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래 속에서라도 그를 잊지 않으리.’
또다시 돈을 빌려달라는 형의 말에 서운함이 터져 나와 욕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달 전에도 형에게 욕을 하고 전화를 끊었던 적이 있었다. 형에게 욕을 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세 살 터울의 형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내가 형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삶은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듯한 형이 누구보다도 가장 미웠다.
지금이지 않을까? 형에 대해 글을 쓸 수 있는 시기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아 감정이 글을 앞서갈까 봐 쓰지 못했던 이야기를 어쩌면 이제는 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펜을 잡자 내가 사랑하던 형의 모습이 쏟아져나와 형을, 또 형을 그리고 있는 나를 자꾸만 멈춰 세웠다. 결국 몇 주 동안 글을 몇 번이고 썼다 지웠다. 이렇게 해서는 지금의 우리를 그릴 수 없었다.
이 글을 끝까지 쓸 수나 있을지,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형에게 어떤 말을 건네게 될지 알 수 없었다. 처음으로 글을 쓰고 있는 순간보다 글을 다 쓰고 난 이후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초등학교 6학년인 형이 울고 있다. 무슨 상황인지를 몰라 어리둥절해하는 어린 나를 붙들고 마찬가지로 어린 형이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혹시 우리가 따로 떨어져 살게 되더라도 절대 연락이 끊겨서는 안 된다고, 우리는 계속 만나야 한다고. 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형이 학교에서 수련회를 간다고 했을 때 따라가겠다고 우겨 끝내 같이 갔었고, 형이 친구들과 옷을 사러 시내에 나갈 때도 형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이렇게 형과 떨어져 본 적이 없는데 우리가 왜 헤어진다는 거지? 내가 형과 따로 산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부모님의 이혼 후 우리를 키우던 친어머니가 우리의 양육을 아빠에게 넘긴다는, 어쩌면 우리 중 한 명만 보내질 수도 있다는 어른들의 말을 형이 어디서 듣고 왔나 보다. 다행히 우리는 아빠에게 함께 보내진다. 웬만한 집 크기의 마당을 가지고 있던 단독주택에서 욕실은커녕 화장실 변기도 없던 다섯 평짜리 원룸으로. 하지만 형이 옆에 있으니 나에게 집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형과 단둘이 방에 있던 날, 형은 집에 자주 놀러 오시는 이모를 이제는 ‘엄마’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고 말한다.
“미리 연습해 보자.”
“엄마 오셨어요?”, “엄마 밥 먹을래요?”. 형은 ‘엄마’라는 단어는 그대로 둔 채 뒤의 문장만 바꿔 계속 말을 한다. 형의 말을 나는 따라 한다. 형이 하는 거라면 나도 꼭 하고 싶으니까. 나는 형과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까.
형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을 보니 형 가게의 영업시간 전이었다. 하루의 안부를 묻기에는 이른 시간, 아니나 다를까 형은 전화로 또 돈을 빌려달라 부탁했다. 언젠가부터 형이 안부를 물으며 말을 흐리면 그 뒤에는 돈을 부탁하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번이 몇 번째인지 아냐?”
이전에 빌린 돈들도 형은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겨우 갚았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돈은 있었다. 화가 나는 이유는 내 사정이 형에게 늘 뒷전이었기 때문이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이 때론 양보와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게 만든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가족이기에 서운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형, 나도 살아야지. 내 삶이 형을 위해 있는 건 아냐. 형한테 내 삶이 소중하기는 해?”
말이 없는 형 대신 내가 말을 쏟아냈다. 말이 말을 불러왔고 그럴수록 감정이 더 큰 감정을 몰고 왔다. 어느새 나는 형에게 염치를 들먹이고 욕을 하고 있었다. 가만히 말을 듣던 형은 미안하다며 운전 조심히 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끊긴 수화기 너머 형은 어디에 또 전화를 돌리고 있을지, 돈을 빌려달라고 말을 하는 형보다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있을 형이 더 싫었다.
며칠 후 우리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통화를 했고 돈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예전과 같은 평범한 대화였지만 둘 다 서로 말을 아끼고 있었다. 그날 형과의 통화에서 처음으로 어색함을 느꼈다.
새벽 네 시, 고등학생인 형이 자는 나를 깨운다. 형의 목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 계속 자는 시늉을 한다.
