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슬픔을 아는 이의 눈동자 같은 어둠과 차가움이 갖는 역설적 포근함이다.

by 임성현

겨울 아침의 어스름이 좋다.

모두가 잠들어 있고 나만 깨어 있는 듯한 어스름의, 먼저 깨어나 아직 자는 아이를 살피는 부모처럼 무언가를 지켜주고 싶게 만드는 어스름의 아침이다. 또 ‘사랑해’라고 말하면 공중에 새하얀 무늬를 새겨 혼잣말을 해도 외롭지 않게 해주는 입김과, 껴입은 옷 사이로 들어와 머릿속을 하얗게 식혀주는 찬 공기마저 좋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이라고 했던가. 슬픔을 아는 이의 눈동자 같은 어둠과 차가움이 갖는 역설적 포근함이다.


눈을 떠보니 창 사이로 휘휘하는 소리가 들린다. 방 밖으로 바람이 거세다. 그 소리에 여행지에서 설경을 바라보며 찬바람을 온몸으로 쐬고 있던 수많은 지난겨울의 내가 떠오른다. 매년 겨울이면 홀로 여행을 떠난 지 오래라 이제는 겨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사랑하는 계절이 있다는 건 얼마나 큰 기쁨인가. 눈도 내린다면 좋으련만, 기대를 품는 즐거움을 더 오래 느끼고 싶어 몸을 들어 창밖을 보지 않는다.

기다린 눈이 오후부터 내린다. 서점에서 책을 읽다 잠시 일어나보니 입구의 통창 너머로 눈이 내리고 있다. 뒤늦게 확인한 휴대폰에는 서점 지기님에게 온 ‘눈이 옵니다’라고 문자가 와 있었다.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내가 내리는 눈을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배려다. 첫눈도 아니건만 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서점 안이 들썩인다. 서점 안의 손님들은, 이미 서로의 얼굴이 익숙한 우리는, 창밖의 풍경을 찍는다. 창밖에 내리는 커다란 눈송이와 따뜻한 실내, 서점이라는 장소가 주는 포근함과 흘러나오는 느린 노래까지.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내친김에 서점 지기님은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사진을 찍자고 하신다. 내리는 눈은 앞에, 서점은 뒤에 둔 채로 우리는 서로의 사진을 찍어준다. 사진 속의 눈송이가 큼지막하다. 심지어 어떤 눈송이는 하트 모양이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도 설렘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서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은 어떤가. 천변의 산책로에도, 산책로를 감싸는 나무에도 모두 눈이 소복이 쌓여 온통 하얗다. 차를 잠시 갓길에 세워두고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


이렇듯 눈은, 눈을 안고 있는 겨울은 같은 시간과 공간의 분위기를 달라지게 한다. 매번 지나치던 곳을 멈춰 서서 바라보게 한다. 한여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예보 없이 내리는 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겨울은 언제든 찾아올 설렘을 기다리며 지내는 계절이다.

이번 겨울에는 겨울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려 한다. 눈에 파묻히듯 봄과 여름과 가을의 지난 나를 겨울에 묻히려 한다. 고요하듯 푸르른 어스름으로 괴로웠던 나를 살포시 덮어 주고, 차가운 만큼 그만큼 더 순수한 공기로 미움으로 뜨거웠던 나를 식혀야겠다. 그리고 온통 하얗게 물들이는 눈 위를 걸으며 다시 시작하는 마음을 가져야겠다.



* 정호승, 「슬픔이 기쁨에게」 중






글, 사진 : 임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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