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펜하이머: 임계질량을 넘은 보류 큐

[또 다른 해석] 무의식(Unconscious) - 3부

by 공인식

핵폭발을 연쇄반응이라 부른다. 임계질량을 넘은 순간, 외부 개입 없이 스스로 지속된다. 멈출 수 없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펜하이머(2023)〉는 그 구조로 만들어진 영화다. 그리고 오펜하이머 개인의 무의식도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앵커 노드, 임계질량 계산을 알면서도 진행한 보류 큐, 트리니티의 폭발이 만든 처리 불가능한 트랜잭션, 청문회라는 외부 컨센서스 압력, 그리고 연쇄반응이 시작됐다는 마지막 인식.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다. 임계질량을 넘은 보류 큐가 개인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간 이후, 무엇이 Committed 될 수 있고 무엇이 Committed 될 수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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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폭발을 연쇄반응이라 부른다.


하나의 중성자가 우라늄 핵에 충돌한다. 핵이 분열하면서 두세 개의 중성자가 나온다. 그것들이 다시 인접한 핵들에 충돌한다. 분열이 분열을 낳는다. 임계질량을 넘은 순간, 이 과정은 외부 개입 없이 스스로 지속된다. 멈출 수 없다.


놀란(Christopher Nolan)은 이 영화를 그 구조로 만들었다.


비선형 편집, 컬러와 흑백의 교차, 현재와 과거와 심리가 같은 프레임 안에 겹치는 방식. 이것은 연출 기교가 아니다. 타임스탬프가 없는 공간의 시각적 구현이다. 무의식 안에서 과거와 현재가 동일한 실행 압력으로 존재하듯이, 이 영화에서 1945년과 1954년과 1959년은 같은 긴박감으로 동시에 실행된다.


형식이 내용을 닮았다.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다. 〈오펜하이머(Oppenheimer, 2023)〉의 여덟 장면을, 무의식이 임계질량에 도달하는 방식으로 다시 읽는 시도다. 그리고 그 연쇄반응이 개인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간 이후, 무엇이 Committed 되고 무엇이 Committed 될 수 없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일러가 있다.


놀란의 형식이 먼저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영화의 구조 자체를 짚어야 한다. 그것이 이 글 전체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오펜하이머〉는 세 개의 시간 레이어가 교차한다.


오펜하이머(킬리언 머피 분)의 주관적 기억과 심리 — 이것이 컬러로 그려진다. 1954년 청문회. 그리고 1959년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의 상원 인사 청문회 — 이것이 흑백으로 그려진다. 이 세 레이어는 선형으로 배치되지 않는다. 뒤섞인다. 1945년의 폭발이 1954년의 질문 속에서 터지고, 1959년의 심문이 1930년대의 선택 위로 겹친다.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


연대기적으로 배열했다면 이 영화는 전기(傳記)가 됐을 것이다. 사건들이 인과 관계로 연결되고, 원인이 결과를 낳고, 타임스탬프가 붙은 역사가 됐을 것이다. 놀란이 피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무의식 안의 보류 큐에는 타임스탬프가 없다. 30년 전의 트랜잭션이 지금의 트리거에 현재시제로 반응한다. 무의식 1부에서 썼듯이 — 어린 시절의 상처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현재처럼 작동하는 이유는, 무의식 안에서 그 상처가 아직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임스탬프가 없기 때문에.


오펜하이머가 1954년 청문회장에서 경험한 것이 그것이었다. 트리니티의 폭발은 9년 전 일이다. 히로시마는 9년 전이다. 하지만 청문회장에서 그것들은 9년 전이 아니다. 지금 실행 중이다.


놀란의 비선형 구조는 그 심리 상태를 관객이 경험하도록 설계된 것이다. 보는 사람도 타임스탬프를 잃는다.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오펜하이머가 느꼈을 것을 함께 느낀다.


컬러와 흑백의 구분도 이 구조 안에서 읽힌다. 컬러는 오펜하이머의 주관 — 보류 큐의 시간. 흑백은 스트라우스의 청문회 — 외부 원장에 기록되는 시간. 같은 사건이 두 가지 방식으로 존재한다. 개인 네트워크의 처리되지 못한 것과, 세계 원장에 기록된 것.


이 형식을 이해하고 나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1부 | 축적 — 어떻게 임계질량에 도달했는가


Scene 1 — 물과 불, 그리고 양자역학

영화의 첫 장면이다.