“인난 거 다 알아.”
형의 한마디에 뭉그적거리며 일어난다. 옷을 두껍게 입고 우리는 신문사로 자전거를 타고 간다. 두 단지 몫의 신문을 자전거에 나눠 싣고 빌라로 향한다. 신문을 구독하는 집들의 동과 호수가 적힌 쪽지를 보지 않아도 어느새 어느 집에 신문을 넣어야 하는지 다 외우고 있다. 언젠가부터 형은 자전거 대신 오토바이를 빌려온다. 이제는 더 빠르게 신문사까지 갈 수 있다. 하지만 빨라진 만큼 겨울 새벽의 바람은 더 차갑게 피부에 와닿는다. 오토바이가 신호에 걸려 잠깐 멈추면 바람도 함께 멈춰 우리를 감싸는 공기가 따뜻해졌다고 느낄 정도다. 그나마 나는 형을 뒤에서 꼭 껴안고 있었던 상황, 앞자리의 형은 더 추웠을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내게 새벽의 오토바이보다 더 무서운 건 컴컴한 새벽에 켜지지 않는 빌라의 센서등이다. 계단에서 허공으로 손을 휘저어보아도 위층의 센서등이 켜지지 않으면 올라가기가 무섭다. 불이 또 켜지지 않던 날, 중간에서 차마 올라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어디선가 ‘쿵’ 하는 소리가 난다. 너무 놀란 나머지 부리나케 1층까지 뛰어 내려가 보지만 형은 옆 동에 올라갔는지 오토바이만 덩그러니 있다. 놀란 가슴을 움켜쥐고 다시 올라간다. 어쨌든 신문을 다 돌려야 집에 갈 수 있으니까.
어떤 날은 계단에서 만 원을 주웠다며 형이 신나게 달려온다. 어떤 날은 너무 더워 우리는 남의 집 우유 바구니에서 몰래 우유를 훔쳐 먹는다. 비가 그친 어떤 날은 나를 나무 밑에 서 있어 보라 하더니 형은 나무를 발로 힘껏 차 나뭇잎에 있던 빗방울들을 떨어트려 나를 다 젖게 한다. 어떤 날은 삐쳐서 형에게 한마디도 안 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떤 날은 대변이 급한 형이 나에게 사람들이 오는지 망을 보라며 골목길로 들어간다. 정말로 사람들이 나타나자 어쩔 줄 몰라 형을 놔두고 도망을 가버린다. 어떤 날은, 또 어떤 날에는. 그렇게 새벽이면 형을 뒤에 끌어안고 벚꽃잎을 보다 매미 울음소리를 듣다 땅에 떨어진 은행나무 열매를 피하다 이 년이 지난다.
곧 두 아이의 아빠가 되는 형이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엄마도 주택에 살아보고 싶어 했기에 형은 욕심을 내 전주 외곽에 땅을 사고 2층짜리 주택을 지어 1층에는 형의 가족이, 2층에는 부모님이 살기로 했다. 형의 대출금에 부모님의 집을 판 돈을 합쳐 짓는 집이었지만 형의 족발집 가게도 장사가 잘되고 있어 무리는 없어 보였다. 형은 사장을, 나는 교사를, 그리고 우리 가족은 단독주택을. 우리 형제는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빚이 빚을 키웠다. 족발집을 차릴 때 이미 목돈을 대출받아 줬던 내게 형은 다시 돈을 부탁했고, 주택에 돈을 보태지 못해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던 나는 다시 한번 큰돈을 대출받아 빌려주었다. 부모님 역시 더 대출을 받아 형을 도와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형의 대출 상환이 늦어지기 시작했고, 때로는 소액의 돈을 또 부탁할 때도 있었다. 한집에 사는 형과 부모님의 사이도 조금씩 틀어지고 있었다.
