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린의 영화, 첫 번째.
* 해당 글은 영화의 내용 일부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음.
영리한 위로를 건네는 영화가 나왔다. 무엇보다 어려운 시기에, 그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야 하는 여성들에게 단단한 연대 의식을 건네는 작품. 영화가 고조되면서 벅찬 감정을 느꼈던 것은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영화 시장이 불황인 현재, '삼진그룹 영화토익반(이하 '삼토반')'이 사랑을 받는 이유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여긴다.
극 중 목소리를 높이는 주체는 조직 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여성들이다. 이들은 다른 인물에 비해 모자라고, 부족하고, 어리석지 않다. 상고에서도 전교 1-2등을 기록하던 수재였기에 대기업인 삼진그룹에 입사했고, 그렇기에 가족의 자랑, 지역의 자랑이 돼 끊임없이 대화의 주제가 됐을 터다. 그러나 조직 사회 속 이들은 고졸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고, 새벽부터 출근해 대졸 사원들의 뒷정리를 하며, 취향에 맞춘 커피를 타고 담배를 사 오는 등 잡무에 소진되는 값싼 인력이다. 고작 이런 일을 하겠다고 상고에서 기를 쓰고 공부해 상경한 것은 아닐 텐데도.
근속만 해도 기본적으로 이뤄지는 진급인데, 이들에게는 토익 점수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사원보다 근속 기간이 길고, 서류 작성 능력이 뛰어나고, 실무를 파악하고 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부당한 처우에도 이들은 순응한 채로 아침 일찍 커피를 타며 하루를 시작한다. 힘이 없는, 조직 사회의 최하층에 위치한 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고 출신 여성 직원들에게 토익은 동아줄이 된다. 유나(이솜 분)의 말처럼 진급이 목적이 아니라 정리해고가 목적이라 해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어진 기회를 놓칠 수 없기에 그들은 다시 시간을 쪼개고 나눠서 토익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토익반은, 이들이 가장 안전하고 단단히 연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
폐수 처리 비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회사에 가장 돈독한 애정을 보내는 캐릭터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영(고아성 분)이다. 폐수 처리 비리를 발견했을 때 자영이 움직이는 이유에는 애사심이 일부 깔려 있다.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자영의 정의로움과, 자신이 몸 담은 곳을 향한 자부심이 만나 꽤나 좋은 시너지를 내는 것이다. 자사를 향한 애정이 없다면 그저 덮고 모르는 척 넘어갈 수도 있다. 그 편이 힘없는 상고 출신 여자 직원에게는 유리할 테니까. 그러나 자영은 기꺼이 행동하고 옳지 않은 상황을 지적한다. 그간 회사를 향해 보였던 자부심과 애정이 단번에 무너지는 상황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자리를 보장받은 실무자들이 귀찮고 피곤한 일이라며 피할 때에도, 그로 인해 부당한 대우를 받고 퇴사 직전까지 몰릴 때에도.
자영의 적극적 태도가 정면으로 비치지만 유나와 보람(박혜수 분)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권력에 맞선다. 현실의 부당함을 알기에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유나는 여러 캐릭터의 입을 빌려 이미 제 목소리를 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지 알고 있음에도 그는 다시 한번 권력에 맞선다. 가장 믿고 따르던 이의 비리 앞에서 보람은 그것이 잘못됐다고,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소심해 보이고, 순응하는 것처럼 보이는 보람의 지적은 그렇기에 더욱 힘을 얻는다.
이들을 중심으로 토익반 직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힘을 싣고 뜻을 모으는 모습은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아주 사소한 힘도, 목소리도, 하나로 모으면 그 무엇보다 강할 수 있다는 것을. 권력의 최하층에 있음을 보여주는 유니폼을 입은 모습은 외려 이들의 결속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침내 토익반 직원들이 승리를 쟁취하는 장면에서는 히어로 무비를 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던 히어로들이 각기 다른 능력을 발휘해 빌런을 몰아내는 장면은 히어로 무비의 전형적인 클리셰 아닌가. 히어로 무비 속 영웅들은 자신을 상징하는 코스튬을 입고 있다는 점에서 유니폼 차림의 직원들이 묘하게 연결되기도 한다.
'삼토반'은 11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다양한 장르를 선보이지만 딱 하나, 로맨스만은 제한다. 여성 캐릭터를 주연으로 내세우고, 일종의 조력자 역할을 하는 남성 캐릭터가 포진돼 있음에도 어떠한 로맨틱 요소는 가미되지 않았다. 특히 자영과 최동수 대리(조현철 분)는 극 시작부터 끝까지 관계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나 어디에도 로맨틱한 연출이 들어가지 않는다. 타 작품이었다면 가장 쉽게 러브라인을 형성할 수 있는 관계를 담백하게 남겨둔 점이 인상적이다. 이를 통해 여성 캐릭터가 로맨스 요소 없이도 충분히 매력적이며, 사랑이 아니어도 제 힘을 십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여성을 전면으로 내세우고 사랑으로 소비해 아쉬움을 남겼던 몇몇 작품과 가장 차별되는 지점이다.
1995년을 배경으로 여성 직원이 맡았던, 지금까지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잡무를 꽤 신경 써서 고증한 점, 각기 다른 이미지를 가진 캐릭터들로 사내 분위기를 현실적으로 그린 점도 영화의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다. 조현철, 김원해, 김종수 등 연기 좀 하다는 배우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돼 메인 캐릭터들의 행동에 힘을 싣는다. 스토리가 진행되며 이들 중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추리하는 건 영화의 또 다른 재미 중 하나다.
메인 캐릭터만 셋에, 주 역할을 하는 조연급 캐릭터가 다수 포진된 데다가 하나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와중에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하는 등. 다소 부산스러울 수 있는 전개를 탄탄히 잡아주는 건 흐트러짐 없는 영화의 주제다. 토익반에 속한 여성 직원들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트라이트를 비춘 채 이들을 통해 끈끈한 연대를 보여줌으로써 중구난방으로 흐를 뻔한 중심을 잡는다. 그 덕에 영화를 본 이후에도 스토리나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이 덜하다.
'삼토반'은 억지 감동을 강요하거나, 메시지를 주입하지 않는다. 그저 자영과 유나, 보람과 토익반 여성 직원을 통해 누구든 하나의 목소리를 모으면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할 뿐이다. 부당하고 힘겨운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네 편이 될 것이고, 네가 필요로 할 때 하나의 목소리를 낼 사람이 곁에 있을 거라고. 그 담담한 위로 덕에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 후에도 긴 여운으로 한동안 자리에서 떠나기 어려울 것이다.
(사진 출처: 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