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를 결심하고 제일 기대했던 것 중 하나가 퇴사 여행이었다. 한 달 넘는 시간 동안 생각도 정리하면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꿈꿨다. 하지만 일단 극'E' 성향인 나로서는 누군가 함께 갈 사람을 찾았다. 불행히도 연초에 2주간 나와 함께 퇴사여행을 떠나 줄 가족도 지인도 친구도 찾지 못해 결국 퇴사여행을 가지 말까도 생각하다가 '같이 가야 재미있는 건 맞지만, 아예 안 가는 것 보다얀 가는 게 훨씬 나은 거 아니에요??'라는 후배의 한 마디에 다시 용기를 내 퇴사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운이 좋게 고등학교 친구 중에 나랑 함께 퇴사 여행을 떠날 친구를 찾기도 했지만, 그가 원하는 행선지는 코카서스 3국으로 불리는 동유럽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이었고, 안 가본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있는 나는 비행기 티켓팅 직전까지 갔었다. 동유럽의 알프스이자, 와인의 태생국인 조지아를 비롯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누구나 쉽게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다녀온다면 특별한 경험을 줄 만했고, 볼거리 들도 많았다. 하지만 검색을 하면 할수록 2월 초에 다녀온 사진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고, 알고 보니 북한보다 살짝 높은 위치에 있는 그곳은 전쟁하고 있는 러시아, 여행 위험국인 시리아, 이라크와 접해있었고 게다가 겨울철에는 혹한뿐만 아니라 황량하기까지 했다. 안식 여행을 가려고 했다가 지쳐서 돌아올 게 눈앞에 선해져 친구에게는 도저히 못 가겠다, 포기 선언을 하고 나만의 여행지를 다시 찾기 시작했다.
결국 여행이라는 것도 목적과 콘셉트를 정해야 가능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생각을 추려 나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따뜻할 것, 두 번째 여유로울 것. 그렇게 한 겨울에 갈 수 있는 여행지를 고르다 보니 남반구 또는 동남아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동남아는 언제든 짧게라도 갈 수 있으니 2주간의 여행 동안 갈 수 있는 먼 나라를 고르게 되었다. (원래 한 달 계획했던 휴가는 떠날 회사에서 더 오래 있어 달라, 갈 회사에서 더 빨리 와달라는 요구에 2주로 줄어들었다;;) 남미는 가봤기에 호주나 뉴질랜드가 물망에 올랐는데 뉴질랜드는 항공권이 너무 비쌌고, 호주는 시드니/멜버른/울룰루를 다녀왔기에 갈 데가 없지 않을까 하다 발견한 것이 서호주 '퍼스'라는 도시였다. 광대한 자연 속에서 다양한 장관들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기에 바로 낙점되었다.
하지만 퍼스는 직항이 없는 도시였고 경유를 하더라도 비행기 값이 최소 180만 원이었다. 그러다 자세히 보니 퍼스를 가기 위한 경유지들이 싱가포르와 발리로 나오는 걸 발견했다. 이럴 바에 발리 왕복 항공권을 사고 발리에서 퍼스 가는 왕복(3시간 반) 항공권을 사는 게 어떨까 하고 봤더니,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물론 저가항공사였지만 발리까지 경유 2시간 정도 해서 가는 비행기가 40만 원대, 그리고 발리에서 퍼스 가는 비행기가 40만 원대로 나왔다. 이렇게 나의 퇴사 여행지가 얼떨결에 발리와 퍼스로 정해지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고민하게 된 것이 발리는 이미 한 번 가봤기에 꾸따나 우붓 등 유명한 곳 이외의 행선지를 정해야 됐고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곳이 다름 아닌 '윤식당' 촬영지 길리 섬이었다. 물론 발리에서 길리 섬까지는 또 차를 타고 2시간, 배를 타고 2시간이 걸렸지만 그 한적하고 여유로운 곳에서 선베드에 누워 맥주를 마시며 책 읽고 스노클링 하고 그러다 낮잠도 퍼질러 자고, 다시 일어나서 밥 먹고 수영하고. 바로 이게 내가 꿈꾸던 여행 아니던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렇게 나는 1박 2일에 걸쳐 인천-쿠알라룸푸르-발리-길리로 이어지는 이동경로를 통해 드디어 이곳 길리에 오게 되었다.