그때쯤 형은 차를 한 대 더 사고 싶어 했다. 기존의 차로 배달도 하다 보니 연식에 비해 차가 빠르게 노후화돼 조카들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구매의 이유였다. 문제는 구매하려는 차가 또 수입차였다. 운전사였던 아빠의 영향으로 형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차를 좋아했고 형은 특히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수입차는 말이 되지 않았다. 말리는 내게 형은 이런저런 할인을 받으면 부담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고 실제로 매달 내는 금액을 들어보니 국산 차와 큰 차이가 없기는 했다. 형을 말리려다 오히려 형을 도와 부모님을 설득해 주었고 그렇게 형의 수입차는 두 대가 됐다. 하지만 알고 보니 형이 실제
로 내던 금액은 내게 말해준 금액의 두 배가 넘었다. 당시 형이 내 대출금을 상환하지 못하고 있어 내가 대신 이자를 일 년 정도 내주고 있었을 때였다. 형은 돈을 갚지도 못하면서 비싼 차를 타고 다니고 있었다. 처음으로 형에게 큰 실망을 했다.
“형, 차도 한 대 팔고, 집도 팔자. 이런 건 우리와 어울리지 않았어.”
집값이 몇 년 사이 조금 올랐다니 집을 팔아서라도 큰 빚을 막아보자고 제안했을 때 형은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고민 끝에 내놓은 집이 팔려 계약서를 작성한 날, 온 가족이 모여서 대화를 나눴다. 각자의 속상한 마음이 충돌해 상처가 되지 않도록 나는 가운데서 가족들을 중재했다. 물론 중재는 쉽지 않았고 나 역시 감정을 참지 못해 형이나 부모님께 말을 쏟아 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형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형은 모두가 잘 살기를 바랐을 뿐, 근 10년간 게으르지 않았고 자신만을 위해 일하지도 않았다. 그간의 아쉬움과 서운함을 말하던 형의 팔에는 한 달에 두 번도 못 쉰 채 요리하며 생긴 화상 자국과 부엌칼에 베인 상처가 여럿 있었다. 그 흉터는 아빠가 닭을 싣고 다니는 트럭을 운전하셨을 때 닭의 발톱에 긁혀 생긴 흉터와 닮아 있었다.
입대를 앞둔 형이 통장을 내민다. 군대 가 있는 동안 용돈을 주지 못하니 이 돈을 쓰라며 건넨 통장에는 삼십만 원 정도가 찍혀있다. 스물한 살, 더구나 입대를 앞두고 있었으니 자기 쓸 돈도 모자랐을 텐데 형은 끝내 돈을 남겨 나에게 주고 간다. 고등학교 2학년인 내게는 큰돈이다.
몇 년 후 형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그동안 벌어둔 돈과, 자신의 중고차까지 팔아 모은 돈으로 사촌 형이 있는 중국으로 긴 여행을 간다. 그러면서 출국 전 일부 금액을 남긴 통장을 내밀며 돈이 필요하면 여기 있는 돈을 찾아 쓰라 한다.
신문 배달을 시작한 이후로 아르바이트부터 소일거리까지, 형은 한 번도 일을 쉬지 않는다. 그러면서 대학생이 된 나에게, 군대에서 휴가를 나온 나에게, 교사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나에게 꾸준히 용돈을 준다.
“니는 할 줄 아는 거라곤 공부밖에 없으니까 공부나 제대로 해. 그래서 꼭 선생님 해야 혀.”
전문대를 졸업 후 형은 바로 취업의 길로 뛰어들었고 형의 오랜 친구와 작은 카페를 차리기도 한다. 형과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던 어느 날 형은 나에게 자기의 경험을 들려
준다.
“나는 지금까지 하고 싶은 건 다 하고 살았어. 독립도, 차를 사는 것도, 여행도. 크든 작든 그게 중요한 게 아녀. 이루는 게 중요한 거여. 비결이 뭔지 아냐? 해 보고 싶은 게 있으면 계속 말을 하면 돼. ‘뭐, 뭐를 하고 싶다!’ 이렇게. 그럼 주위에서 도와주기도 하고, 말을 해 논 게 있으니께 계속 방법을 찾게 돼.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정말 내가 그걸 하고 있더라고.”
나에게 형은 성공하는 사람이다. 그런 형이 자랑스럽다. 형의 행복을 지켜보는 게 좋아 앞으로도 이렇게 형이 성공하는 사람이길 바란다.
족발집 사장님이 된 형은 항상 피곤해 보였다. 형 옷의 목 부분이 늘어나 있었다. 조카 옷은 항상 새것인데 형의 옷은 그렇지 못했다. 형은 점점 어린 시절의 아빠를 닮아가고 있었다.
“생일 선물로 옷이라도 사줄 테니까 백화점이라도 같이 가자고.”
