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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랑 이모야 Aug 18. 2022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20년대 생 우리 할미

- 요즘에는 바지를 저래 다 헤질 때까지 입는가베?


우리 집에서 더위를 피하시던 아흔 넘은 동네 할머니가 물으셨다. TV에서 한 리포터가 찢어지고 올이 풀린 구제스타일 반바지를 입고 나왔는데 마침 나도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처음부터 그런 것을 샀다고 생각조차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도 열심히 입헤졌어도 아껴서 또 입는 아가씨로 보였으니 다행이다.


그 질문 한마디에 우리 외할머니가 생각이 났다. 지금 살아 계신다면 100세는 훌쩍 넘겼을 우리 외할머니. 엄마가 막둥이인 탓에 내 기억 속에는 처음부터 꼬부랑 할머니 었지만 참 신식이셨다.


어쭙잖게 멋을 부리던 20대 초, 어느 가을 내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고 나가니 '아이고~' 하셨다.(그 당시 손주의 찢어진 청바지를 밤새 꿰맸다는 할머니 이야기가 유머처럼 떠돌아다녔었다)


- 왜~? 원래 이런 건데? 할미도 나 몰래 꿰매 놓게?

- 아니, 요즘 애들 그렇게 입더만. 그게 이삔거라대.


징한 전라도 사투리를 쓰고 항상 먹을 것과 용돈을 챙겨 주시 던 할머니는 넉넉하지 않아도 챙기고 베푸는 것에 행복을 느끼시는 분이셨다. 방금 먹고 일어섰는데도 본인 비상 간식까지 내놓으며 먹어라 먹어라 공격을 하셨다(마치 내일모레 내다 팔 돼지를 살찌우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시골음식도 잘 먹는 입맛으로 컸지만 간혹 입에 안 맞는 음식이라고 하면 혼내거나 억지로 먹이는 대신 다른 것을 계속 내주셨다. 계속.


그리내가 집으로 돌아갈 적에는 꼬깃꼬깃 모아둔 지폐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셨다. 어릴 적에는 뭣도 모르고 받았지만 커서는 문이 닫히기 전에 다시 집안에 놓아두고 나왔다. 이것도 한두 번이었지 용돈이 되돌아온 것을 아신 뒤로는 서로 문지방을 사이에 두고 배드민턴 마냥 돈을 던져댔다. 스피드와 눈치가 생명인 할머니와 나만의 게임이었다.  


- 너무 적어서 안 받냐?

- 응. 이렇게 조금씩 주지 말고 줄 거면 모아서 한 번에 크게 줘. 시집갈 때 냉장고를 사 주든가.

- 그래. 그게 얼만데?

- 몰라. 엄청 비싸. 지금 주려던 거 100번 모았다 줘.


결국 할머니는 누적된 용돈을 못 주시고 먼저 가버렸다.

Photo by Sookyong Lee

비록 딸이라는 이유로 국민학교 교육도 못 받고 전화통화를 위한 자식들 이름과 숫자만 겨우 배우셨지만 삶의 지혜가 엄청난 분이셨다. 작은 화상 물집을 바로 없애는 방법같이 특별한 도구나 재료 없이 해결하는 소소한 생활 팁을 많이 배웠다. 100살이 되면 신과 동기동창 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식 성별에 대한 생각은 구식이셨다.


- 할미,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 아들이 좋지~

- 아들이 왜 좋은데?

- 든든해서 좋아.

- 딸은 매일 옆에서 맛있는 것 해주고 예쁜 옷도 사주잖아. 아들들은 어쩌다 한번 얼굴 삐죽 내밀고 가는 게 다 인데도?

-......

- 그럼 든든한 거 말고 다른 건? 아들이 왜 좋은데?

- 옆에 딱 있으면 든든해서 좋.


그놈의 아들 타령. 내가 종종 물어봤었지만 아흔이 넘어도 그 대답은 절대 변하지 않았다. 짜장, 짬뽕처럼 개인 선호도를 묻는 것인데 그리 설득력 있는 이유는 없었다.


할머니 세대에 손을 잇는 것이 얼마나 큰 임무였는지 알지만 같은 여자로서 속이 상하는 대목이다(성별결정에 대한 생물학적 원리를 알고 계셨더라면 다른 대답을 하셨을까). 남편을 일찍 잃으셨으니 아들에게 더욱 의지하며 살아오셨을 거다. 그래도 우리 언니가 딸을 낳았을 때 딸이라서 뭐라 하신 게 아니라 쌍둥이라서 고생하겠다고 걱정하셨다. 본인이 쌍둥이를 낳아서 대를 넘어 또 쌍둥이를 낳은 것 같다며 속상해하셨다.  


동네 할머니는 처음 뵐 때부터 우리 외할머니를 생각나게 하는 분이셨다. 그래서 약 10년의 세대차가 있지만 혹시나 해서 한번 여쭤보았다.


- 할머니 아들이 좋아요 딸이 좋아요?

- 당연히 아들이지. 딸은 뭐 쓸데없어~

- 할머니 계속 돌봐주는 사람은 딸들인데도?

- 옛날에 딸만 잔뜩 낳고 아들 못 낳는다고 시어머니한테 얼마나 혼이 났는데...


동네 할머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들이라는 훈장을 따낸 장한 며느리자 아내였기에 그나마 시집에서 덜 힘들게 지내셨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본인도 딸인데 옛 어른들이 세뇌시킨 관념이 아직도 남아있어 아들이 더 좋다 하셨다. 아들이라는 이유로 밑에 남동생들은 온갖 혜택을 다 받았는데도 할머니는 서운해하지 않으셨다.


그 시대에는 다른 딸들도 다 그랬으니까. 아들 못 낳는 며느리는 죄인이었으니까. 


시대가 그랬으니까.

 


얼마 전 외할머니 기일임을 알리는 알람이 썩 좋지 않은 그날의 기억을 소환했다.

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듣고 회사에 상조지원을 요청하니 외조부모지원대상이 아니라는 답을 받았었다. 21세기, 4차 산업을 얘기하는 이 시대에 정말 거지 같은 제도에 화가 났었다. 시대가 변했다면 사회가 변했다는 얘기일 텐데 그 안에서 제도를 만들고 운용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었나 보다. 설마 내 다음 세대에도 여전히 이런 일이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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