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한 내가 고요한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유
고요한 공간에는 힘이 있다.
토요일 아침이면 자주 가는 서점에 가 책을 읽곤 한다. 이제는 지인들도 토요일이면 내가 어디 있는지를 어림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서점에 들러 잠시 서점 지기님과 공간과 책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뒤 예약한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같은 국어 교사인 친구들끼리 모여도 거의 나오지 않는 책 이야기가 서점에서는 자연스럽게 나와서 좋다. 책을 읽고 있자 서점 지기님은 지금 있는 곳에서 가까운, 이전을 준비하고 있는 새 공간에 다녀와야 한다며 내게 잠시 서점을 맡아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셨다. 자신의 공간을 내게 믿고 맡겨주는 일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한 일인가. 나는 그 말이 반가워 걱정하지 말고 어서 다녀오라고 했다. 서점 지기님은 감사하다며, 전날 예약자 명단을 확인했을 때 단골인 내가 첫 손님으로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는 말을 건네셨다.
말은 호기롭게 했지만 행여나 손님이 올지도 모른다는 긴장감과 함께 서점 입구를 바라보고 있으니 손님 대신 햇살이 어느새 통창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전진희의 연주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책이 가득한 공간을 따뜻한 빛과 소리가 둘러싸고 있는 고요한 풍경을 보자 무엇이라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글쓰기가 너무 힘들어 당분간 아무 글도 쓸 수 없겠다고 생각했던 나였지만 이렇게 서점 안에 앉아 있으니 생각이 달라진다. 삶에 이리 아름다운 순간이 만연한데 어떻게든 쓸 수 있지 않을까? 가방 안에서 펜과 노트를 꺼내 들었다.
얼마 전에는 SNS에서 새롭게 본, 꽃과 책이 함께 있는 공간을 다녀왔다. 서점 지기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가게를 연 지 이제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한쪽에 놓인 안내 글에는 책을 좋아하는 남편과 꽃을 좋아하는 아내가 공간을 이루기까지의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진 장소라서 그럴까, 공간 곳곳에 녹아 들어 있는 애정이 엿보였다.
한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가 시선이 저절로 공간으로 향했다. 잔잔한 음악과 꽃을 다듬는 소리 사이로 보이는 골목 풍경, 그리고 그 풍경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이 꽃과 책이 있는 공간을 쓰다듬고 있었다. 꽃이 있어 그런지 봄이나 여름이 오면 생기가 더 가득할 공간으로 보였다. 그 풍경을 보고 싶어서라도 이곳에 몇 번을 더 오게 될 것 같았다.
한참 공간을 보고 있으니 서점 지기님이 페브릭 포스터로 꽃과 책이 있는 공간과 손님들이 책 읽는 공간을 구분하면 어떨지를 물어보셨다. 내가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고 여기셨나 보다. 이 자리에서 보이는 공간이 좋아 계속 보게 된다고, 포스터로 시야를 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조심스럽게 건넸다. 의견에 덧대어 공간을 응원하는 말을 한껏 건네드리고 싶었지만, 그 마음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갈 듯하여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더 나누는 것으로 대신했다.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을 바라보는 일은 무척 즐거웠다. 심지어 내 취향에 맞는 공간이라 더욱 그랬다. 나도 좋아하는 걸 계속 좋아할 수 있겠다는 기분과, 묵은 나를 훌훌 털어내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온 뒤 공간를 사진으로 담았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장소들에 바라는 마음, 오래오래 이 골목에 있어 주기를 바라는 소망을 공간에서 사 온 꽃송이에 담아 보았다.
이번 주 일요일에는 또 다른 서점에 갔다. 역시나 일요일에 나를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이다. 이번에도 서점 지기님과 일상과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후 1인 소파에 앉았다. 글을 쓸 때는 입구에 있는 책상 자리를, 오늘처럼 글을 쓰지 않고 책만 읽을 때는 소파 자리를 자주 찾는다.
수많은 책과 따뜻한 차, 빔프로젝트에서 나오는 느린 영화와 그보다 더 느린 음악들. 세상에 해를 끼치기는커녕 오히려 손해를 입지 않으면 다행인 존재로만 가득한 공간이다. 그런 공간 안에서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책을 읽고 있으니 아침부터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부렸던 짜증이 모두 녹아내려 갔다. 더 나아가 화를 내던 내가 창피해졌다. 어차피 들어주는 이도 없었건만 나는 왜 그리 잔뜩 짜증을 냈었던가. 아니, 오히려 보는 이가 없어서 그렇게 짜증을 냈던 건지도 모른다. 서점에 오기를 참 잘했다.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불쾌한 감정을 스스로 만들어낸 줄도 모르고 불쾌한 일이 내게만 자꾸 생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욕심과 분노를 표출하는 '진짜 나'와 한없이 다정한 사람처럼 구는 '보이는 나'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해 노력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실패에서 오는 좌절감, 그 좌절감을 서점이 조용히 씻어주고 있었다. 대신 이렇게 무해한 공간처럼만 살면 나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이 들어서게 해주었다.
또다시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날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입구에 있는 책상 자리로 옮겨 이 글의 초고를 이어 썼다.
고요한 공간에는 힘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게 해주는 힘이.
지지부진한 나를 새롭게 여길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진짜 나와 보이는 나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는 힘이.
고요한 공간에는 그런 힘이 능선을 타고 내려오는 산안개처럼 나를 감싸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천천히 가려준다. 더 나아가 피천득의 문장처럼* '여러 사람을 좋아하며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를 건넨다.
나약한 내가 고요한 공간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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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천득, '나의 사랑하는 생활' 중에서
** 글에 언급된 공간은 차례대로 대전에 있는 '오케이슬로울리', '히즈가든 앤 묵북', '한쪽가게'이다.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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