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회사생활을 한 직장인으로서 나름 사회에서 떼가 묻었다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온실 속의 화초로 10년간 매우 따사로운 햇빛과 때가 되면 뿌려지는 스프링클러의 안락함에 취해 있었기에 실제로 하우스 바깥으로 나왔을 때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어떻게 이직을 할 수 있는지, 어느 회사가 좋은 회사인지 당연히 알리가 없었고 주위에 대부분의 지인들도 나와 같이 한 길만 묵묵히 파는 사람들이었어서 큰 도움을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막상 이직을 하려고 생각하니 지금 다니는 회사가 그 무엇도 부족할 것 없을뿐더러 차고 넘치는 회사였기에 과연 내가 어떤 기준으로 이직을 준비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막연하게나마 다른 사람 (헤드헌터)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나 스스로 이직의 과정을 주도적으로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만 가지고 있었다. 다만, 과연 혼자 이 과정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서고 불안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직의 과정을 함께 준비할 모임을 만들었다. 사실 이직 희망자들을 모은 건 아니었고, 각자의 프로젝트를 가지고 주기적으로 만나 서로의 Progress를 공유하고 Feedback 해주는 모임을 만들었다. 회사 선배 1명, 회사 후배 2명, 고등학교 친구 1명까지 해서 총 5명으로 구성된 모임은 각자가 이루고 싶은 목표들을 가지고 약 5개월간의 기간 동안 서로의 목표 달성을 응원하고 조언을 해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에 만나 서로의 진행 상황을 공유해야 하다 보니 나는 강제적으로라도 이직 과정에서 무엇인가를 해야만 했다. 그래서 첫 주에는 이력서를 업데이트했고, 둘째 주에는 회사를 하나 골라 지원을 하게 됐다. 그런데 세상이 참 좋아져서 인지 내가 지원한 회사와 비슷한 포지션을 채용하고 있는 다른 회사들이 무더기로 추천 목록에 떴고 클릭 몇 번이면 그 목록에 있는 수십 개의 회사에 지원을 할 수 있었다. 별생각 없이 회사에 지원하다 보니 어느새 60여 개의 회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솔직히 10년 만에 하는 입사지원이다 보니 떨리기도 하고 결과가 궁금하기도 했다. 채용 플랫폼들의 발달로 인해 지원한 지 몇 시간 내에도 여러 개의 회사에서 지원결과를 알려왔고 그렇게 만 하루가 되어서 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게 되었다. 60여 개 회사 중 결과가 나온 30여 개 회사에서 고작 두 곳을 제외하곤 모두 광탈이었다. 예상치 못한 참패에 좌절해 있다가 불현듯 오기가 생겨 오히려 더 폭풍지원을 하게 되었다. 나를 알아봐 주는 회사를 찾기 위해 추가 지원을 하다 보니 어느새 100개가 넘는 회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사실 회사를 고른다는 느낌보다는 딱 1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어떤 회사든 지원했던 것 같다. 그 기준은 바로 '100명 이하 규모'의 회사였다. 작은 회사에서 단 기간에 많은 것들을 경험하며 회사와 나의 성장을 Align 하는 것이 이직의 목적이었다 보니 소위 잘 나가는 스타트업들 (네카라쿠배당토)은 내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지원해도 합격하지 못했을 것 같지만, 붙더라도 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또 다른 대기업'에 가는 것엔 관심이 없어서였다. 다시 어떤 조직의 파편이 되어 떨어지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작은 기업이라도 주도적으로 무슨 일이든 하고 싶었기에 정말로 회사 규모 하나만 보고 지원을 했고 결국 거의 130개 정도의 회사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
역시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했던가? 서서히 서류 통과되는 회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10년 만에 다시 취준생의 느낌으로 나를 소개하고 내가 가진 역량을 잘 어필할 수 있는 다양한 스토리텔링을 준비했다. 처음 한 두 번 면접을 보러 갈 때는 정말 심장이 터질 것만 같고 설레기도 했는데, 막상 면접을 여러 차례 보기 시작하다 보니 점점 공통질문들이 생기고 그것들에 대한 나의 답변도 퇴고와 보완을 거쳐 유려하고 거침없는 힙합 노래의 가사가 되어 랩처럼 속사포로 흘러나왔다. 거진 20개의 회사의 면접을 보면서 나는 많은 산업과 비즈니스 모델을 영위하며 수익을 내고 있는 다양한 스타트업들을 경험할 수 있었다. 면접을 보기 전에 나름 회사에 대해 공부하고 갔지만, 재직 중이었고 수많은 회사에 지원하다 보니 결국 면접 보러 이동하는 중간에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고 마치 소개팅에 나가는 데 카톡 프사 실루엣 사진 하나만 보고 일단 나가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많은 회사의 면접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갔는데, 나에게는 그 많은 회사의 실무, 임원, 대표 등을 만나는 것이 크나 큰 경험이자 자산이 되고 결국엔 내가 좋은 회사를 고르는 눈을 길러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를 기다리는 운명의 실루엣
그렇게 어느 정도 회사를 보는 눈을 기르고 정말 좋은 회사들을 고르고 골라 합격 통보와 함께 처음으로 오퍼레터라는 것들을 받아보게 되었다. 대기업을 다니면서 그동안 몰랐는데 원래 받고 있던 연봉이 꽤나 많은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내가 작은 규모의 스타트업을 골라 지원했으면서 막상 오퍼레터를 받을 때가 되니 아쉬워하는 게 매우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최종 합격된 회사 중에는 지금 내가 받고 있던 처우보다도 훨씬 훌륭한 처우를 제안해 준 회사도 있었다. 근데 왠지 모르게 아쉬운 것들이 꼭 하나씩 있었다. 뭔가 하나가 걸리면 다른 좋은 것들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처럼 최종 결정을 앞두고 점점 그 하나가 더 크게 다가왔다. 그러던 와중에 면접을 보기로 한 거의 마지막 회사에서 나는 뜻밖의 일을 겪게 되었다.
