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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근 Oct 01. 2019

아마존과 육식

채식을 선택하기까지

사진 출처는 FOX NEWS


어렸을 때 즐겨보던 과학책에 아마존의 열대우림이 급속도로 파괴되고 있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루에도 축구장 수백 개의 면적이 사라지고 있다고. 이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도대체 누가, 어떤 나쁜 어른들이 아마존을 망가뜨리고 있는 건지 궁금했다. 아마존의 밀림은 지구의 허파라는데, 세계 지도만 봐도 우리나라가 몇십 개는 들어갈 거 같은 저렇게 큰 숲을 없애버리면 지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허파가 망가지면 나중에 내가 숨은 쉬고 살 수 있을까. 왜 어른들은 저 나쁜 사람들을 막지 않는 걸까. 브라질은 너무 멀리 있어서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데. 그러다가 책장을 넘겼고, 금세 잊어버렸다.


아주 나중에야 알았다. 아마존의 밀림을 파괴하고 있던 건 바로 나라는 사실을.


아마존의 숲이 3주째 불타고 있다고 한다. 위성사진으로도 확인될 만큼 아주 큰 불이 아마존의 밀림을 집어삼키고 있다. 일부 환경단체들의 언론 폭로로 이슈화되었지만, 브라질 정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손을 놓고 있고, 대통령의 말을 들어보면 방관뿐만 아니라 오히려 조장까지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실제로 저절로 꺼지기를 기다리는 수 말고는 진화를 할 수 있는 별다른 방법도 없다고 한다. 이 끔찍한 화재의 원인은 자연 발화가 아니라 인공적인 방화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한다. 아마존에서 농사를 지으려는 농민들이 숲을 태우고 그 과정에서 걷잡을 수 없는 불이 퍼져나가고 있는 상태다.

모두가 걱정하는 파괴된 아마존에서 농민들이 하려는 경작의 종류는 무엇일까. 주로 두 가지다. 하나는 가축들을 키우기 위한 목축지, 또 하나는 콩과 옥수수를 키우기 위한 플랜테이션. 불을 질러서 휑해진 땅에 소를 풀어 키운다. 그리고 밭으로 개간하여 콩과 옥수수를 재배한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산업이 닿아있는 목적지는 바로 육식, 즉 공장식 축산이다. 콩과 옥수수는 사람이 먹기 위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축산업계에 사료로 쓰이기 위한 것이다. 이 두 작물은 소와 돼지를 인간이 먹기 맛있게 살 찌우기 위해 가장 편하고 저렴한 수단이 된다. 아마존 농민 입장에서는 돈이 되는 산업을 하기 위해 숲에 불을 지른다. 브라질 정부와 카르텔을 이룬 초국적 곡물기업들과 축산기업들은 이를 부추기고 돕는다. 실체를 파고들면 다름 아닌 육식에 대한 우리의 욕망이 아마존을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소리는 아마존의 산불이 내는 비명 소리와 다르지 않다.

역시나 한참 뒤에 알았지만, 사하라 사막의 사막화가 20세기 들어서 급격하게 진행된 것도, 더불어 아프리카의 푸른 초원이 사라지면서 수많은 야생동물이 멸종 위기에 처한 것도, 중동에서 물 부족 사태가 일어나고 내전이 빈발하는 것도,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동남아의 맹그로브 숲이 결딴나고 있는 것들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인간의 육식과 공장식 축산에 상당 부분 관련되어 있었다. 20세기 이후에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심각한 환경파괴의 대다수는 공장식 축산과 아주 밀접하다. 심지어 같은 인간들 사이의 계급 차이를 벌리고 빈부격차를 악화시키는데도, 갈등과 전쟁을 유발하는데도 공장식 축산은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아마존에 대한 의견은 내 개인적인 생각만이 아니다. 8월 23일에 올라온 CNN 뉴스를 참고.

CNN : The Amazon is burning because the world eats so much meat

https://edition.cnn.com/2019/08/23/americas/brazil-beef-amazon-rainforest-fire-intl/index.html)


작년 초부터 고기를 끊었다. 오래전부터 이것은 옳지 못하다고 생각해왔지만 막상 실천하지는 못했다. 아내와 나는 고심 끝에 마음속의 돌을 치우기로 했다. 그냥 깔끔하게 집에서는 고기를 먹지 않기로 했고, 그 뒤로 지금까지 집에서 고기를 먹은 적은 거의 없다. 마트에 가서 고기를 산 적도, 집 밖에 나와 고기를 먹는 식당에 간 적도 없다. 작년 여름에 하던 한의원을 그만두고 나서부터는 밖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고 모든 종류의 육류를 완벽하게 끊은 것은 아니다. 외식을 해야 될 때가 있으니 해산물은 섭취하고, 손윗어르신들과 함께 하는 식사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고기를 한두 점 먹을 때도 있고, 고기나 우유가 들어간 가공식품을 간혹 입에 댈 때도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정해놓는 단계로 말하자면 아마도 페스코 베지테리안이나 플렉시테리안쯤 되는 것 같다. 철저한 비건은 아니지만 그래도 육류 소비량은 정말 눈에 띄게 줄였고, 해산물을 먹는 경우를 제외하고 육류를 입에 대는 경우는 한 달에 한두 번도 안될 것 같다. 그것도 가능하면 최소한으로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고기가 생각나지 않냐고, 고기 없이 어떻게 사냐고 궁금해할 사람도 있다. 답하자면 생각보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담배 끊기보다 훨씬 더 쉽더라. 그리고 세상에는 고기 말고 맛난 것이 정말 많다. 진짜 맛있는 것들은 알고 보면 다 채식이다. 채식을 하면서 고기는 동물성 지방이 주는 고소함과 단백질의 식감만 제공할 뿐 음식의 진짜배기 깊은 맛은 식물이 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음식만 그런 게 아니고 담배도 그렇고 마약도 그렇고 인류의 오랜 오리지널 플레져들은 다 식물들이다. 이제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전혀 아쉽지 않을뿐더러, 한때 자취하면서 일주일에 5일은 돼지국밥과 순대국밥으로 연명하고, 감자탕이야말로 나의 소울푸드라고 떠들던 내가 고깃집 앞에서 풍기는 냄새를 맡기 힘들어 피해 다닌다. 그리운 게 아니라 요새는 정말 먹지를 못하게 되었다.


