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종종 '중간만 해라.'라는 말을 한다. 어느 집단에 가더라도 중도를 지키면 무난히 지낼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중간만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운데 어딘가에 축을 세우고 때에 따라 양쪽으로 저울질을 해가며 균형을 잡는 건 시행착오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5년 차의 직장인으로서 회사에서 중간으로 살아남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지 개인적으로 고찰해봤다.
모든 일에 나설 필요는 없다.
졸업 후 첫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수십 번의 낙방 끝에 얻어진 기회의 간절함은 입사 후 신입사원의 패기라는 열정으로 분출되었다. 이 한 몸 회사에 바치리라, 라는 각오로 첫 발을 내디뎠기에 적당히 하라는 조언이 안 들렸다. 천성이 게으르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다. 나의 일도 나의 일, 너의 일도 나의 일이었고 일 할 기회만 있으면 네, 해보겠습니다, 했다. 다들 그렇게 일하는 줄 알았다.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지 않는 사람들을 보고 일 못한다,라고 생각했다. 일 욕심에 따라온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에 한순간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덕분에 한가하게 주식차트를 보는 동료를 보곤 깨달았다. 아. 일 못하는 건 나는구나.
시간이 흘렀다. 일에 대한 열정이 수그러들고 업무는 익숙해졌다. 가져온 일들은 온전히 나의 업무가 되었다. 열심히 나댄 덕에 일 잘한다는 수식이 따라붙었지만 조금만 느긋해지면 "변했다." 소리를 들었다. 지금이야 그런 소리를 들으면 농담쯤으로 넘길 여유가 있지만 당시엔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스스로를 압박했다. 중요한 건 그런 이야기에 흔들려 꾸역꾸역 일을 끌어안았고 진정으로 관심 있던 업무와 역량을 키울 기회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중간만 해라, 는 모든 일에 나서다간 감당할 수 없도록 업무가 늘어날 것이니 다 보여주지 말아라, 라는 뜻이다. 동의하는 바이나 나의 식대로 해석하자면 적극적으로 일을 하되, 업무 경계를 확실히 구분 짓고 하고 싶은 일과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곳에 집중하자, 이다. 또한 할당된 업무가 아닐 경우,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한다는 걸 기억하자. '우리 회사는 나 없으면 안 돌아가.'는 업무 분담이 기본인 회사의 기본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업무를 거절하는 것이 역량이나 의지가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으니 절대 스스로 의심하지 말자. 더불어 건설적이지 않은 타인의 피드백은 고막에 해롭다는 걸 기억하자.
꼴찌가 되거든 이유 있는 꼴찌가 되자.
내가 근무하던 영업부는 매주, 매 월, 매 분기별로 실적 순위가 이메일로 공유됐다. 실적을 바탕으로 팀별 회의와 부장과의 면담이 진행되었고 인사고과에도 반영되었다. 물론 '꼴찌'라는 단어가 한국의 경쟁사회가 가져온 불합리적이고 개선되어야 하는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그럼에도 회사에서 좋지 않은 일에 꼴찌라는 타이틀을 달아 주목을 받는다는 건 꽤나 피곤한 일이다.
실적 하위권의 일명 '꼴찌 사원'이 있었다. 우리 회사는 지역별로 영업사원이 나뉘어 지역특성에 따라 물량이 적거나 문제건이 많기도 했기 때문에 영업사원의 역량이 곧 실적이라고 보긴 어려웠다. 실적을 바탕으로 매주 진행된 회의에서 그는 항상 자신이 하위권인 이유를 설명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지역이 별로여서, 단지 고객이 원하지 않아서, 아직 연락을 해보지 않아서와 같은 변명으로 들릴 수 있을만한 이야기를 이유로 거론하지 않았다. 대신 어떤 건에 문제가 있어서 해결 중에 있다거나 고객이 경쟁사를 선호해서 경쟁사를 파악 중에 있다, 라는 원인 분석과 본인이 하고 있는 노력을 덧붙여 설명했다. 게다가 계절 별 캠페인이나 프로모션에 적극적으로 참여 의사를 내비쳤다. 회사가 현재 무엇을 중점에 두고 있는지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부장이 분명히 실적으로 혼내려고 운을 떼었지만 결국엔 모두가 같이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연대의식의 화합으로 끝나기 일쑤였다. 그는 꾸준히 이유 있는 꼴찌의 모습을 보였고 4년 정도 흐른 지금, 부장들에게 예쁨 받는 차장이 되었다.
어쩌면 본성에 내재된 자신감 또는 당당함이 있었기에 가능했을지라도, 참 대단하다고 느꼈다. 천성이 다르다고 나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시도를 해보고 안 된다고 하는 것과, 시도를 안 해서 안 되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꼰대같이 들릴 수 있겠지만 이건 스스로에게 거는 주문과도 같다. 해야 하는 일에 하기 싫다는 감정이 들어가면 그때는 진심을 다해하기 싫어진다. 한 번의 실패 후 문제를 제대로 직면하지 않거나, 운 좋게 해결 과정을 피했다면 그와 비슷하지만 더 몸집이 큰 실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장담한다.) 그러니 문제의 시발점이 어딘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확인하는 과정을 게을리하지 말자. 최선의 방법은 처음부터 꼴찌를 하지 않는 것이지만, 꼴찌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이유 있는 꼴찌가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