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남도 여행이다. 이 년 전에는 해남에서 보길도를 거쳐 완도를 갔었다면 이번에는 순천에서 시작해 남해를 지나 통영과 진주를 다녀볼 예정이다. 해안 도로를 한참 가다 보면 남해는 잠시 바다를 가린 채 산길로 나를 안내한다. 그 안내를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달리며 운전을 즐기고 있으면 어느새 산과 나무에 가려져 있던 바다가 다시 얼굴을 비추며 안녕이라 말한다. 이렇게 바다가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을 바다의 시선에 기댈 수 있어 외롭지 않은 곳이 남도이며, 사라졌다 나타나는 바다와 ‘안녕.’과 ‘안녕?’을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는 과정이 남해의 여행이다.
보리암은 바위산 언덕에 있다. 좁고 긴 암자는 몇 걸음 물러 대웅전과 불상을 바라보게 하고 뒤돌아서는 불상이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게 만든다. 그 시선에는 능선으로 이어진 산과, 산 대신 자리 잡은 섬과, 섬을 삼킨 바다가 담겨 있다. 해 질 무렵의 안개가 만든 겨울 어스름은 바다의 푸르름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암자 옆에 있는 절벽의 거대한 바위들은 바다를 바라보며 묵묵히 합장하는 승려 같다. 불상의 시선이 향한 풍경과 합장을 하는 바위들. 보리암은 그렇게 절을 찾아온 이들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이 이곳에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보리암의 겨울은 조용하다. 소란스러운 곳은 오직 사람이 모인 곳뿐, 멀리 있는 바다와 바람이 불지 않는 숲도 자신의 소리를 죽인 채 타지에서 온 여행자를 지켜보고 있다. 보리암에서 나는 고요로 목욕을 한다. 그 고요가 오래오래 내 몸에 남아 있기를 바라며 물기를 닦지 않은 채 숙소로 발길을 돌린다.
나의 겨울 여행은 고요를 찾아가는 여정이다. 서점과 절, 바다와 산을 다니며 묵은 때처럼 몸에 쌓인 소음을 긁어내다 고요가 적막해지면 일상으로 되돌아간다. 여행이 적막에 묻혀버리면 더 이상 즐겁지 않다. 겨울이 끝나고 봄, 여름, 가을이 차례대로 지나면 고요는 서서히 그리움이 되고, 그 그리움으로 끙끙 앓다 다시 겨울이 오면 차에 짐을 싣고 떠날 채비를 한다.
여행지를 떠나고 시간이 지나면 특정한 순간이나 감각이 그곳과 하나 되어 기억된다. 영광은 조용히 내리는 눈으로, 진도는 따뜻한 부드러움으로. 이번 여행에서 남해는 고요가 온전하게 머무는 곳으로 기억에 남을 듯하다. 사위가 소란스럽고 마음이 복잡해지면 눈을 감고 불상과 함께 바라보던 풍경을 떠올리리라. 처마 끝을 지나가는 구름의 속도로 고요를 읊조리던 남해를.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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