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정근 Oct 06. 2019

벌새

내가 벌새에 대해 말할 수 없는 이유

벌새는 내가 오래 기다려왔던 영화였다. 작년에 처음 이야기를 듣자마자 이 영화는 꼭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또래 여성 감독이 만든 자전적인 90년대 여자 중학생의 이야기라니.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었다는 각주도 매력적이었다. 그렇게 여름에 벌새가 개봉하자마자 영화관에 달려갔다.


영화는 너무 좋았다. 그런데 보고 나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먹먹하고 슬펐고 영화 참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걸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건져 올리고 남은 감정의 잔여물들을 안개 속의 손발처럼 언어화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노려봐도 번져나간 물감과도 같이 흐릿한게 도무지 윤곽이 드러나지 않았다. 궁금함에 감독과 배우들의 인터뷰 기사도 찾아보고, GV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읽어봤다. 김보라 감독이 나온 팟캐스트도 듣고 시나리오 책도 사서 읽었다. 그러면서 어지러운 마음속 먼지들이 가라앉기를 찬찬히 기다렸다.




94년의 사건들을 기억한다.

미국 월드컵에서 스페인과 맞붙던 날의 교실 풍경이 떠오른다. 수업을 중단하고 다 같이 서정원 선수의 동점골을 보았다. 김일성이 사망했다는 속보를 처음 티브이로 보았던 순간도 남아있다. 학교 끝나고 돌아온 텅 빈 집에서 무심코 켠 티브이에서 북한 주민들이 통곡하는 장면들이 나왔다. 성수대교가 붕괴했던 아침의 광경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그날은 비가 조금 내렸었고, 등굣길에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우리 가족이 자주 건너던 그 다리가 무너졌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다.

은희와 나는 같은 터널을 지나왔다. 시간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렇다.


그렇지만 은희는 나와 다른 세상을 살았다. 우리는 어떤 것들은 공유했지만 정말로 중요한 어떤 것들은 공유하지 않았다. 은희가 공부를 썩 잘하지 못하는 막내딸로서 겪었던 가족 내의 차별과 폭력, 이성친구를 만나고 담배를 피우고 노래방을 다닌다고 해서 날라리로 취급받으면서 학교에서 겪었던 험담들, 방앗간 집 딸로 의사를 부모로 둔 남자 친구를 만나면서 들었던 모욕들. 그 어떤 것도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것들이었다. 난 남자아이였고, 딴 짓은 쳐다보지도 않는 모범생이었고, 형제가 있는 집의 맏이였고, 아버지는 은행원에 어머니는 헌신적인 전업주부였다. 내 삶의 조건들은 그렇게 선택되었다.


애초에 달랐으니 시대 외에는 교집합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이제 와서 짐작하건대, 우리 집이 얼마나 끔찍하게 가부장적이었는지 생각하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우리 형제가 아주 어려서부터 남성 중심적인 이데올로기를 염료가 옷감에 스미듯 오랜 시간 동안 흡수해 왔는지 생각하면 당시의 어린 우리들에게도 측은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 어머니가 가족 내의 유일한 여성 구성원으로서 겪었을 고민과 소외,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남성 중심적 가치들을 내면화했을 과정은 막막하게 다가온다. 아버지 또한 가장으로서의 부담감을 짊어지며 가족들과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해서 괴로우셨을 것이다. 그리고 부끄럽게도 나는 집에서 익힌 그 가치관들을 밖에서도 충실히 실천하고 이행했다.

그리하여 집 밖에서 난 공부 잘하는 남학생이었다. 성적이 뛰어나서 학교 권력 구조의 최상층에 설 수 있었으며, 동시에 남학생으로의 특권도 그때는 몰랐지만 분명히 지니고 있었다. 당시 내 모습엔 어깨에 힘이 올라가고 권력을 살며시 움켜쥐는 모습들이 은연중에 묻어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선생님들이 날 띄워주는 행위는 모르는 새 은근히 다른 아이들을 얕잡아 보고 나의 노력과 재능을 과대평가하기 쉽게 만들었다. 여학생들을 괴롭히고 뒤에서 희롱하는 행위에도 동참했다. 여성혐오적인 생각과 행동이 대부분의 남학생들에게 녹아 있었고 그것들은 남자다움의 당연한 표현이 되었다. 사춘기를 통과하는 호르몬 넘치는 시기에 그런 차별과 배제에 아무런 부끄러움과 죄의식조차 느끼지 못했다. 공부 잘하는 우등생으로서의 자존심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생각과 결합되어 과도하게 부풀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쥐구멍을 찾고 싶지만, 나는 미래가 불안한 와중에도 내가 빛이 난다고, 적어도 빛이 날 거라고 확신했던 것 같다.


결국 우리는 같은 입구로 들어가서 서로 다른 길을 통해 각기 다른 출구로 나온 것이다. 내 주변에도 있었을 여러 은희들과 나는 같이 섞일 수 없는 부류였고,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상대였으며, 은희의 고민과 방황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내가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몰랐다. 나는 벌새의 오빠, 아빠 혹은 선생님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김보라 감독은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의 학창 시절이 역겨웠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길들여진 폭력에 젖어있는 비위 좋은 사람이었다. 무엇을 주어도 단박에 소화를 시킬 것처럼 받아들였다. 그리고 난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로 꽤 오래 살아왔다.

그렇기에 은희에게 박수를 보내며 응원하고 싶어도 어떠한 격려의 말도 입 밖으로 내기가 어려웠다. 영화적 장치가 이끌었던 은희에 대한 공감은 실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은희가 힘들어하던 따가운 세상에서 나도 공범으로 살아왔단 죄책감이 말문을 막았던 것이다.


때론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도 안되는 말들이 있다. 은희를 향한 사과의 말이 그렇다. 그렇다고 은희의 아빠와 오빠처럼 엉엉 우는 것으로 혼자 속죄하기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이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으로 갚아나가는 수밖에 없다. 또 그렇게 살아선 안된다고 외치고 이 세계의 은희들과 연대하는 수밖에. 벌새는 과거의 나에게 최소한의 염치를 환기시키고 부끄러움을 던져주었다. 현재의 나는 벌새에 정말 그 어떤 말도 얹을 수 없겠다. 은희가 빛이 나는 지금의 스스로를 발견하기를, 언젠가 영지 선생님과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또박또박 눌러써서 날아가지 않게 돌과 같은 심정으로 눌러놓고 돌아설 뿐이다.






작가의 이전글 쓸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