면접을 보러 이동하는 중에 여러 자료와 기사를 찾아봤는데 회사의 사업과 대표의 포부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뭔가 운명처럼 끌리는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면접장에 들어갔는데, 1차 면접부터 대표 혼자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몇 가지 질문을 하더니 나에게 파격적인 포지션을 제안하였다. 나는 지금까지 팀장급 포지션에 지원해 왔었는데, 바로 C레벨 (임원/이사급) 포지션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러자 오히려 갑자기 경계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갑자기 저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라는 생각과 함께 오히려 내가 대표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왜 그러시냐고, 뭘 보고 그렇게 확신하시냐고. 그러자 대표는 본인과 비슷한 커리어를 밟아온 나에게 동질감을 많이 느꼈고 본인의 사람 보는 눈을 믿는 다면서 앞으로 무조건 같이 일하게 될 거라는 장담까지 하는 것이었다. 놀란 마음을 감추고 나는 일단 기쁜 마음으로 수긍하면서도 집에 가서 찬찬히 다시 검증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집에 돌아와 몇 번을 고민해 봤지만 '내가 찾던 운명의 회사가 바로 이 회사다'라는 생각만 점점 강해져 갔다. 그래서 이 회사를 선택할 마음을 먹고 다른 회사의 오퍼들을 거절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회사 대표로부터 당장은 함께 하기 힘들 것 같다는 답변을 받았다. 22년 하반기는 대외적으로 경제 상황이 너무 안 좋아지고 있었고, 이로 인해 기존에 잘 나가는 줄만 알았던 스타트업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보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C레벨을 채용하는 것에 많은 투자자들이 우려를 표시했고 결국 나에게는 가려고 했던 회사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 원래 다니던 회사를 열심히 다니는 선택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좌절하지는 않았다. 원래 다니던 회사에서도 만족하고 있었고, 이번 라운드를 통해 시장에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나에게 어떤 역량과 경험이 보완되면 좋을지 명확히 알게 되었기에 더욱 열심히 성장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또 좋은 기회가 생길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게 다시 회사생활에 적응하며 몇 개월을 보내던 중에 연말이 되어 캐럴이 흘러나오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핸드폰이 울렸다. 가고 싶었던 회사의 대표가 전화를 한 것이었고, 미뤄뒀던 오퍼레터와 함께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해주었다.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제안을 받자마자 나는 하루도 안되어서 가족들과 친한 지인들에게 약간의 확인을 받은 뒤에 바로 가겠다고 회신했다. 무슨 용기와 확신에서였는지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직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나는 10년 만에 작은 파문으로 시작한 이직의 마음을 소용돌이로 키워 결국엔 크나큰 쓰나미를 만들어 내 인생을 덮쳐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난 뒤, 나는 찰나의 생각을 모임으로 만들어 실행하고 그 과정에서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몰입하여 결국엔 어떤 결과를 만들어 냈음에 뿌듯했다. 사실 내가 한 선택이 극락행인지 나락행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하는 도전이 나중에는 할 수 없는 도전이기에 설령 실패의 결과로 이어질지언정 내가 잃을 것보다 얻을 것이 많다는 생각에 나는 걱정보다 아주 조금 더 설렜다. 그렇게 나는 드디어 태어나서 처음 이직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