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물

Progress

by 부지러너

회사 출근 첫날이었다.

부푼 꿈으로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이직할 결심을 하고

10년 다닌 회사를 떠나 2주간의 퇴사여행을 다녀왔고

일생일대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로 이직이란 중대한 결정을 실행하게 된 첫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다 해결해 버리겠다!!

나는 스타트업을 선택한 열정남이니까!!! 모드가 뿜뿜 했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이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해야 할까에 대한 고민도 한아름 품고 있었다.

퇴사 여행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긴 했지만 에너지는 풀충전 하고 돌아왔기에

이제 내가 맞닥뜨리는 모든 일을 해내겠다!라는 마음이 강했다.




부푼 기대와 달리 첫날부터 헤매기 시작했다.

온보딩 프로그램에 참여한 신규입사자로서의 마음보다는

온보딩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구성원의 리더로서 그 프로그램을 봐야 했고

온보딩 하기도 전에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기에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게 무슨 일을 해야 한다 이야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출근 첫날 대표님과의 짧은 미팅시간에 나의 열정을 선보이고 싶어 대표님께 제안했다.

"1주일에 한 번, 30분 이상 원온원을 하고 싶습니다.

(마크 저커버그와 셰릴 샌드버그가 14년 동안 했던 것처럼요!!!)"

그러자 대표님의 답변은... '워~~ 워~~ Calm Down'이었다.

"3개월 정도 실무도 직접 많이 해보면서 천천히 적응해 보세요~"라는 대답이었다.

나는 내가 너무 의욕적이었나 생각하며 일단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해보자 다짐했다.




사실 나는 지원한 자리로 뽑힌 사람이 아니라

없는 자리를 만들어 입사하게 된 케이스이기 때문에

내가 하는 만큼 내 일이 되는 구조였다.

그래서 매우 생경하지만 나 스스로 모든 일을 만들고 실행해야 했다.


물론 오퍼레이션 성의 일들도 많았다.

매일매일 떨어지는 새로운 업무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이직할 때 하고 싶었던 새로운 일의 타입이 아니라,

정말 누구라도 해야 하는 일, 오만가지의 일이었다.

C'O'O의 'O'가 Operation의 O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Omangaji (오만가지)의 O였을 줄이야.


하지만 실망한 건 아니었다.

대기업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있는 많은 일들을

내 의지를 가지고 해결하는 매력을 기대하고 온 것이기에

그런 부분에서는 많은 일들을 단기간에 경험할 수 있는 점이 더 좋았다.




새로 해보게 된 일 중 하나가 주주총회 였다.

주총을 준비하고 안내하고 진행하는 일 모두 내가 처음 해보는 일이었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기에 주주총회 관련된 A to Z를 공부하고

팀원들과 상의해서 차근차근 준비해 나갔다.

주총은 왜 하고 누구랑 하고 어떤 안건들을 상정해야 하며,

어떤 건 필수고 어떤 건 선택이고 또 어떤 건 보통결의사항 어떤 건 특수결의사항인지,

그리고 향후 등기가 필요한 안건은 무엇인지,

투자자들에게 주총소집안내를 보내고 참석의사를 취합하고 주주총회 당일 시나리오와 사회 준비도 했다.


주총 관련 준비과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었을 때 진행상황을 공유드리기 위해 대표님께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대표님은 "내가 의사결정 해야 하는 게 있나요?"라고 되물으셨다.

나는 생각지 못한 대답에 어떻게 준비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진행하겠다를 말씀드렸고

대표님은 알겠다고 하시면서,
다음부터는 본인이 직접 의사결정 해야 하는 사항 외에는 알아서 하면 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뭔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한 동안 생각이 멈췄다.

상사에게 진행상황을 공유하는 건 나한테는 의무이자 당연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불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가 'C'레벨 이기 때문에 가져야 하는 것이

그동안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과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업무를 하고 있었는데,

퇴근 무렵 대표님이 나를 다시 불렀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은,

"의사결정이 필요한 사항 혹은 진행현황은 최종적으로 한 번만 알려주시면 됩니다.

저는 이 회사를 세우고 5년 넘게 모든 일을 직접 다 해봤던 사람으로서

아무 탈 없이 회사가 잘 굴러가는 것만으로도 COO님이 얼마나 일을 잘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 혹시라도 본인이 하는 일에 대해 어필하고 싶은 의도에서 저한테 보고하시는 거라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더 열심히 해주세요"


나는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10년 간 베인 대기업 물을 한 순간에 뺄 수는 없었겠지만

나름 새롭고 신선한 마음으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보면 나는 진짜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누구를 위한 '일'을 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산적인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방식에 적응해 나가면서

나는 나 스스로도 진일보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내게 주어진 권한과 리소스를 활용해 진정으로 회사에 기여하는

진짜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조바심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한 것 같다.


이 또한 지나고 나면 웃게 될 에피소드지만, 대기업 물이 빠지기 전의 내 모습을 기억하려 기록해 본다.


#대기업 #스타트업 #일하는방식 #의사결정 #권한 #보고 #진행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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