 너무 아파.”

 “니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가. 어디가 아파? 수술받은 데가 아파? 병원에 가자.”

 “아니야. 혼자 편히 쉬고 싶어. 너 집에 가.”

 기어이 새벽 네시에 그를 집에 보내고 한참을 더 아파하다 날이 밝아 친구를 불러 응급실로 갔었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나는 평생 누군가와 사랑의 감정을 나누고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내가 아픈 모습을 다 보여주고 나를 병원에 데려다 달라고, 수술받을 때까지 내 옆에 있어달라고 할 수 있었을까? 


 아침에 주고받은 그 대화들을 다시 본다. 눈물이 다시 콧대를 타고 쪼르륵 흐른다. 다음 주에 저녁 먹으러 한번 오라고 메시지를 보내 놓고 잠에 든다. 




이전 01화 2021년 3월. 지네 그림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