먹고 마신다는 것은 그 어떤 행위보다 삶과 죽음에 맞닿아 있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행위다. 먹지 않으면 죽는다. 내일을 살아 있으려면 오늘 먹어야 한다. 먹는다는 것은 동시에 생명이 있는 무언가를 죽인다는 것이다. 모든 동물들은 죽여야 산다는 무서운 아이러니 위에 있다. 무엇을 얼마나 죽일 것인가, 그러니 무엇을 먹는가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규정해주는 행위이자,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가장 핵심적인 요인이다. 사람은 철학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가 먹는 것으로 분해할 수 있다.

채식하기 전까지 나는 먹는다(=죽인다)는 것에 그다지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남들이 먹으니 먹고, 내가 욕망하니 먹었다. 당장의 숫자 하나에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머리를 굴리면서, 실은 그 숫자가 주는 혜택이라는 게 그저 또 다른 숫자일 뿐인 경우가 대부분인데도, 그러면서 이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지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진짜로 먹고사는 문제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숟가락에 올려져서 내 입에 들어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거의 몰랐다. 변명하자면 이는 구조적으로 자본주의가 육류를 철저히 상품화하여 제조 과정을 대중들에게서 차단해왔고, 동시에 미디어를 통해 식욕이라는 뿌리 깊은 욕망을 자극하여 육류 소비를 유도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가 고기를 먹는다는 것에 너무나 익숙해져서 이 욕구와 만족감을 포기하기 싫다는 사실에 진실을 회피해 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했고, 울리고 있는 종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무엇을 죽이고(=먹고) 있는지, 어떻게 죽이고(=먹고) 있는지, 죽이는(=먹는) 과정에서 어떤 끔찍한 부산물이 발생하는지를 눈을 뜨면 볼 수 있다고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눈을 감은채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로의 먹임과 나로부터의 죽임에 대하여 책임을 방기해왔다. 그럴듯한 수동태 뒤에 오래 숨어 있었다.


채식주의자임을 밝히는 것은 솔직히 약간 겁이 난다. 채식주의자, 비건을 대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편해하거나 비난을 한다. 동물 애호가라든지 현실을 무시하는 이상주의자라든지 하는 얘기들이 뒤따른다. 비건은 정신병이라는 댓글도 가끔 본다. 육식이 폭력이라고 말하는 당신이 나에게 하는 이 행동은 그럼 폭력이 아니냐고도 한다.

이건 어떤 대상을 사랑하고 좋아해서 느끼는 문제와는 완전히 다르다. 물론 지금 내가 개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는 것이 인간과는 다른 동물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우리 부부의 결심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고맙다. 그렇지만 개와 고양이가 없었어도 채식을 시작했을 것이다. 착취와 차별을 바라보는 시각은 애호의 여부와는 별개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종차별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현실 감각이 없다는 비난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건 현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외려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에 떠나기로 한 길이며,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공동체의 미래를 조금이라도 나 스스로 능동적으로 바꿔보고자 하는 일이다.

눈을 뜨고 진실을 마주하기로 결심한 뒤로,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공장식 축산은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접근해도 옳지 않았다. 동물 복지의 차원에서도, 결과적으로 돌아오는 것은 끔찍한 환경 재앙이라는 점에서도 지금의 육식 문화와 축산업은 너무나도 불균형했다. 시소의 한 끝에는 현재의 육식이 가져오는 수많은 끔찍한 부작용과 죄책감과 암울한 미래가 올려져 있고, 반대편 시소의 끝에는 고작 내 혀 끝의 만족감만 얹혀 있을 뿐이었다. 숫자 놀음은 그만 집어치우고, 좌변과 우변이 너무도 맞지 않는 육식의 대차대조표에 더이상 무감해져서는 안되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비관적인 사람이고, 인류의 미래도 그다지 밝게 보지는 않는다. 21세기 중후반까지 환경이 버텨주어서 내가 기대 수명만큼 살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최근 몇 년간 많은 환경론자들과 미래학자들이 예상보다 조기에 다가올 수 있는 인류의 우울하고 부정적인 결말에 대한 예측을 더 많이 하기 시작한 것 같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공장식 축산을 45억 년 지구 역사상 전대미문의 가장 끔찍한 범죄로 묘사했다. 같은 책에서 인류가 지금까지의 위기와는 스케일과 심각성에서 차원이 완전히 다른 엄청난 위기에 봉착해 있고, 아마도 쉽지 않아 보이지만 사피엔스는 또다시 이 큰 어려움도 극복해낼 거라고 썼다. 나는 그와 같이 희망적으로 보지는 않는다. 현실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냉혹하고 고치기엔 이미 많이 늦었다. 그래도 내가 할 건 해야겠다. 덜 죄스럽고 싶다. 함께 책임을 져야겠다. 운이 좀 따른다면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살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나만의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음에 올 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희미하지만 간절한 오늘의 낙관으로 아마존이 더이상 화마에 고통받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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