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에 대한 감정이입에 대하여
어제 조커를 봤는데, 이 영화가 그렇게 괜찮다는 평이 많다고? 영화적 완성도는 나쁘지 않지만, 와킨 피닉스야 원래 평소에 하던 연기를 했을 뿐이고.
조커에 감정 이입된다는 젊은 남성들이 그렇게 많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
왜 그들은 다른 약자를 향한 폭력에는 관대하면서 조커에는 열광할까.
조커를 통해서 스스로의 일부를 보았다고 하며 부자들과 공권력이 조커에게 저지르는 폭력은 부당하다고 여기면서, 현실에서는 자신보다 소외된 타자화된 약자들에 대해서 가감 없이 혐오를 표출한다.
조커가 만약 백인 남성, 빈민이 아니었다면?
완전히 똑같은 줄거리에 조커가 그들이 평소에 혐오해왔던 여성 혹은 난민, 아니면 성소수자, 그 밖의 약자들이었다면?
여성이었다면 어떤 비판이 나왔을지 너무 뻔하고(열등감과 피해의식을 운운하며 82년생 김지영 정도의 영화가 개봉 전부터 후두려 맞는 걸 보면),
아마 난민이나 성소수자였다면 굉장히 폭력적이고 불쾌한 영화 내지는 그저 그런 아트하우스 무비로 지나갔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내 마음속의 규범이 된 후지이 다케시의 글귀가 떠오른다.
"유가족들이 계속 싸울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피해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해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가해자로 만든 위치에서 벗어나기를 선택했기 때문이다."('명복을 빌지 마라', <무명의 말들>)
세월호 유가족인 유경근 님의 행보를 응원한다. 최근에 그는 '쓰레기와 동물과 시'라는 행사에 참여하여 환경 문제를 환기시키는 글쓰기를 했다. 그는 세월호 피해자 유가족이지만, 그 자신 스스로가 이 사회의 가해자임을 알린다. 그가 존경스러운 이유는 피해자의 위치에서 억울함과 분노를 분출하는 게 아니라, 세월호라는 끔찍한 비극에도 자신을 성찰하여 가해자의 위치에 스스로를 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부단히 자신이 가해자가 아닌지 반문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산다는 것은 누군가를 가해하지 않고 이뤄질 수 없는 역설이고, 내가 어떤 위치에서 누구에게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고담시는 우리의 도시가 된다. 나는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일 수 있지만, 무심코 지나치는 그 밖의 거의 모든 면에서는 가해자다. That's life와 같은 쿨 해 보이지만 속내는 역겨운 수사로 자기 연민을 두둔하지 말라. 자신을 소수자의 위치에 놓고 스스로 가해자였음을 작정하는 사람은 원래 그렇고 그런 삶이 아니라 분명히 더 나은 삶을 산다.
지금도 도로공사 톨게이트 조합원들은 햇살과 바람이 들지 않는 곳에서 점거 농성을 하고 있고, 광주에서는 퀴어축제를 반드시 취소시켜야 한다는 혐오의 목소리가 들리고,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단식투쟁은 건강이 악화된 사람이 실려나가면서도 이어지고 있다. 스크린 속 조커와 나를 비교해보는 와중에, 숨 쉬며 움직이며 살고 있는 진짜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에 빗대어 살고 있나?
'KNOCK, KNOCK.' 우리는 아서 플렉의 노크소리에 방문을 열어 환대한 적이 없다. 조커가 열리지 않는 문에 돌아서며 자조하듯 내뱉는 'That's life'라는 말에 도취되어 있을 뿐. 우리는 문을 잠그고 응답하지 않음으로 조커의 블랙코미디를 완성해왔다. 그러니 우리는 조커가 아니라, 빌 머레이고, 토마스 웨인이고, 직장동료 랜들이다. 그밖에 스크린 밖에서 조커를 무시하고 자리를 내주지 않았던 보이지 않는 가해자들 중 하나다. 도대체 왜 감정이 엉뚱한 곳으로 흐르는가? 자기 안의 조커에는 민감하면서, 주변의 수많은 아서 플렉들의 아우성에는 왜 그렇게 둔감한가?
제기랄. 조커를 보고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덧. 와킨 피닉스는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비건으로 공장식 축산에 반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해온 사람이다. 가해자로서의 본인을 자각하고 인생을 주체적으로 살아온 그의 실생활에서의 실천적 삶도 연기력 못지않게 알려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