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걷는 사람 하정우, 하정우

뛰는 사람 위에 걷는 사람 하정우

by 부지러너
800x0.jpg 지독히 많이 걷는 사람 하정우

뛰는 사람 위에 걷는 사람 하정우


걷는 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매일 걷지만 한 걸음마다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나에게는 더더욱 걷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뛰고 달리는 것에 비해 임팩트가 없고 이동간의 과정일 뿐 순간이동이라는 초능력이 생기면 사라질 시간들이었을 뿐이다.

2012년 추계 대학미식축구리그 결승전이 있었던 그 날은 운수 좋은 날이었다. 인턴에서 정직원 전환을 확정지어 놓은 상태에서 마지막 학기를 행복충만한 시간으로 가득채우고 있었던 졸업반이었고, 7년간의 미식축구 선수 생활의 꽃을 우승이라는 타이틀로 끝맺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팀의 리빌딩 과정에서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최고학번으로 새로운 전략과 전술에 녹아들어 그 경기에서 전반에만 터치다운을 3개 기록하며 비등한 경기양상을 주도했으나, 3쿼터 시작과 동시에 전방십자인대 완파라는 큰 부상을 당하며 미식축구계를 은퇴했다. 그 후로 수술을 거쳐 간신히 깁스와 목발을 놓아줄 때 쯤 회사 연수에 참여하게 되었다. 2달 간의 합숙기간 동안 수술한 무릎 주위의 조직을 연화하고 잃어버린 근육들을 보완해야하는 재활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되었고 그렇게 나는 1년 가까이 절름발이로 살게 되었다. 뒤늦게 2차 수술 및 3개월간의 재활기간을 거쳐 정상인의 범주에 복귀하기는 했지만, 나는 1년간 직립보행의 어려움과 타인의 불편한 시선을 감내해야 했다. 걷는 다는 건 생각보다 소중하다는 걸 당연히 주어졌던 무언가를 잃게 된 순간으로부터 깨닫게 되었다.


KakaoTalk_20191104_211312484.jpg 내 생애 마지막 미식축구 경기가 있던 운수 좋은 날


매일 만 오천보 이상 걷는 나는 출퇴근길과 트레드밀을 통해 걸음을 적립한다. 내 나름대로는 왕성한 활동량이라 자부하고 있던 생각이 책을 읽으며 쪼개졌다. 하루 3만보를 걷고도 모자라 하와이로 걸음휴가를 가서는 작정하고 하루에 10만보를 걷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설정한 기준이 얼마나 미진한 것이었는지, 상대적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사실 이 세상에는 평균값이나 중위값에 매몰되어 자신의 역량을 제한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이번 빙앤두잉 시즌에 시작한 미라클모닝 프로젝트 같은 경우도 매일 7시에 일어나는 나의 기상시간을 1시간 반 앞당겼으나, 5시반이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달콤한 꿈을 꾸는 깊은 잠의 한창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이미 일어나서 2시간의 작업을 끝낸 시간이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이 상위 몇 프로에 해당 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스스로가 닫은 유리병 뚜껑이 더 이상 뛸 수 없는 유리 천장이 되게 둘 필요도 없다. 가능성은 제한되는 순간 생명을 잃어버리고 말기에.

photo-1519734019-1cc9bdc4f806.jpg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하정우가 연출한 국토종단 프로젝트 영화 홍보영상을 본 적이 있다. 매년 대학생들을 모집해 국토를 종단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적도 있다. 발바닥 물집을 뜯어가며, 인내의 끝엔 성취감이라는 달콤한 열매가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매일 10시간 가까이 걷는 그들을 생각하며 나도 걷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스페인하숙이라는 예능을 보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을 볼 때도 역시 그랬다. 왜냐면 그 결과가 무의미해 보였고 한낱 추억에 불과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국토종단을 끝낸 해방감에 모두가 취한 날 하정우가 도망치는 기분이 어떤 감정이었을까 이해하고자 노력하다보니, 결국 치열한 노력 끝에 맛 본 성취감은 짧지만 그 과정에서의 땀냄새, 상처, 날카로워진 감정들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따뜻함과 끌어안고 잠들던 추운 밤들이 언젠가 맞닥뜨릴 다른 난관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추진력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실 해보고 나면 별거 없는 것들일지라도 해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뭐라고 하는 사람보다 시도하고 실패해본 사람이 언젠가 축적된 타이탄의 도구들로 포텐을 터뜨릴 가능성이 더 크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99F814415CBC05A014.jpg 타이탄의 도구들을 모으자



나는 사실 걷는것보다 뛰는 걸 더 좋아한다. 어렸을 때 부터 달리기가 빨랐던 난 주로 뛰는 행위를 통해 인생의 하이라이트들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뛴다는 건 걷는 것보다 빠르지만 지속하기 힘들다는 것이고 이런 나의 성향은 모든 일을 할 때 분명해졌다. 뭐든 새롭고 흥미진진한 일을 속도감 있게 해보다가 어느새 싫증이나 그만두곤 하는 성미가 발동하기 일쑤였다. 그 결과 아이디어만 많고 실행력은 떨어져서 보여지는 결과를 얻거나 한 싸이클을 돌려 보기 전에 포기하고 만 경우가 많았다. 그로 인해 완벽하게 끝낼 자신이 없으면 도전하는 게 더 망설여져 어느 새 타성에 젖고 평범한 삶을 살게 된지도 모른다. 걷는 다는 건 근성있고 끈기있고 지속가능하다는 것이고 의외로 많은 부분에서 강점을 나타내는 데 필수요소로 작용하곤 한다.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뛰는 사람 위에 오래 걷는 사람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늘 집에 가는 길에 3000보만큼 더 걸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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