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여행 part. 3

가지고 나면 사라지는

by 부지러너

여행을 떠나면서 가벼운 가방에 무겁게 담았던 유일한 것이 책이었다. 여행지에서 책을 읽겠다고 가져가서는 매번 한 두 장 뒤적이다 오는 나에게 와이프는 매번 웃으며 책 많이 읽으신다던 분 어디 가셨는지 모르겠다며 핀잔을 주곤 했다. 하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에서 가끔 우연히 마주쳐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내 여행 동무가 되어주는 것이 BGM과 책뿐이었다.


이민 온다면 난 무조건 여기, Perth


발리에서의 여행을 마친 나는 서호주에 있는 잘 알려지지 않은 퍼스라는 도시로 넘어왔다. 애초에 목적지였던 이곳은 막연히 호주에서 내가 안 가본 도시에 왔다고 하기에는 훨씬 더 많은 감흥을 안겨 주었다. 한가로운 시내와 여유로운 사람들, 풍요로운 자연환경에 더해 잘 갖춰진 인프라까지 뭐 하나 빠짐없이 완벽했다. (물론 호주 물가가 미쳤다곤 하지만 그에 맞는 근로소득을 보장하기에 예외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제 하루 종일 5만 5 천보 정도를 걸으며 퍼스 시티 안에 있는 모든 관광 스폿을 도장 깨기하고 나서 마지막 코스로 배를 타고 사우스퍼스로 넘어갔다. 퍼스시티의 야경을 스완강을 배경으로 볼 수 있는 곳이라 해서 갔는데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서울이나 홍콩의 야경만큼 멋졌고 서울이나 홍콩에 없는 평화로움까지도 이곳 퍼스 야경에서 느껴졌다. 사람들은 잔디밭에 앉아 가족들과 먹고 웃고 이야기 나누며 서서히 지는 노을을 즐기고 있었다. 모두에게 주어진 아름다운 시간 속에서 나는 또 홀로 고독함을 느꼈지만 언젠가 이곳 퍼스로 이민을 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외국에 많이 다녔어도 살고 싶다는 생각은 잘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뭔지 모를 평화로움이 계속 내 마음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사우스퍼스 야경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나는 아침 일찍 현지 교민들의 아침 달리기 모임에 나갔다. 현지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라 이곳에서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묻고 듣고 싶었다. 처음 보는 분들이었지만 함께 달리고 난 뒤라 그런지 내가 묻는 많은 것들에 친절하게 답해주셨다. 언제부터 이곳에 살게 됐는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퍼스에서 살 때 좋은 점은 무엇이고 단점은 무엇인지. 퍼스에서 느낀 좋은 바이브를 그분들도 느끼셨는지, 신나게 말씀해 주셨고 그러다 한 분이 오늘 목적지인 프리맨틀 (퍼스 서쪽 항구도시)까지 태워주셨다. 심지어 프리맨틀을 같이 둘러보고 점심도 사주셨다. 너무 감사해서 몇 번이고 인사를 드렸는데, 그 형님은 뭔가 한국에 사는 사람이 퍼스라는 도시로 여행을 온 걸 거의 처음 본다며, 다들 호주에 조금이라도 살 던 사람들 아니고서야 이곳을 잘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호주에서의 삶과 본인의 건강철학, 미래에 대한 고민을 들려주셔서 나도 내 상황과 미래에 대해 조곤조곤 말씀드렸다. 뜻하지 않은 인연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잠시 뜨거운 태양을 피해 낮잠을 자고 나서 일몰을 보러 코트슬로 비치로 향했다.


코트슬로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책을 읽다가 한 구절이 마음에 와닿았다. '어렸을 때 그렇게 먹고 싶었던 사탕은 어른이 되면 한 바구니도 살 수 있지만, 더 이상 사탕이 먹고 싶지 않아 지는 것, 그게 인생이다.'라는 내용이었는데, 참 와닿는 말이었다. 뭐든 그렇게 갖고 싶어 아등바등 대다가도 갖고 나면 더 이상 의미를 잃고 마는 것들. 다니던 회사에서 일 잘하던 인턴 친구에겐 취업의 문이 그랬지만 나에겐 이미 10년이나 다닌 직장은 답답한 울타리였고, 사회 초년의 나에겐 각종 산해진미를 매일 먹을 수 있는 감사한 회식이 1년 뒤의 나에겐 저녁이 없는 삶의 원흉이 되었고, 회사 후배들에겐 자가 주택을 산다는 게 큰 일이었지만 나에겐 보유세/ 양도세 걱정에 더 상급지의 집을 사고 싶은 욕망이 생길 뿐이었고, 지금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여기 호주에서 보는 석양이 그럴 것이지만 오는 길에 늘어진 수많은 전원주택에 사는 사람들에겐 일상인 것처럼 말이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해변가 놀이터의 한쪽에서 생떼를 부리는 아이에겐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보러 올 만큼 멋진 이 석양이 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태양의 에너지를 나에게 담아라


처음 취업준비 할 땐 인턴을 하고 정직원으로 전환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2개월을 열심히 보냈지만, 막상 엔지니어로 취업한 나는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걸 깨달았다. 그 이후로 여러 차례 부서이동을 거쳐 내가 하고 싶었던 교육부서에서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 누구보다 열심히 맡은 프로젝트를 해내기 위해 노력했다. 10년 만에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설렘도 치열하게 프로젝트를 끝나고 난 뒤에는 그동안 해왔던 다른 일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런지 사그라들고 말았다. 그렇게 난 더 많은 일과 더 많은 성과를 만들고 이를 통해 더 큰 성장을 하기 위해 새로운 도전을 다시 시작했다.


언젠가 지금의 간절한 마음의 도전이 모두 이뤄버린 당연한 것이 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참 좋겠다.) 그땐 난 또 내가 가지지 못한 무언가를 위해 새로운 도전을 하겠지. 인생의 거대한 파도를 의지가 담긴 서핑보드 하나로 마주하는 담대한 도전자로서의 순간인 지금일지라도, 내가 넘을 큰 파도를 보기 전에 지금 내가 가진 당연한 것들이 과거의 나, 또는 많은 사람들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항상 감사하며 겸손하게 고개를 돌려 더 큰 도전을 마주하기로 다짐해 본다.


갖고 있다고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니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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