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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우리가 몰랐던 건

이해 - '잘 알아서 받아들임.'

by 임성현

‘잘 알아서 받아들임.’


‘이해’의 사전적 정의다.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행위, 이해. 어쩌면 그때 우리가 ‘사랑해’보다 더 많이 한 말은 ‘이해해’였던 것 같다. 다만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받아들여 하는 말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해해’를 평서형으로 말하며 여전히 남아 있는 서운함을 드러내거나, 의문형으로 말하며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무기로 사용했고, 때로는 부정형으로 표현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방패로 삼기도 하였다.

잘 안다는 건 어느 정도를 의미할까. 잘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모습도 한가득이면서 당신의 눈빛, 당신의 말투, 당신의 버릇을 더 알았다 한들 나는 당신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을까? 그때 우리가 몰랐던 건 서로가 아니라 ‘이해’였다. 잘 안다는 건 고작 이해의 절반일 뿐인데도 우린 서로의 눈빛과 말투와 버릇만을 알려고 했고 이를 받아들여 자기 안에 고이 넣으려 노력하지는 않았었다.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시간 동안 각자의 방식으로 굳어진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껴안는다는 건 쉽지 않은 행위이다. ‘이해’의 ‘해(解)’가 소의 뿔을 칼로 자르는 모습을 가지고 있듯 그 포옹은 살을 에는 고통을 수반하기도 한다. 그때의 난 당신을 더 껴안지 못했다. 마치 목에 걸릴까 봐 알약을 삼키지 못하는 아이처럼 당신을 삼키지 못하고 입안에 두기만 했다. 사랑한다면서도 꿀꺽 삼키지 못한 채 혀끝에 전해지는 당신이 쓰다고만 생각했었다. 그때 우리가 서로를 조금 더 끌어안았었다면, 서로를 꿀꺽 삼켰었다면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가 되어 두 개의 하늘과 두 개의 바다가 마주 보는 풍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해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이해는 뿔을 자르듯 나를 아프게 한다. 하지만 상대를 찌르지 않은 채 다가가게 해주는 것 역시 이해였다. 잘라도 계속해서 자라는 소의 뿔처럼 누군가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불가능하다. 결국 자신의 뿔을 지속해서 자르며 상대를 받아들이는 과정의 지속으로 이해는 완성된다. 그래서 나에게 ‘사랑한다’보다 더 어려운 말은 ‘이해한다’라는 말이다. 앞으로 누군가를 또 사랑하게 된다면 ‘당신을 사랑한다’라는 말 대신 ‘당신을 이해하고 싶다’라는 말로 고백을 대신하고 싶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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