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도 노력의 대상인가요?

'이해, 안되면 되게 하라'???

by Phd choi 최우수

최근에 군부대를 방문해서 사진을 한 장 찍었는데, 배경이 '안되면 되게 하라'였다. 이 사진을 대학 동기 단톡방에 올렸더니, 답 톡 중 하나가 '안되면 이제 고마해'였다.


90년대 학번이자 타고난 재능과 가진 자원이 풍족하지 않았던 내게 안되면 되게 하라 식의 노력과 끈기를 강조하는 가치관은 꽤 크고 끈질기게 나의 인생 전반을 지탱해 왔던 것 같다.


실제로 지금도 여전히 나의 의식의 근저에 깔려 있음을 종종 느끼며, 나 아닌 타인의 질책과 압력 보다도 성공을 위한 지속성의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온다.




이해와 공감같이 타인과 연결된 혹은 타인을 향하고 있는 나의 감정과 인지는 어떠한가?


이것도 안되면 되게 하라 정신에 입각하여 이해하려고 공감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그래서 이해되지 않으면 나의 노력을 되짚어보고 자책하고 더욱더 가열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끝내 그 이해의 대상이 소멸되거나 혹은 이해의 주체인 내가 없어질 때까지 이해 못 할 것은 이해 못 한다.

드라마 단골 대사에 비유하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정도가 되겠다.

이해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진정한 이해라기보다는 포기 내지 이해하는 척이고, 이는 이해 못 함에 따른 갈등의 회피 내지 유보 일 뿐이다.



그럼 왜 이렇게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는가?

첫째, 과거 그 사람의 주변의 환경과 겪어온 경험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히 가족 간의 이해 불일치에 따른 갈등이 많고, 해결도 쉽지 않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벌어지는 이해의 대상들은 대부분 유사하기에 유사한 주제 안에서 다른 환경과 그 안에서의 경험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것이다. - 마치 우리 아빠는 예전에 이러지 않았는데, 이 사람(남편)은 왜 이래? 와 같은, 배경과 상황은 유사하나 등장인물은 전혀 다른- 그러니 그 갈등은 더욱 불꽃 튀고 간극은 멀며, 자신의 경험에 따른 주장과 고집은 견고하다.


결국 타협은 매우 어렵다. 한쪽이 완전히 굴복하지 않는 한은. 하지만, 요즘은 바야흐로 개인주의 만능의 시대. 과거에 자식, 미래 혹은 가정을 위해서 억눌러졌던 개인의 가치가 이젠 그 어떤 가치보다도 소중 해졌기에, 이제 과거와 같은 忍苦(인고)의 시간은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둘째, 이해라는 인지 상태의 가변성과 유한성 때문이다.

즉, 본인도 자신의 선택과 이해가 수시로 변하기도 하고, 끝없이 이해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어떻게 타인에게 나를 영원히 그리고 모든 걸 이해해달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 이해, 특히 완전에 가까운 이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원래 불가능한 일이기에 노력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한 생각도 든다. 노력에 대해선 그 대상과 성취 가능성을 차치해두고 무조건 찬양하고 권장하는 강력한 사회도덕의 마력의 힘이 작용하는 것 같다.




이해하려는 노력은 왜 위험한가?

이해의 노력은 대부분 '이해하는 척'으로 변질되곤 하는데, 이는 결국 자신의 본성과 본질을 이기지 못해서 마치 주머니 속 송곳이 주머니를 뚫고 삐져나오듯이, '자신의 이해하는 척 주머니'를 뚫고 나오게 된다. 이 날카로운 송곳은 이해한다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곤 한다. 이 상처는 원래 날카로워서 경계하고 조심하던 것들보다 놀라움과 함께 배신의 감정까지 더해져 더 큰 아픔과 상처를 주게 된다.




이해하지 못하면 어찌해야 하는가?

최선 일지는 모르나, 차라리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솔직히 상대방에게 이해할 수 없음을 알려주면 어떨까? 물론 최대한의 설명도 곁들여서, 그 설명엔 나름대로의 어려움과 극복하려는 용기가 필요한데, 그 설명문엔 자신과 주변 사람의 흑역사가 포함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가령 가난과 결핍 같은. 되돌아보면 이런 가난, 결핍을 감추려는 욕구가 내 마음속에서 돌연변이처럼 이해의 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로 귀결될 수도 있다.

이런 자신의 결핍을 고백하는 것보단 차라리 이해하는 척, 이해할 수 있는 척하는 게 더 쉽다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슈의 종류와 양은 정해져 있다. 사람의 키처럼 성장판을 보면 그 사람의 최종 신장을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의 이해의 종류와 양은 이미 과거의 경험과 환경에 의해 정해져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노력보다는 솔직함이 더 이해를 위해선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