형은 시간도 없고 피곤해서 멀리 나갈 생각이 없다고 했다. 장사가 잘되는 건 좋지만 형을 갈아 넣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 생일 선물은 됐으니 조카 선물이나 사주라는 형의 말을 단칼에 거절했다. 형은 옷을 잘 입었으며 어린 시절에는 미용실을 한 달에 두 번이나 가야 직성이 풀리던 멋쟁이였다. 하지만 이제는 옷보다 잠깐의 휴식이 더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도 가끔 내가 전주에 가면 함께 각자 차를 끌고 외곽에 있는 카페에 가는 건 좋아했다. 이때만큼은 형에게 운전은 배달이 아닌 오롯이 차를 즐기는 행위였다.
내가 입고 온, 친구들이 선물로 사준 새 옷을 가리키며 예쁘지 않냐며 매장 가서 사줄 테니 나가보자고 한 번 더 말해봤다. 물끄러미 내 티셔츠를 바라보던 형은 예쁘다며, 그럼 그 옷을 벗어주고 가라 했다. 정말 질려버리는 말이었지만 대전으로 돌아갈 때 내 목에는 새 옷 대신 목이 다 늘어난 형의 티셔츠가 걸쳐져 있었다.
작년 형의 생일에는 신발을 선물로 사주었었다. 그때 같은 신발을 나도 샀었지만 몇 달 후 여전히 새것 같은 내 신발과 달리 형의 신발은 이미 낡아 있었다. 매일 배달로 하루에도 수십 곳을 다녀야 하는 형에게 어렸을 때처럼 신발을 아껴 신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내가 벗어 놓고 온 티셔츠도 금방 목이 늘어날 게 뻔했다. 이제 형은 어린 시절 내가 껴안고 자던 ‘우리형’이 아니었다. 형은 한 가족을 짊어지고 있는 ‘아빠’였다.
곧 서른을 앞둔 형이 동생의 하숙집에 짐을 빼러 온다. 대학교 4학년이 되어 본격적으로 교사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나는 사설 독서실을 다니고 싶어 한다. 하지만 하숙집 비에 독서실 비까지 더하면 너무 많은 돈이 필요해서 결국 하숙집을 나와 고시원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면 오히려 돈이 남는다. 고시원이 하숙집 바로 옆에 있어 형과 나는 직접 짐을 옮긴다. 일, 이 평 남짓한 방을 보더니 형이 한숨을 쉰다.
“하나 있는 동생 마음 편히 공부하게 도와주지도 못하고….”
형의 목소리가 떨린다. 별소리를 다 한다고, 온종일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여기에서는 잠만 잘 텐데 불편할 게 뭐가 있겠냐며 형을 달랜다.
하지만 나의 수험생 생활은 길어진다. 초수에 재수까지, 고시원 생활도 덩달아 길어진다. 부모님의 집은 전주 외곽에 멀리 있어 세 번째 시험을 준비하면서 나는 형의 집으로 들어가고 그렇게 다시 형과 한방을 쓰게 된다. 어린 시절 형과 나는 한방을 썼었고, 거실을 안방처럼 사용하시는 부모님 때문에 집에 방이 하나 남던 때에도 ‘형제는 방을 같이 써야 한다’는 형의 주장으로 우리는 계속 한방에서 지냈다. 내가 혼자 방을 쓸 수 있었던 건 형이 군대에 가고 난 후부터였다. 그러니 내 삶에서 형과 따로 살던 해는 얼마 되지 않는다.
세 번째 시험에도 떨어지고 다시 네 번째 시험을 준비한다. 형은 이사를 하고 나도 형을 따라간다. 새집은 방이 두 개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한방을 쓴다. 형이 결혼하고 형수님이 집으로 들어왔을 때야 나는 작은방으로 넘어갔고, 형의 신혼집에서 1년을 더 지낸다.
눈을 떠보니 아무도 없었다. 형은 당연히 출근했을 시간이었지만 형수님도 평소보다 일찍 출근했는지 집에 아무도 없었다. 네 번째 임용 시험 발표날이었으니 아마 자리를 피해주신 듯했다. 조용히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대전교육청 홈페이지에 접속해 본다. 최종 합격. 그동안 고생했던 시간이 떠올라 기쁨보다 울컥한 마음이 먼저 찾아왔다.