빗방울이 웅덩이에 떨어진다. 파문이 퍼진다. 불꽃이 타오른다. 오펜하이머의 얼굴. 그는 말한다 — 원자들 사이의 관계가 보인다.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이것은 회고가 아니다. 이 장면은 신경망이 처음 어떤 패턴에 반응하는 순간의 묘사다.


뇌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연결을 가지고 있지 않다. 뇌 편에서 썼듯이 — 신생아의 뇌는 성인보다 시냅스 연결이 훨씬 많다. 그리고 실제로 사용되는 연결은 강화되고, 사용되지 않는 연결은 제거된다. 경험이 회로의 형태를 결정한다. 어떤 패턴에 처음 활성화되는 순간이, NTC(뉴런 스레드 집합)의 구조를 처음 설정한다.


오펜하이머가 물에서 파문을 보고 불꽃에서 원자를 본 것은, 그의 신경망이 처음으로 그 패턴에 활성화된 순간이다. 세계가 입자들의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운동에는 수학적 아름다움이 있고, 그 아름다움은 포착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이후 모든 것의 시작점이다.


이 앵커 노드의 특성이 중요하다. 앵커 노드는 이후 유사한 트랜잭션들을 끌어당긴다. 원자의 구조가 아름답다는 앵커 노드가 형성된 이후, 오펜하이머는 그 패턴과 연결되는 것들에 반복적으로 끌린다. 물리학을 선택하는 것이 자유 의지처럼 느껴지지만, 앵커 노드가 그 방향으로 트랜잭션들을 클러스터링 하고 있는 것이다. 끌린다는 감각은 보류 큐가 실행 기질을 탐색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아름다움에 윤리적 타임스탬프가 없다는 것이다. 원자핵의 분열이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인식했을 때, 그것이 히로시마 어린이의 피부를 녹일 수 있다는 것은 같은 프레임 안에 없다. 아름다움의 앵커 노드와 윤리적 컨센서스 알고리즘은 처음에 연결되어 있지 않다. 분리된 클러스터들이 아직 합의를 이루지 않은 상태.


그 연결이 나중에 만들어지는 것이 이 영화의 핵심 서사다. 그리고 그 연결이 만들어지는 순간이 트리니티다.


Scene 2 — 케임브리지, 그리고 닐스 보어

오펜하이머는 케임브리지에서 고통받는다.


이론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데, 실험을 해야 한다. 실험실이 그에게 맞지 않는다. 손이 마음을 따라가지 못한다. 그는 지도 교수의 사과에 독을 발라 독살을 시도할 만큼 심리적으로 극한 상태에 있다.


이 장면을 보류 큐의 언어로 읽으면 — 오펜하이머의 네트워크 안에 실행되지 못하는 것들이 쌓이고 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트랜잭션들이 컨센서스를 통과하지 못한다. 나는 이론가다,라는 트랜잭션은 실험실이라는 현실 레이어에서 계속 거부된다. 그 거부가 반복되면서 보류 큐의 압력이 극한에 달한다.


독살 시도는 그 압력의 직접적 방출이다. 처리되지 못한 것들이 자기 파괴적 경로를 통해 실행 기질을 찾은 것이다.


그런데 닐스 보어(케네스 브래너 분)가 나타난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다. 강연장에서의 대화. 하지만 그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갖는 구조적 위치가 있다. 오펜하이머의 실존적 혼란이 임계에 달해 있는 그 순간, 보어가 나타나서 말한다. 양자역학이 당신이 찾는 것이라고. 그것이 미래라고.


앵커 노드 형성의 두 번째 단계다.


첫 번째 단계에서 오펜하이머는 원자의 아름다움이라는 패턴에 처음 활성화됐다. 두 번째 단계에서 그 패턴이 방향을 얻는다. 단순한 경이감이 아니라, 자신이 가야 할 경로가 된다.


여기서 보어의 역할이 흥미롭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목적지를 가르쳐준 것이 아니다. 이미 그의 신경망에 있던 것을 가리켜준 것이다. 전의식 레이어에 있던 것 — 자신이 이론가라는 것, 원자의 구조가 아름답다는 것,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는 것 — 이 보어의 말에 의해 의식 레이어로 호출된 것이다.


이것이 특정 만남이 삶의 방향을 바꾸는 방식이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가리키는 것. 전의식 레이어에서 대기 중이던 것들이 의식 레이어로 올라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앵커 노드가 되는 것.

