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이란 갑작스럽게 인생의 큰 비극이 닥쳐서 상황과 안정이 급격하게 변할 때 찾아오기 쉽다. 그런 정도가 회복 불가능 외상 같은 큰 변화가 아닌 이상 내적인 회복체계가 잘 작용한다면 시간이 지나면 아물기 마련이다.
인체에서 가장 독소를 해소하는 장기인 간은 상처에 대해 능동적이다. 세포의 재생이 빠르고 여러 엽으로 이루어져 있어 부분을 잘라내어 이식이 가능할 정도로 융통성이 강한 장기이다. 하지만 이런 장기 또한 만성 간염과 같은 치명적이지 못하지만 서서히 기능을 망가트리는 질병을 마주한다면 회복이 힘들다. 간은 점점 단단해지는 섬유과정을 거치며 기능이 망가진다. 만성 간염에 의해서 간이 망가지는 역설적인 이유는 자신의 면역체계가 과도하게 감염된 자기 세포를 과도하게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몸에 독소를 해독하지 못하고 초기에는 황달, 피곤과 같은 가벼운 증상으로 시작하여 결국 죽음에 이른다.
인간의 마음도 비슷하다. 초기에는 자신 이게 우울인지도 모를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내부 깊숙한 부분부터 잠식이 시작된다. 그 이후 많은 시간이 경과한다면 형태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면 어디가 원인인지도 모른 체로 가장 원인이라고 하기 쉬운 자신으로부터 우울의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삐뚤어지고 편협한 사고방식이 익숙해져 더 이상 나의 문제에 대해 타협할 존재는 세상에 없어 보인다. 그저 내 마음속에 비친 내 모습만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다. 이런 과도한 자기 공격은 결국 만성적인 경과로 넘어가게 된다. 만성적인 경과가 될수록 더더욱 원인은 모호해진다. 단지 고장 난 장기처럼 원래의 모양보다 비대해지거나 수축하여 억지로 삶의 환경에 나의 모양을 맞춰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해도 큰 문제없이 잘 기능을 하는 것처럼 증상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형태는 지속가능하지 못하다. 다른 조그마한 병이 찾아온다면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사소한 염증이라도 방관해서는 안된다. 우울이 찾아온다 싶으면 언제든지 누구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좋다. 도저히 도움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자살에 이르기도 한다. 지속적인 우울한 사람의 자살은 그다지 큰 결심이 아니다. 언제 인지부터 모르는 우울감이 기저에 존재했으며, 자신의 꿈이나 진로 추구하는 가치 등은 아주 가벼운 담론이 되어버린 지 오래이다. 애초에 부조리한 삶에서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렸다. 가장 진지한 담론은 자살이다. 내가 살아있어야 다른 부수적인 철학적인 의문을 가지고 사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애초에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진짜로 자유로운 존재면 죽음을 선택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무언가 우리를 얽매이는 것들이 있기에 자살이 쉽지 않은 선택인 것이다. 삶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고 나의 진정한 자유를 찾는 자들은 이미 다 자살을 하고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통과 권태 사이에서 왜 허덕여야 하는가? 행복이란 감정이 단지 우리를 갑갑하게 매일같이 달고 다니는 족쇄 같은 욕구에 잠시 해방된다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자살이 과연 악행인가?
사랑받지 못하는 삶이 얼마나 비참한 감정인지에 대한 것은 공감의 영역이 아니다. 매일 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 식사의 메뉴와 질에 대한 평가가 존재하겠지만, 그런 투정을 떠나 붕괴된 사람은 소화기관이 망가져 수액에 의존하여 영양을 공급받는 지경이기 때문이다. 항상 비어있고 배고프고 영양이 실조 되어 있다. 지금 내 상황이 그런 것 같다. 아마 삶을 영위한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잠시라도 살아갈 이유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