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손에 닿는 대로 눌러 알람을 끄지만 정확히 8분 후 다시 울린다. 몇 번의 반복 끝에 실눈으로 시간을 확인하니 꾸물거릴 시간이 없다. 암막커튼 사이로 푸르스름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빙판같이 찬 바닥에 맨발이 닿자 소름이 돋는다. 지금부터는 시간싸움이다. 여름에는 아침에 머리를 감아도 큰 차이가 없지만 겨울에는 저녁에 감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양치를 하고 목폴라와 니트, 기모가 들어간 슬랙스와 두꺼운 양말을 빠르게 입는다. 수분크림과 선크림을 바르고 립밤을 두텁게 올린다. 항상 입는 검은 패딩을 걸치고 목도리를 칭칭 감은 후 집을 나선다.
겨울엔 유난히 출근길이 힘들다.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야 겨울 출근길 빌런에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 타러 가는 길의 내리막길이 첫 번째 빌런이다. 살 얼음 낀 보도블록을 아주 천천히 걸어내려 간다. 둔해진 몸으로 만원 버스에 오르니 사람들이 내뿜는 뜨거운 김이 버스 안을 메워 숨이 턱턱 막힌다. 뿌예진 창문을 조금 열어 뻐끔뻐끔 숨을 몰아 쉰다. 지하철에서는 옆사람의 패딩에 잠식되지 않도록 몸을 꿈틀거려 퍼즐 맞추기를 한다. 기싸움에 져버리면 어깨를 반으로 접거나 사선으로 몸을 기울인 불편한 자세로 한 시간의 출근길을 견뎌야 하니 앉자마자 몸을 부지런히 과시해야 한다.
8시 57분. 회사에 도착한다. 옷을 한 꺼풀 벗고 정전기가 일어난 머리를 정리한다. 출근이라는 미션을 완료하니 약간의 긴장이 풀리며 얼굴이 녹기 시작한다. 따뜻한 커피를 머그잔에 가득 붓고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켠다. 메일이 업데이트되는 동안 오늘의 일정과 마감인 업무들을 체크한다. 2개의 미팅과 1개의 리포트.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 침대 어딘가에 박혀있는 마지막 정신을 커피 한 모금과 맞바꿔 데려온다. 차근차근 메일을 읽으며 필요 없는 것들을 지운 메일함으로 보낸다. 그리고는 빠르게 처리할 수 있는 업무 메일부터 쳐내기 시작한다. 아침형 인간은 아니라고 단언하지만 오전 업무의 고요함은 집중하는데 확실히 도움된다.
11시 51분. 정신없이 업무를 정리하다 보니 점심시간이다. 오피스 빌딩 사이를 돌며 기세가 더해지는 칼바람은 '합정 시베리아'라는 사내 별칭이 있을 정도로 매섭지만 영광의 떡볶이를 향해 건물을 나서는 직장인의 결연함에는 무뎌진다. 각종 사리가 들어간 즉석 떡볶이 3인분에 특제 갈릭 소스가 듬뿍 올라간 설탕에 굴려진 감자튀김 2 접시, 날치 치즈 볶음밥까지 쉬지 않고 탄+탄+탄을 들이붓는다. 땀과 콧물이 범벅되면서도 뜨거운 떡을 호호 불어 삼킨다. 아저씨들이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 등받이에 기대 흡족한 표정으로 땀을 닦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당에 취해 낄낄대며 겨울 시즌 메뉴를 먹어야 한다는 동료를 따라 카페에 들어선다. 빨갛고 초록색으로 알록달록 꾸며진 신메뉴판을 보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다. 회사로 돌아가기 싫다는 말을 5번쯤 했을 때, 점심시간이 끝난다.
2시 37분. 1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던 미팅이 길어진다. 조미료 가득한 떡볶이를 먹은 탓인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셨음에도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온다. 중국음식, 떡볶이, 김치찌개를 먹는 날이면 어김없이 졸음과 사투를 벌이지만 조미료에 버무려진 탄수화물만큼이나 단시간에 큰 자극과 만족을 주는 대체재를 아직 찾지 못했다. 의무감에 들어간 미팅은 혼자 업무를 할 때 보다 더 많은 잡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참 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 '아까 다 얘기했는데, 안 듣고 똑같은걸 또 물어보네.', '변화라고 하지만, 우리를 위한 변화는 아니구나.'라는 말풍선을 달고 손으로 마우스 휠을 연신 굴린다.
5시 13분. 슬슬 마무리할 요량이었는데 상사에게 메일이 온다. 아침에 제출한 보고서를 수정해달란다. 그것도 예전 방식으로. 왜 일을 두 번 하게 만드는 것인지, 예전 방식이었다는 걸 모르는지에 대한 의문과 짜증도 한순간, 수정을 해야 마음 편히 퇴근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시키는 대로 템플릿을 바삐 수정한다. 오탈자가 없는지, 수정할 곳이 더 없는지 두세 번 확인을 한 뒤 '더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라는 마음과 반대되는 말을 적고 전송 버튼을 누른다.
6시 07분. 사부작대는 소리가 퇴근 시간을 알린다. 옷차림이 가벼우면 조용히 퇴근할 수 있지만 부피가 큰 옷들은 소리가 난다. 하늘은 출근할 때의 빛으로 돌아왔고 차들은 벌써 거리로 밀려 나왔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노트북을 황급히 끄고 겉옷을 든 채 계단으로 향한다. 나와 같은 표정을 한 다른 층 사람들 무리에 합류하여 1층을 향해 내려간다. 건물 정문에 나서는 순간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밤공기와 잘 어울리는 서정적인 노래를 재생한다. 지하철까지 걸어가는 5분 동안 왠지 모를 뿌듯함, 약간의 불안함을 노래에 이입시켜본다.
6시 42분. 출근길은 마음이 급하고 퇴근길은 몸이 급하다.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피곤에 절어있는 몸을 조금이나마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은 만석이다. 종착역이 목적지이기에 환승역에서 앉을 수 있는 기회가 몇 있지만 처음 보는 앞사람에 무한한 신뢰를 보낸 죄로 종착역 2개 전이 되어서야 앉는다. 5년 간의 대중교통 출퇴근에도 앞사람이 어디서 내릴지 예측하는 감은 늘지 않았다. 한 가지 배운 건 주변을 자주 두리번거리며 역을 확인하는 사람은 목적지가 한참 남은 희망 고문의 달인이니 그의 엉덩이가 들썩 거릴 때마다 반짝거리는 눈으로 비켜줄 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것.
9시 45분. 집에 도착하여 대충 저녁을 먹은 후 소파에 몸을 던진다. 어제 잠들기 전에 오늘 퇴근 후 일정을 생산적으로 계획해 놓은 것 같은데, 휴식도 생산적인 게 아니냐며 구석에서 소리치는 양심에 고개를 돌린다. 유튜브에서 부동산, 주식, 투자 이야기와 운동 영상을 스킵해가며 본다. 내일은 퇴근 후 운동도 하고 경제공부도 하는 생산적인 하루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든다. 자야 한다는 압박감과 놀고 싶다는 욕망이 뒤섞여 넷플릭스의 목록만 뒤적이다 자정이 되어서야 눈을 감는다. 오늘 제출한 보고서의 피드백이 와있을까 싶어 핸드폰으로 메일을 확인한다. 고요하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눈을 감는다. 알람을 맞췄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핸드폰을 든다. 내려놓는다. 머릿속으로 한참이나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이리저리 상상해보다 잠에 든다. 그렇게 다름없는 하루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