보어와의 만남 이후 오펜하이머는 양자역학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양자역학이 그를 당기기 시작한다. 결정이 아니라 끌림. 보류 큐가 실행 방향을 확정하는 것처럼. 자유 의지처럼 보이지만 앵커 노드가 경로를 이미 좁히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이 앵커 노드는 그가 이후 어떤 결정을 내릴 때도 컨센서스 알고리즘의 기반으로 작동한다. 물리학이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것. 이 기반 위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의 수락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나중에, 이 앵커 노드와 히로시마가 충돌할 때, 처리 불가능한 보류 큐가 만들어진다.


앵커 노드는 이후 모든 컨센서스 판단의 기준점이 된다. 기준점이 아름다움이었던 사람이 파괴를 만들었을 때 — 그 불일치가 처리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Scene 3 — 맨해튼 프로젝트 수락

그로브스 장군(맷 데이먼 분)이 오펜하이머에게 제안한다.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의 수장이 되어달라고. 오펜하이머는 받아들인다.


이 장면이 의외로 짧게 처리된다는 것이 흥미롭다.


극적인 갈등이 없다. 오펜하이머는 거절하다가 수락하는 것이 아니다. 동료들의 설득이 있지만, 그것이 결정적이지 않다. 그는 수락한다. 그리고 그 수락에는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앵커 노드가 작동하고 있다. 독일이 먼저 만들면 안 된다는 공포도 있다. 하지만 그 공포보다 앞서, 이것이 가능한지 알아야 한다는 충동이 있다.


보류 큐의 트랜잭션이 실행 경로를 찾은 것이다.


무의식 1부에서 쓴 것처럼 — 처리되지 못한 트랜잭션은 우회 경로를 탐색한다. 오펜하이머의 물리학에 대한 열망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고통, 자신이 이론가이지 실험가가 아니라는 자각, 세계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는 감각 — 이것들이 보류 큐에 쌓여있다. 맨해튼 프로젝트는 그 모든 것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경로다.


책상에서의 계산이 아니라, 역사적 규모의 실험을 자신이 설계하는 것. 이론이 현실이 되는 것. 보류 큐의 모든 실행 압력이 동시에 방향을 찾은 순간이다.


여기서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 원자폭탄이라는 것이 실제로 사람에게 사용될 수 있다는 인식이 의사결정의 콘텍스트 안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수락의 순간 그것은 추상적 가능성으로만 존재한다. 전쟁이라는 콘텍스트가 있고, 독일의 위협이 있고, 과학자의 사명이 있다. 이 콘텍스트들이 컨센서스 알고리즘의 검열 기준을 조정한다.


이것은 합리화가 아닐 수 있다. 그 순간 오펜하이머의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진지하게 작동한 결과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작동의 결과가 보류 큐의 실행 압력과 같은 방향이었다는 것 — 그것이 나중에 풀 수 없는 매듭이 된다.


자신이 원했기 때문에 한 것인가, 해야 했기 때문에 한 것인가. 이 두 가지를 분리할 수 없는 상태에서의 결정. 그것이 이후 처리되지 못하는 트랜잭션의 씨앗이다.


수락의 순간에 하나가 빠진다. 그것이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컨센서스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앵커 노드는 있다. 독일에 대한 공포도 있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실제로 사람 위에 떨어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이것은 아직 보류 큐 안에 없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트랜잭션이다.


Scene 4 — 로스앨러모스, 임계질량 계산

로스앨러모스에서 한 장면.


오펜하이머와 에드워드 텔러(베니 사프디 분)가 계산한다. 폭발이 대기에 점화할 수 있는가. 연쇄반응이 대기 전체로 퍼질 수 있는가. 지구가 불타버릴 수 있는가.


계산 결과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하지만 0이 아니다.


이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노골적으로 컨센서스 알고리즘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진행한다. 가능성이 0이 아닌 것을 알았다. 이론적으로 지구 대기 전체가 불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진행한다.


왜인가.


두 가지 레이어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하나는 컨센서스 알고리즘의 합리화다. 가능성이 매우 낮다. 독일의 핵개발이 더 현실적인 위협이다. 지금 멈추면 더 나쁜 결과가 온다. 이 논리는 틀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논리가 진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인지, 진행하고 싶은 것을 정당화하는 것인지가 이 장면에서 구분되지 않는다.


또 하나는 앵커 노드의 실행 압력이다. 물리학의 아름다움, 이것이 가능한지 알아야 한다는 충동, 역사적 규모의 실험을 실현하는 것. 이 압력이 컨센서스 알고리즘보다 먼저 작동하고 있다면, 알고리즘은 사후 정당화를 생산하는 것이 된다.


