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들
나는 어린시절부터 문제가 생기면 항상 책을 찾았다.
세상만사 그 어떤 문제도 책 속에 답이 있다 믿는 내 철학이 처음으로 깨졌다.
죽음으로 검색했을때 나오는 책들은 참 많았지만,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의 자세 따위는
도통 없었던 것이다.
그저 말기 암, 죽음이 확정된 사람이 인공호흡기나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들어간 호스피스에서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나와 있어도, 중환자실에 가족을 보낸 남은 사람들이 대처할 수 있는 준비 방법에 관한 책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거기서부터 절망했다.
엄마는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지만, 여러번의 고비를 맞고 있었고 언제든지 돌아가실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고 낙관적으로도, 비관적으로만도 볼수는 없었다.
그때부터 고민에 빠졌다.
엄마가 중환자실에 내려간지 꼬박 2주가 지난 시점.
나는 그때부터 엄마의 장례를 알아보고, 한편으로는 엄마가 나아졌을때의 상황을 가정해 동시에 플랜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성적인 판단이었다면, 내 가슴은 엄마에게 필요한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번째 면회를 갔을때, 엄마는 기도삽관은 간신히 제거를 한 상태였지만 폐렴 / 많은 가래 / 뇌경색 / 열 기타 등등으로 몸상태가 무척 안좋았던 때였다.
분명 네번째 면회까지는 내 손을 꼭 쥐고 눈도 제대로 못 뜨던 엄마.
내 질문에 간헐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던 엄마가 달라져버렸다.
" 엄마, 나 오니까 그래도 좋지? "
엄마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 엄마 나 싫어? "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네번째 면회 날을 평생 잊을수가 없을 것 같았다.
가슴에 너무나도 크나큰 상처로 남을 것만 같아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 엄마 나 미워? "
그 질문에는 엄마가 답을 하지 않았다.
안쓰러운 표정, 복잡한 감정을 담은 눈동자, 그저 빤히 바라보는 그 눈에서 나는 어떤 감정을 읽었을까.
엄마가 이번만큼은 떠나고 싶어했다.
삼도천을 건널 차례가 여러번 왔었다.
그러나 그 떠날 순간을 두 병원에서 많은 의료진들이 필사적으로 여러차례 막아냈다.
엄마는 지쳐있었다.
그리고 나를 자주 보면 볼수록, 내가 눈에 밟혀 떠날수가 없었던 것 같았다.
그걸 깨달은 건 많은 생각과 엄마의 일기장과, 복잡하디 복잡한 우리 집안 사정들이며 뭐며 여러가지를 가정해 생각해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걸 그 다음번 면회에 가서 엄마에게 내가 눈에 밟혀서 그러냐 는 질문에 기어코 끄덕이는 엄마를 보고서야 확신을 가졌다.
흔히들 연명치료는 가족의 욕심이라고 한다.
기도삽관, 기도절개 역시 마찬가지다.
네이버 까페에서 중환자실 연명치료로 검색하면 수많은 환자의 보호자들이 올린 질문글들을 볼수있다.
연명치료 너무 욕심인가요?
따위의 질문 글들.
나는 엄마에게 강요도, 이겨내자는 희망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에게 기관절개 해도 되냐고 물어보았고, 엄마의 끄덕거림에 동의 했으나, 이후부터는 엄마에게
나아야지, 이겨내야지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다섯번째 면회부터 나는 엄마에게 다른 말들을 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