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에서 우울했던 첫날, 퇴사여행과 스타트업으로의 도전이 막막하기만 해서 한참 글을 남기고 나니 거짓말처럼 구름사이로 해가 비췄다. 스노클링 장비를 빌려 거북이를 10마리쯤이나 보고 나니 십장생 근처에라도 간 마냥 기분이 좋아졌고, 그다음 날 스노클링 투어에서도 많은 물고기들과 함께 바닷속 탐험을 할 수 있었다. 지나친 우려는 다행히도 기우로 남고 금방 또 좋은 날이 오듯이 스노클링을 잘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다시 비가 쏟아지고 그날 밤엔 정전을 두세 차례 반복할 정도의 폭우와 벼락이 밤을 채웠다. 길리에서 나오는 길에도 비바람이 몰아쳤고 길리 숙소를 나온 지 7시간 만에 스미냑 숙소에 당도해서야 날이 좋아졌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는 누군가와 함께 떠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고, 그것이 좌절 됐을 땐 사실 여행 자체에 대해 다시 고민할 정도로 흔들렸다. 혼자라도 떠나자라고 마음먹고 나선 여행이었지만 막상 좋은 걸 먹고 좋은 걸 하더라도 함께하는 사람이 없을 땐 항상 아쉬웠다. 우연히 마주친 한국 여행객들을 만나 식사를 하거나 투어를 같이 하게 되었을 땐 또 잠시 기분이 나아지다가도 짧은 인연으로 만난 낯선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보이지 않는 경계심과 벽이 채울 수 없는 무언가를 남겼다.
그러고 보면 나는 절대적 'E' 성향으로 사람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는 사람이라는 게 새삼 다시 느껴진다. 일도 취미도 누군가와 함께할 때 더 큰 동력이 생기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고등학교 시절 수험생활을 힘들게 함께 했던 친구들, 대학교 때 매주 3번 이상 운동하며 매년 대회에 함께 출전한 운동부 선후배들, 10년간 함께한 회사 동료들, 그리고 언제나 나를 채워주고 보듬어주는 가족들까지. 나는 어딘가에 속해서 역할을 하고 그들로부터 받는 인정이 전부인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혼자서 여행을 떠나왔다는 게 매 순간 느껴져 여행을 즐기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혼자서 여행한 게 처음도 아닌데, 20대의 젊은 패기로 남미, 미국, 일본을 혼자 다녔을 때보다 훨씬 더 이런 감정이 진하게 느껴진다. 꼴에 나이 좀 먹었다고 늘어난 자존심과 몇 번 더 경험해 보고 늘어난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망설이게 하는지도 모른다.
혼자는 외로워 두려워
그래서 내가 10년이나 다닌 회사를 때려치울 때 주위에서 격려와 응원의 박수도 보내줬지만, 퇴사하기엔 약간 늦은 나이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잃을 게 많고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다시 도전한다는 게 쉽지 않은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우려에 또 한 번 덜컥 겁이 났던 게 사실이다. 어차피 일이야 가서 열심히 하면 되지만 사실 제일 겁이 났던 건 익숙한 관계들을 정리하고 새로 만날 많은 사람들과 다시 관계 맺는 일이었다. 내가 함께 했던 좋은 사람들 대신 어떤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게 벌거벗은 채로 노출될 상황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새로운 조직과 사회에서 내가 생각한 것들이 상식 밖의 것들로 치부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되었고, 내가 생각한 만큼이 누군가에게 큰 부담이 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모든 일은 사람이 하는 거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을 하는 데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기존 회사에서는 막내 뻘이었던 내가, 갑자기 20명 정도의 사람들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자가 되기에 리더십을 요구받는 상황이 되고 나니 더더욱 고민이 많아진다.
여행에서 만나는 낯선 동행에게는 여행지라는 특성상 그래도 나름 즐거운 마음으로 나를 드러낼 수 있다고 하지만, 함께 일할 새로운 동료들에겐 얼마나 나를 드러내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순간순간 느끼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떠오르는 생각대로 말하기보다 한 번 더 상대 입장을 고려해서 말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말처럼 쉽지 않을 거란 것도 너무 잘 안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내가 함께 하는 사람들을 잘 독려하고 하나로 만들어 원팀이 되게 할 자신이 있고 그 사람들과 함께 이룬 성장과 성과와 성공을 셰어 할 그날, 지금의 퇴사여행에서 든 여러 가지 생각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것이다. 새로운 도전에 앞서 이번 여행에서도 우연히 함께 할 많은 사람들과 그 순간순간 최선을 다 하고 모두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여행이 되는 것에 일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