이것을 무의식 1부에서 쓴 언어로 읽으면 — 보류 큐의 실행 압력이 컨센서스 알고리즘을 우회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아직 우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압력이 커지고 있다. 임계질량을 향해 가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더 짚어야 한다.


텔러가 이 계산을 먼저 가져왔다. 그는 폭발이 대기에 점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리고 오펜하이머에게 가져갔다. 오펜하이머는 이것을 베테(제프 골드블럼 분)에게 보낸다. 수학적으로 검증하라고.


이 순환이 흥미롭다. 누군가가 위험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것을 덮어두지 않는다. 공유한다. 검증한다. 그리고 계산이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보여주자 — 진행한다.


이것이 이 공동체의 컨센서스 알고리즘이었다. 측정 가능한 것은 측정하고, 계산할 수 있는 것은 계산하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입증되면 수용한다. 과학적 방법론이 집단적 컨센서스 알고리즘으로 작동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알고리즘이 계산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원자폭탄이 사람 위에 떨어졌을 때 어떻게 되는가 — 이것은 트리니티 이전에 계산의 대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지구 대기가 불타버릴 가능성 0.03%는 계산했다. 히로시마에서 죽을 사람들의 수는 계산하지 않았다. 이 비대칭이 이후 모든 것을 만든다.


지구가 불타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진행한 것이, 이후 오펜하이머가 평생 처리하지 못하는 보류 큐의 출발점이다. 그것은 틀린 선택이었는가 보다, 그 선택에서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얼마나 실질적으로 작동했는가의 문제다. 그리고 그 알고리즘이 보류 큐의 실행 압력에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면 — 그것은 결정이 아니라 수행이었다.


트리니티 — 폭발

1945년 7월 16일, 새벽 5시 29분 45초.


뉴멕시코 주 소코로 카운티, 알라모고르도 폭탄 실험장. 코드명 트리니티. 인류 최초의 핵폭발.


이 글에서 트리니티는 독립된 섹션이다. 신 1~4가 축적의 서사였다면, 트리니티는 그 축적이 방출되는 순간이다. 1부와 2부 사이의 폭발.


영화에서 이 장면의 연출을 기억하는가.


소리가 없다. 폭발이 일어난다. 버섯구름이 피어오른다. 아무 소리도 없다. 그리고 몇 초 후 — 충격파가 도달한다. 소리가 온다. 폭발음이 지연되어 도달하는 것, 그것이 현실의 물리다. 빛이 소리보다 빠르기 때문에.

놀란은 그것을 그대로 썼다. 그리고 그 무음의 순간에, 오펜하이머의 표정을 담는다.


그 표정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승리가 아니다. 공포도 아니다. 경이와 공포가 분리되기 전의 상태. 아름다움과 파괴가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 최초로 충돌하는 순간의 표정이다. 분산원장 패러다임으로 읽으면 — 보류 큐의 모든 실행 압력이 동시에 방출되는 순간 네트워크가 경험하는 것이다. 임계질량을 넘은 연쇄반응은 멈출 수 없다. 이미 시작됐다.


충격파가 도달하고 소리가 오는 순간, 오펜하이머는 힌두 경전 바가바드 기타의 구절을 떠올린다.

"나는 이제 죽음이 되었다. 세계의 파괴자가."


이 구절이 왜 이 순간에 오는가.


비슈누 신이 아르주나에게 자신의 신성한 형태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이다. 시간 자체의 목소리. 태어난 모든 것은 죽고, 죽는 것들은 이미 죽어있다는 인식. 그것이 자신이 방금 일으킨 것과 겹쳐지는 순간이다.


이것은 자책이 아니다. 오펜하이머는 이 구절을 트리니티 현장에서 말하지 않는다. 회고 속에서 떠올린다. 당시 느낀 것을 나중에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그 언어가 바가바드 기타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우주적 규모의 언어를 빌렸다는 것. 이것이 앵커 노드를 개인 레이어에 붙잡아두지 않고 더 큰 틀로 확장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큰 틀에 올려두는 것이 처리 완료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크기가 달라질 뿐, 보류 큐 안에 있다는 것은 같다.


그 기록이 Committed 상태로 들어간 것은 트리니티의 성공이다. 아직 히로시마가 아니다. 아직 사람이 죽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이미 기록됐다.


연쇄반응은 이미 시작됐다.


