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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함께 읽고 있다

서점과 책은 천변 위에 놓인 큰 돌 같다.

by 임성현

수학여행 업무 담당자로서 몇 달을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다가 드디어 2박 3일의 수학여행 인솔이 끝난 날, 풀어진 긴장감으로 집에 돌아오자마자 쓰러지듯 잠들었었다. 다음 날 역시 아무것도 못 하고 누워서 5월의 햇살만 바라보다 휴일 이틀째가 돼서야 겨우 피로가 풀려 오랜만에 여유 있게 서재에 앉을 수 있었다. 바쁜 일상에 미뤄두었다가 다시 펼친 최진영 작가의 『이제야 언니에게』는 중반을 넘어서자 인상 깊은 내용과 문장들을 쏟아 내기 시작했고,

덩달아 나도 문장들에 밑줄을 긋고 페이지 끝을 살짝 접기에 바빴다. 몰아치는 문장들 사이에서 호흡을 조절하기 위해 잠시 책에서 눈을 뗐을 때 마침 서점 ‘오케이 슬로울리(okay slowly)’의 대표님인 다혜 님께 연락이 왔다. 이틀 전 서점에서 열린 ‘고명재 시인과의 만남’ 행사 영상을 유튜브에서 열람할 수 있다는 안내 문자였다. 그리고 이어서 온 문자에는 다혜 님이 시인께 보낸 이메일의 내용 일부가 담겨 있었다.


작년 여름 오케이 슬로울리에서 작은 독서 모임이 열린다는 공지가 올라왔었다. 4명이 모여 각자 준비해 온 책을 읽은 후 책을 소개하며 감상을 나누는 자리였다. 이미 작은 독서 모임을 운영하고 있던 나로서는 이런 자리의 즐거움을 잘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독서 모임이 열린다는 사실이 반가워 공지를 보자마자 바로 신청했었다. 그때 챙겨간 책은 고명재 시인의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로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산문집을 만나 아껴 읽던 중이었다.


‘너는 능히 할 거야.

선하게 클 거야.

너는 오래 아름다움을 말하게 될 거야.’*


그날 사람들에게 소개한 이 구절은 어머니 같은 비구니 스님께서 어린 시절의 시인에게 해주셨다는 말이었으나 앞으로도 꾸준히 글을 쓰고 싶은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응원의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다혜 님도 이 책이 마음에 드셨는지 서점에 들여놓았고 덕분에 진하게 읽은 책을 만날 수 있었다는 연락을 주기도 하셨었다. 그러다 이번 5월에 시인을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는 자리까지 마련이 되었지만 행사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는 날과 겹쳐 아쉽게도 참석할 수 없었다. 이런 나의 아쉬움을 헤아리셨는지 다혜 님은 행사를 녹화한 영상을 그날 참여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참여하지 않은 내게도 공개해도 되는지 시인께 이메일로 물었고, 그 이메일의 일부 내용이 내게 보낸 문자에 담겨 있었다.


메일에서 다혜 님은 시인께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지만 영상을 공유받았으면 하는 사람으로 나를 소개하고 있었다. 다혜 님이 시인의 산문집을 처음 알게 된 인연과 내가 행사에 오지 못한 이유, 그리고 독서 모임 때 내가 소개했던 문장까지 모두 글에 담겨 있었다. 바쁜 와중에도 나를 잊지 않고 챙겨주시는 마음을 보자 시인과의 자리에 나도 함께 참석한 기분이 들었다.

감사의 답장을 보내고 손에 놓은 소설책을 다시 집다가 최근 최진영 작가의 책들을 즐겨 있던 내게 『이제야 언니에게』를 소개해 준 사람이 다혜 님이라는 사실이 떠오르자 책으로 이어지는 인연이 새롭게 느껴졌다. 서로가 소개한 책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의미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오케이 슬로울리에서 책을 읽다 학생을 만났다. 수학여행 때 함께 걸으며 들려준 서점 이야기를 잊지 않고 찾아온 학생이었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잠시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서로의 자리에서 조용히 책을 읽었다. 짧게 지나간 이야기를 잊지 않고 멀리서 온 제자가 기특해 집에 가기 전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를 꺼내 속지에 간단한 메모를 적고 소개하고 싶은 문장이 적혀 있는 페이지의 끝을 접어 선물로 사주었다. 며칠 후 제자는 책에 인덱스 플래그를 잔뜩 붙인 사진과 함께 글이 정말 좋아 돌아오는 주말에 한 번 더 읽을 거라며, 책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후로도 제자는 서점에 종종 들르는지 직접 만들어 내게 선물로 준 액세서리와 똑같은 액세서리가 서점 SNS 계정에 올라오기도 했다.


서점과 책은 천변 위에 놓인 큰 돌 같다. 누군가는 그저 놓여 있는 돌로 보겠지만 그 위를 밟고 건너는 이에겐 서로를 연결해 주는 징검다리가 된다. 다혜 님과 나 그리고 제자까지,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있었지만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있었다.

* 고명재, 『너무 보고플 땐 눈이 온다』, 난다, 2023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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