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의 야구, 일곱 번째.
소위 말하는 타이거즈의 올드 팬, '해태 아재'들이 좋아하는 선수들의 유형은 상당히 뻔하다. 눈빛이 날카롭고, 끈질기게 공을 커트하거나 골라내며, 땅볼을 치고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하는 근성 있는 선수들. 누구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유형의 선수지만 유독 '해태 아재'들은 그런 선수들을 아끼고 눈 여겨봤다. 해태가 KIA가 되고, 타이거즈가 오랜 공백기 끝에 우승을 거머쥐고 아슬한 순위권 싸움을 하는 내내 이와 같은 선수들이 아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다소 침체됐던 8월을 보내고 9월을 맞이한 타이거즈에 이와 같은 근성을 보이는 선수가 나타났다. 트레이드 당시 재활 중이었던 김태진이 그 주인공이다. 매 타석 투수와 끈질기게 승부하고, 짧은 타구에도 1루까지 전력 질주해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하며, 호수비 후에도 후속 동작까지 완벽하게 이어가는 근성의 선수. 반등을 노리는 KIA에 김태진의 합류가 무척이나 반갑다.
KIA 팬인 내가 김태진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지난 시즌 신인왕 경쟁 당시였다. 170cm의 작은 체구로 선보이는 안정적인 수비와 높은 출루율 등으로 신인왕 후보에 그 이름이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KIA에도 작은 체구로 리그를 씹어먹고 있는 내야수 김선빈이 있기에, 신인왕 수상과는 별개로 (이 팀에는 전상현과 이창진이 있었으니 당연히 응원하기는 어려웠다) 김태진의 선전을 응원했다. 당연히, 그때는 김태진이 KIA 유니폼을 입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신인왕 후보로 언급될 정도의 군필 내야 자원을 NC에서 내줄 거란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박하전문의 문을 KIA가 내줄 거라는 미친 가정도 해볼 수 없었고.
어쨌든 김태진은 우리 팀에 왔다. 굳이 따지자면 FA 안치홍을 놓치고, 연쇄 작용으로 김선빈과 박찬호가 각각 2루수와 유격수로 포지션을 이동했으며, 이범호의 은퇴와 박찬호의 유격수 이동 이후 빈 3루수 자리를 채우기 위해 데려온 장영석이 부진해서, 다시 트레이드로 데려온 류지혁이 일주일도 안 돼서 햄스트링 부상으로 장기 이탈을 해서. 단장 한 명이 불러온 대단한 나비효과 덕에 또 한 번 3루를 채우기 위해 김태진이 KIA 유니폼을 입었다. 당연히 트레이드 당시에는 회의적이었다. 기껏 키워둔, 다음 프랜차이즈 스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마무리 투수를 일시 부진이라는 이유로 보내고 데리고 왔으니 오죽할까. 심지어 당시 김태진은 발목 골절로 재활이 끝나지도 않은 상태였다. 즉, 장현식과 달리 즉전감으로 1군 무대에서 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팀이 된 선수를 향한 악감정은 없었으나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나주환의 디스크 진단 이후 (선한병원 가만 두지 않겠다.) 장기적으로 2루-유격을 봐야 할 자원인 김규성까지 3루로 이동하고, 현란한 실책으로 시즌 초반 이후 볼 수 없던 황윤호까지 콜업되는 참담한 내야 뎁스를 본 KIA 팬들은 김태진의 복귀를 손꼽아 기다렸다. 타격감이 예전 같지 않아도, 적어도 황윤호보다는 안정적인 수비를 볼 수 있겠지. 그 기대감 하나로 기다렸던 김태진이 9월과 함께 1군에 콜업됐다. 김태진 합류 효과인지, 지옥 같던 8월을 뒤로한 반등 효과인지. 김태진과 함께 한 9월의 KIA는 확실히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김태진은 1군 합류 직후인 9월 5일 KIA 선수로서 처음으로 스타팅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8번 타자 3루수로 첫 선을 보인 김태진의 활약은 기대 이상이었다. 5타수 2안타 1 득점. 두 개의 안타 중 하나는 2루타이기도 했다. 다섯 타석에서 불과 14구를 봤을 정도로 긴 승부를 하는 편은 아니지만, 7월 9일 이후 약 두 달 만의 1군 복귀전임에도 불구하고 날카로운 타격감을 선보이며 KIA 팬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무엇보다 김태진이 온 가장 큰 이유였던 3루 수비 역시 안정적인 모습이었다. 트레이드 후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타이거즈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김태진은 9월 5일부터 KIA가 치른 12 경기 모두 선발 3루수로 출전했다. 8번 타순에서 시작한 그는 뛰어난 출루율을 인정받으며 득점의 핵심인 6번 타자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그동안 김태진은 9월 6일 경기를 제외한 11 경기에서 모두 안타를 기록했다. 특히 9월 8일부터 20일까지 이적 후 10 경기 연속 안타 행진을 이어가며 타선의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다. KIA 이적 전까지 37 경기에서 타율이 0.217이었던 김태진은 KIA 선수로서 뛴 12 경기 동안 타율 0.354, 출루율 0.380, 장타율 0.375와 OPS 0.755를 기록 중이다.