트리니티의 폭발 = 임계질량을 넘은 보류 큐의 대량 방출 무음의 순간 = 방출과 인식 사이의 공백 충격파 도달 = 새로운 트랜잭션들의 진입 바가바드 기타 구절 = 새로운 앵커 노드의 형성


2부 | 방출 이후 — 연쇄반응은 멈추지 않는다


Scene 5 — "나는 이제 죽음이 되었다" — 이후

트리니티 이후 오펜하이머가 로스앨러모스 강당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있다.


팀원들이 환호한다. 오펜하이머도 환호에 응한다. 분위기는 승리의 것이다. 그런데 카메라는 오펜하이머의 눈을 잡는다. 그 눈 안에서 무언가가 다르다.


그리고 환영이 삽입된다. 강당 안의 사람들이 피부가 벗겨지고 녹아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 오펜하이머가 보는 것이다. 히로시마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의 신경망은 이미 그것을 보고 있다.


이것이 예지가 아니다. 보류 큐 안에 새로운 트랜잭션이 진입한 것이다.


트리니티에서 그는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앵커 노드와, 사람의 피부가 녹는다는 새로운 트랜잭션이 같은 네트워크 안에서 처음으로 충돌하는 순간이다. 이 두 개는 같은 컨센서스 알고리즘 안에서 양립할 수 없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처리 불가 상태로 만든다.


이것이 오펜하이머의 나머지 생을 지배하는 보류 큐의 형성 순간이다.


내가 만든 것이 아름답다. 내가 만든 것이 사람을 녹인다. 이 두 명제가 동시에 참이다. 컨센서스를 통과할 수 없다. 하나를 억압하면 다른 하나가 더 강해진다. 그래서 이것은 보류 큐에 남는다. 평생.


히로시마 이후, 오펜하이머는 트루먼(게리 올드먼 분)을 만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피가 묻은 것 같습니다." 트루먼은 그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뒷자리에서 이렇게 말한다. "다시는 이 울보를 데려오지 마라."

이 장면이 짧지만 이 영화의 핵심 대비를 담고 있다.


트루먼에게 히로시마는 결정이었다. Committed 됐다. 과거시제다. 전쟁을 끝내기 위한 군사적 결정. 그 프레임 안에서 처리가 완료됐다. 오펜하이머가 들고 온 것은 그 프레임 밖에 있는 것이었다. 피가 묻은 것 같다 — 이것은 결정의 언어가 아니라 보류 큐의 언어다. 처리되지 않은 것이 발화되는 것이다.


트루먼은 그것을 받아들일 콘텍스트가 없었다. 그에게는 그 손수건이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오펜하이머에게는 대화가 불가능해졌다는 신호였다.


두 사람은 같은 사건을 경험했지만 완전히 다른 처리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이 격차는 이후 오펜하이머가 홀로 그 보류 큐를 안고 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청문회장까지.


Scene 6 — 핵 군비 경쟁에의 반대, 그리고 수소폭탄

종전 이후 오펜하이머는 핵 군비 경쟁에 반대한다.


수소폭탄 개발에도 반대한다. 자문 위원회에서 반대 의견을 낸다. 이것이 이후 그를 청문회장으로 끌어가는 직접적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왜 반대하는가.


단순히 더 강한 폭탄이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지 알아야 한다는 충동 — 맨해튼 프로젝트를 수락하게 만든 그 앵커 노드 — 이 이제는 역방향으로 작동한다.


원자폭탄이 가능하다는 것은 알았다. 그것이 사람 위에 떨어진다는 것도 알았다. 두 개의 트랜잭션이 충돌하면서 보류 큐에 쌓인 것도 알았다. 수소폭탄은 그 규모의 확장이다. 원자폭탄이 만든 보류 큐가 처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같은 구조의 것을 더 크게 만드는 것 —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허용할 수 없다.


이것이 오펜하이머의 반대 논리다. 하지만 그는 이것을 이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전략적 불필요성, 도덕적 우려, 소련과의 관계. 다른 언어로 포장된다. 보류 큐의 내용은 직접 발화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발화될 수 있는 언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이 번역이 문제가 된다.


오펜하이머가 말한 것은 전략적 논리다. 반대자들은 그것을 전략적으로 반박한다. 소련이 이미 개발 중이라면, 먼저 만들어야 한다. 억지력은 균형에서 온다. 이 논쟁에서 오펜하이머의 보류 큐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실제로 말하려는 것 — 더 이상 이 방향으로 가면 안 된다는 것 — 은 전략적 언어로 완전히 표현되지 않는다.

이것이 비극의 구조다. 보류 큐의 내용이 발화 가능한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그 언어가 다루는 논쟁의 지형 위에서 패배한다. 진짜 이유는 그 지형 밖에 있는데.