천천히 목욕을 하고 그보다 더 천천히 옷을 갈아입었다. 부모님 가게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면서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합격자 발표 시간이 한참 지나도 연락이 없어 결과를 으레 짐작했었는지 형의 목소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차분했다.
“형, 나 붙었어.”
형보다 더 차분하게 말하는 내 말을 듣고 고생 많았다며 축하해주는 형의 목소리는 이제 떨리다 못해 울먹이고 있었다.
발표가 1월 중순이었고 신규 교사 연수는 2월, 발령은 바로 3월 2일이었다. 형의 집을 나와 본가로 들어간 나는 부모님과 함께 대전의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니거나 혼자 살려면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느라 분주해졌다. 교사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감사 인사를 드릴 곳도 많았다. 모두 나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고 그에 응하듯 앞을 향해 걸어갈 준비에 더욱 집중했다. 더구나 긴 시간 동안 나아가지 못하고 늘 한자리에 머물러 있던 청춘이 아니었던가. 그래서 그때는 형과 한집에서, 때로는 한방에서 일상을 함께 보내는 일이 더 이상 없을 거라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었다. 우리가 오랫동안 같은 공간에서 지낼 수 있었음을 감사해하는 시간을, 앞으로 다른 공간에서 지내면서 달라질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형의 집을 나오기 전에 짧게라도 가졌어야만 했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시작된 독립은 부모님으로부터의 독립이 아니었다. 나의 독립은 형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내가 대전에 살게 되면서 우리는 주말에나 볼 수 있었다. 밥이나 커피 혹은 술 한잔을 하는 날도 있었지만 얼굴만 잠시 보고 갈 때가 더 많았다. 어떨 때는 얼굴도 못 보고 올라가는 길에 통화만 하는 날도 있었다. 형의 품을 떠나 서로가 각자의 삶을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 둘의 인생은 색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형은 두 아이의 아빠이자 가게를 운영하는 사장님으로, 나는 다른 억양의 사람들 속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로 살아갔다. 매일 마주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른 일상에서 우리 형제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것들은 과거가 되어갔고, 모르는 것들은 현재가 되어 갔다.
오늘은 지난번에 빌려 간 돈을 형이 갚기로 한 날이다.
“왜 또 빈손인 건데?”
형은 미안하다며 빌린 돈을 몇 개월에 걸쳐 나눠서 갚겠다고 한다. 나는 그냥 웃고 만다.
오늘은 내 생일이기도 하다. 형은 생일 선물로 작은 프라모델을 선물로 준다. 타지에 살기 시작했을 때 심심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린 시절 좋아했던 프라모델을 다시 만들곤 했었지만 이미 그만둔 지 오래다. 둘째 조카가 좀 더 자라면 그동안 만들었던 것들도 모두 선물로 줄 예정이다.
카페 창밖을 보니 곧 눈이 올 것 같다. 눈이 많이 내리면 형은 나에게 운전 조심하라는 문자를 보내겠지. 눈이 아니라 비가 와도 형은 그럴 것이다. 나는 배달도 안 하는데.
최근에 형은 십 년 넘게 운영하던 족발집을 접었다.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어보며 조언인지 질책인지 모를 말들을 건네다가 문득 우리의 옛 대화가 생각난다.
“형은 사촌 형들이랑 잘 지낸다. 나는 이제 좀 어색한데.”
그때 형은 말했다. 자기에게도 가끔은 형이 필요하다고. 내가 좀 전 형에게 한 말은 ‘형’ 같은 말이었을까? 내 말을 들으며 형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형에게 ‘형’이 필요한 시기인 건 분명해 보인다.
동생은 결국 ‘동생’이기에 결코 형의 ‘형’이 될 수 없다. 그러니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또다시 형제로 태어난다면 그때는 내가 형의 ‘형’으로 태어나고 싶다. 그래서 동생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런 거라고, 하나만 더 있었어도 별 신경 안 썼을 거라는 농담을 나도 해보고 싶다.
사실 알고 있었다. 이 글의 끝에 내가 형을 어떻게 생각하게 될지. 글을 쓰는 동안 『외딴방』의 한 구절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으니까. 소설 속에서 여동생은 큰오빠를 보고 ‘자신을 돌봐주려고 이 세상에 온 사람 같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어떤 미래 속에서라도 그를 잊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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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경숙, 『외딴방』, 문학동네, 1999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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