김태진의 타석 때마다 개인적으로 눈여겨보는 점이 있다. 볼을 골라내는 선구안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커트를 해서 투구 수를 늘린다는 것이다. 김태진의 이번 시즌 볼넷은 총 네 개에 그쳤으며, KIA 이적 후에는 9월 12일 친정 팀인 NC를 상대로 얻어낸 하나가 유일하다. 투수와 굉장히 빠르게 승부하는 편인데, 나쁜 공에도 배트가 나가며 투 스트라이크라는 불리한 카운트에서도 기어이 공을 커트하며 7-8구씩 승부를 이어가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KIA 이적 후 총 48번 타석에 들어선 그는 전 타석 통틀어 215구의 공을 봤다. 타석당 평균 4.48개의 공을 봤다는 것이니, 그가 얼마나 빠르게 승부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승부가 빠른 것 치고 삼진은 단 네 번에 그쳤으니, 해당 수치만으로도 김태진이 투수와 제법 괜찮은 수싸움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군에서 더욱 다양한 투수들을 만나며 선구안을 기른다면 꽤나 까다로운 타자가 될 거라는 기대가 된다.
무엇보다 KIA 팬들이 김태진을 예뻐할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배트를 짧게 잡고 단타에 집중한다는 점일 것이다. 이번 시즌 팬들의 속을 가장 썩이는 모 내야수가 배트를 길게 잡고 장타 생산을 위한 스윙을 이어오고 있는데, 김태진은 출루를 제1의 목적으로 두고 짧게 배트를 잡고 컨택을 시도한다. 자신에게 맞는 스윙으로 높은 출루율까지 만들고 있으니, 김태진이 합류한 타선이 탄탄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이적 전 김태진은 3루와 2루를 포함해 외야 수비까지 병행했다. 경찰청 군 복무 시절 좌익수와 우익수를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3루 자원이 있는 팀 사정에 의해 외야에 선 것이다. 현재 KIA에 가장 급한 포지션은 3루이며, 김태진 역시 3루수로 데려온 것이기에 1군 합류 후 김태진은 주전 3루수로 경기에 나서고 있다. 이번 시즌 내내 나주환과 김규성 정도가 만족시켰던 3루 수비를 돌아온 김태진이 완벽히 해내고 있다.
빠른 타구 판단과 몸을 아끼지 않는 수비, 차분한 송구 등 여러 장점이 있으나 내가 생각하는 김태진의 가장 큰 장점은 후속 동작까지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단의 움짤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사 1, 2루에 KIA 강한 박해민 타석에서 김태진이 장타성 타구를 다이렉트로 잡아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곧장 2루 송구 동작을 취하며 주자를 견제하는 모습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이날 김태진은 3루타 하나를 포함한 3안타 경기를 하며 공수주 모든 방면에서 날아다녔으나, 나에게는 이 수비가 가장 강렬하게 남았다.
수비를 화려하게 하는 선수는 많지만, 개인적으로 기본을 중시하며 가장 차분히 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 팀 어린 야수들 중 수비 센스가 좋은 것 치고 기본적인 베이스 커버가 안 되거나 스텝을 제대로 밟지 못해 송구 및 포구를 엉망으로 해 경기를 터뜨리는 선수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차근차근 후속 플레이를 이어가고, 소위 말하는 잔발질 없는 김태진의 수비가 만족스럽기만 하다.
시즌 시작 전부터 지금까지 가장 골머리를 앓는 포지션이 3루였기에 단번에 자리 잡은 김태진의 모습이 반갑기만 하다. 처음부터 KIA에 뛰었던 것처럼 완벽히 팀에 동화된 모습은 그가 마치 KIA가 안고 죽어야 할 서울고 출신 1라운더 야수였던 것처럼 기억 조작을 하게 만든다. (현실은 나지완 직속 후배인 신일고 출신이지만.) KIA의 올드 유니폼인 검빨이 잘 어울리는 눈빛과 근성을 가진 선수, 이제는 김태진과 함께 낄 우승 반지의 개수를 꿈꿔본다.
(사진 출처: 구글 검색 및 KIA 타이거즈 홈페이지, 기록 출처: STAT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