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가 서로를 잘 알 수 있도록 느리게 친해졌으면 좋겠다
획이 그어지지 않는다. 그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획이 채워지지 않는다. 책에 사인을 할 때 쓰라고 선물을 받은 새 만년필은 내가 펜을 쥐는 습관을 아직 알지 못한다. 오래된 나의 만년필을 꺼내어 같은 글자를 써 보자 모든 획이 내가 바라는 대로 잘 그어진다. 마치 오래된 만년필이 새 만년필에게 자신의 능숙함을 뽑내는 듯 하다.
'유수필(流水筆)'이라고도 불리던 펜은 그 쓰임의 시간으로 이제 만년필이라 더 많이 불린다. 만 년을 쓰는 펜.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몇 년만 함께해도 서로가 충분히 익숙해질 텐데 만 년이라니, 그 시간이면 서로 모르는 점이 있는 게 더 이상할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새 만년필과 나는 서로 낯을 가리는 중이니 앞으로 우리에겐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펜촉은 몇 달 혹은 길게는 일 년 정도를 내가 펜을 쥐는 방향과 기울이는 정도에 맞게 닳아가며 나를 알아간다. 이는 가족도, 나를 사랑했던 사람도 알지 못하는, 오직 펜만이 아는 습관이다. 나 역시 펜촉을 눌러야 하는 강도를 알아가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호흡이 잘 맞는 친한 사이가 되어 있을 테고 그때가 되면 지금처럼 획이 비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오래된 만년필로 이 글의 초고를 더 적어본다. 칠 년을 함께 해 나를 잘 알고 있는 만년필은 내가 가고자 하는 획의 방향을 잘 알고 따라와 준다. 나 역시 필기감이나 농도의 미묘한 변화만으로 만년필 속 잉크의 잔량을 느끼곤 한다. 말을 타본 적은 없지만 오래 호흡을 맞춰온 말과 기수의 관계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나와 십 년을 함께 했던, 더 오래된 만년필을 꺼내 본다. 군 제대 후 낭만과 환상으로 호기롭게 구매했었지만 잘 마르지도 않고, 종이도 가리고, 손에 잉크가 묻는 등 알지 못했던 불편함에 당혹스러워했던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컨버터 부분이 고장 나 쓰지 못하고 펜 함에 보관만 해두는 나의 첫 만년필은 서툴기만 하던 만년필 초보자를 묵묵히 견뎌 줬었다. 그래서 이 만년필에는 미안한 마음이 항상 남아 있다.
새 만년필과 친해지기 위해 기존의 만년필들을 내려놓고 다시 새 만년필로 글을 이어 써본다. 너와 나는 얼마나 오래 함께할까? 만 년이라는 시간을 상상해 본다. 십 년도, 백 년도 아닌 만 년. 만 년은 만세(萬歲)이나 만수무강(萬壽無疆)처럼 옛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던 가장 오랜 시간. '만'과 '연'은 이제 아예 한 단어가 되어 '오랜 세월'이나 '변함없이 한결같은'의 의미로 쓰인다.
우리가 실제로 만 년을 함께 할 수 없겠지만 서로에게 주어진 '만년'만큼은 함께했으면 한다. 대신 조급하게 친해지지 말고 대신 서로가 서로를 잘 알 수 있도록 느리게 친해졌으면 좋겠다. 낚시를 하듯 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많이 잡아 올 테니 너는 그것들을 잘 기록해 주길 바란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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