빈땅이면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웬걸, 우기의 절정인 2월의 발리는 우중충하고 암울한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일출과 일몰을 기대한 나에게 오로지 구름 장막과 스콜성 폭우만을 선사하였다. 혼자 온 여행이라 숙소도 대충 골랐던 게 문제였다. 샤워기는 개 오줌 싸는 마냥 찔찔 나오는 물줄기로 나를 당황시켰고, 방을 바꿔서 다행히 샤워기 문제를 해결하니 이번엔 냉장고가 없는 방이었다. 귀찮아서 찬 물은 포기하자 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숙소에 있는 타월이 모두 축축한 상태였고, 직원에게 따지니 영어가 짧은 현지 직원은 그저 비를 탓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씰룩 입꼬리를 올리고 말았다. 이 밖에도 방 키를 잠그려면 문고리를 있는 힘껏 들어 올리며 부정교합을 교합이 되게 맞추는 고난도 기작이 필요했고 오늘 아침에는 전기마저 나가서 에어컨이고 불까지 안 들어오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ㅋㅋㅋ 다 정리하고 나니 정말 암울하기 짝이 없다.
그래도 한 가지 희망이 있었다면, 거북이를 볼 수 있는 터틀비치 앞 숙소였기에 스노클링에 대한 기대가 잔뜩 있었고, 오늘은 스노클링 투어까지 예약해 놨었다. 하지만 그 마저도 간밤에 폭우와 바람이 몰아쳐 바다상태가 안 좋아져서 그만 취소되고 말았다. 호기로웠던 퇴사여행 계획은 이렇게 길리 섬 쪽방 난민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길리의 허상
그런데 웬걸 몇 장 찍었던 사진을 보고 한국에 있는 지인들은 월요병이 도져서인지 길리에 있는 나를 보며 한없이 부러워했고, 용기 있는 퇴사 결정에 이어 혼자서 발리에 간 나의 퇴사여행까지 박수를 보냈다. 차마 자세하게 이곳 상황을 전하진 못했지만 우기라 그렇게 좋지는 않다는 뉘앙스만 넌지시 비추었더니 돌아오는 반응은 '회사 책상에 앉아있는 본인보다 우울한 건 아니지 않냐'였다.
생각해 보니 나는 사실 모든 걸 알고 있었다. 인도네시아라는 곳은 낙후되어 있는 나라고 거기에 발리, 더해서 길리라는 섬에서 나는 무슨 서울 5성급 호텔에서 누리는 호캉스를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또 우기인 줄 알면서 그래도 해가 좀 나겠지 하는 헛된 희망을 품은 거 역시 나였다. 윤식당이 이미 폐허가 된 줄 알면서도 오늘 아침 그걸 두 눈으로 확인하며 허망함을 느낀 바보 같은 나였다. 사실 알면서도 모른 척했던 걸 마주해서 괜히 투덜대는 나 자신이 싫어졌다.
폐허가 된 윤식당
대기업을 박차고 스타트업으로 이직을 결정했을 때도 알았다. 내가 누리고 있던 많은 것들을 잃게 될 거라는 걸.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내가 한 선택이었고, 나는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더 큰 성장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인수인계 차 새로 갈 회사에 몇 번 방문했을 때 생각보다 답답한 사무실과 생각보다 할 일이 많았던 현재 상황, 그리고 생각보다 불안했던 재무상황 등 알고 있다 생각한 것들이 사실은 마음속으로는 밀어내고 마주하기 싫은 현실이었던 것을 깨달았다. 다만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 없이 활시위를 당겨 활을 발사하고 난 뒤라는 사실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쩜 이렇게 지금 여기 이곳에서 느끼는 감정과 이리도 같은지. 이런 점에서는 퇴사 여행지 선택이 탁월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래서 난 무작정 책과 무선키보드를 들고 해변가로 나왔다. 비 오는 바다는 거북이는커녕 사람 한 명 없지만. 우중충한 먹구름은 더 짙은 회색이 되었지만. 낭만적인 퇴사여행은 온 데 간데없지만. 내가 마주해야 할 현실 속에 내가 하는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지는 내가 정할 수 있는 것이기에, 나는 퇴사여행이든 스타트업으로의 도전이든 헤쳐나갈 생각이다. 주어진 상황, 내가 선택한 길이 진흙탕 뻘밭이라 하더라도 한 발 한 발 나아가다 보면 서서히 햇빛이 드리우길 바라며 언젠가 우기가 지나고 작열하는 태양에 살갗이 벗겨 없어질 그날을 꿈꾸며 나는 여기 길리에서 다시 시작해 보려고 한다. 나의 인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