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 많고 도전정신이 남다른 덕에 이것저것 경험해본 것이 많은 이유도 있을 거다. 하지만 희한하리만큼 나에게 비밀 얘기나 속마음을 털어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나 후배는 물론 띠동갑이 훌쩍 넘는 어른도 여럿 있었다. 가끔은 처음 만나는 사람인데도 속 얘기를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몇 날 며칠을 이야기해도 끊이지 않을 정도로 이야기보따리가 많다.
그들은 가슴속에 담아놨던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내어 투두둑 뱉어내고 나서는 하나같이 '이이야기를 왜시작하게 되었는지모르겠다'라고 했다. 아마 이야기는 하고 싶은데 딱히 할 상대가 없고 내가 옆에 있으니 이야기가 저절로 나온 것 같다는 식의 자문자답이 대부분이었다.
그냥 들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단다.
그냥 이야기해도 될 것 같았단다.
나를 몇 년째 보는 사람들은 어디다 함부로 떠벌리고 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멈추지 않았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 말들은 나에 대한 깊은 신뢰인지라 감사했고,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힘이 느껴졌다.
Photo by Sookyong Lee
'갑자기?', '굳이 나한테?', '왜?'라는 생각과 함께 당혹스러운 적도 있었지만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니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다른 데 가서도 편히 이야기하는 걸 나한테만 한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서른을 넘기면서부터나에게 전달되던 이야기보따리가 확연히 줄었다. 정신없는 회사생활에 치여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여력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솔직히 내 일만으로도 복잡한데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니었다.내 큰 착각이었다.
선배, 관리자, 책임자 위치가 되자 점점 귀를 닫고 입을 더 열어 말을 보태는일이많아진 것이다.
나도 해봤다, 나도 네 맘 안다, 다 안다, 괜찮아질 거다, 해봤자 소용없다 등등 굳이 내가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그런 말 말이다.
제주 시골에서 반강제 고립생활을 하기 전까지는 몰랐다.어느 누가 틈만 나면 말하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속 얘기를 털어놓겠냔 말이다.
예전의 내가 큰 감정 기복 없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어줬기에 그들이 입을 열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감정보다 이성이 앞서는 사람이라 공감능력이 많이 부족하다. 그런데 감정에 쉽게 동요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강점이되기도 한다. 세상사 별별 이야기를 다 들어도 그리 힘겹지가 않다. 말하는 사람도 내 반응을 보면 엄청 힘겨운 일이었는데도 별거 아닌 일이었나 보다 하는 생각마저 든다고 했다. 사안에 따라 같이 울어주는 공감이 힘이 되기도 하고 다소 무덤덤한 반응이 몸을 추스를 환경을 만들어주기도 하나보다.
한때는 이것이 내 운명인가 싶어 상담사의 길을 걸어야 하나 고민을 한적도 있다. 그러나이내 편안하게 이야기할 친구로 남아있는 것이 서로에게 더 행복하겠다는 결론을 냈다.
커서 사람이 되겠다는 중학생 시절의 다짐이 다시 떠오른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어느 힘겨운 이야기를 해도 생각보다 별 것 아닌 것처럼 지날 수 있게 옆에서 가만히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착한 귀가 크고 못난 입이 작은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