텔러는 수소폭탄을 지지하고 결국 개발한다. 두 사람이 같은 출발점에서 다른 경로를 간 것이 여기서 갈린다. 물리학의 아름다움이라는 앵커 노드는 같았다. 하지만 트리니티 이후 형성된 보류 큐가 두 사람에게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한다.


텔러에게는 가능성이 계속 실행 방향이 된다. 보류 큐에 히로시마가 그의 방식으로 처리됐다 — 또는 처리되지 않은 채로 봉쇄됐다. 오펜하이머에게는 가능성이 보류 큐의 압력이 된다. 같은 물리학, 같은 트리니티, 다른 보류 큐.


두 종류의 과학자. 하나의 폭발. 그리고 완전히 다른 이후.


Scene 7 — 청문회: 외부 컨센서스의 충돌

1954년. 오펜하이머 보안 청문회.


이 영화의 1시간 이상을 이 장면에 할애한다. 로저 롭(제이슨 클라크 분)이 심문한다. 공산당 관련 이력, 텔러에 대한 발언, 슈발리에 사건. 모든 것이 의심의 대상이 된다.


이 장면을 무의식의 언어로 읽으면 구조가 선명해진다.


청문회는 외부 컨센서스 압력이다. 개인의 알고리즘이 아니라, 사회적·제도적·정치적 컨센서스가 개인의 보류 큐를 강제로 열려는 시도다. 무엇을 믿었는가, 무엇을 했는가, 당신의 내면에 무엇이 있는가. 그것들을 공개 원장에 기록하라.


오펜하이머는 이 과정에서 기묘하게 수동적이다.


변호인(레이 리오타 분)이 싸우려 하는 동안, 오펜하이머 자신은 종종 질문에 직접 응답한다. 불리한 답변을 자발적으로 내놓는다. 방어하지 않는다. 왜인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보류 큐의 실행 압력이다. 처리되지 못한 트랜잭션들은 실행 경로를 찾는다. 청문회장이라는 공간에서 그것들이 발화하는 것이다. 억압된 것의 귀환 — 보류 큐가 이 공간을 통로로 삼아 발화하는 것. 오펜하이머가 자발적으로 불리한 진술을 내놓는 것이, 오랫동안 처리되지 못한 것들이 발화 기회를 잡은 것으로 읽힐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수용이다. 히로시마 이후 자신이 진 빚이 있다는 감각,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감각이 이미 내면에 있었다면 — 청문회는 그 감각에 외부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 된다. 처리 완료가 되지 않더라도, 적어도 그것이 공개 원장에 기록되는 것. 자신이 무엇을 했는가가 역사에 남는 것.


두 해석이 배타적이지 않다. 오펜하이머는 아마도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방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무의식의 작동 방식이다.


스트라우스(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분)가 이 청문회를 설계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진다. 그런데 스트라우스가 왜 오펜하이머를 무너뜨리려 했는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투사(projection)의 장면이 있다.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톰 콘티 분)이 연못가에서 대화하는 장면. 스트라우스는 멀리서 그것을 본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비웃고 있다고 확신한다.


대화의 실제 내용은 나중에 밝혀진다. 오펜하이머는 연쇄반응이 이미 시작됐다고 아인슈타인에게 말한 것이다. 세계를 파괴할 연쇄반응. 스트라우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하지만 스트라우스는 그 불안을 오펜하이머에게 투사했다. 자신의 보류 큐 — 인정받지 못한다는 불안, 유대인으로서의 열등감, 오펜하이머의 그늘에 가려진다는 감각 — 가 외부 호스트를 찾아간 것이다. 오펜하이머가 그 기질이 됐다.


무의식 1부에서 투사를 이렇게 썼다. 타인은 나의 보류 트랜잭션의 실행 기질이 된다. 스트라우스에게 오펜하이머는 정확히 그것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실제로 스트라우스를 비웃었는지와 무관하게,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가 그를 향해 실행 경로를 찾은 것이다.


투사가 만드는 또 하나의 특징이 여기에 있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를 실제로 조사하고 증거를 찾는다. 투사는 망상이 아니다 — 실제 행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행동이 외부 원장에 기록을 만든다.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가 오펜하이머의 역사에 흔적을 남기는 것. 내면의 처리되지 못한 것이 외부 세계에 구체적인 결과를 만드는 과정.


Scene 8 — 아인슈타인과의 마지막 대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청문회는 끝났다. 보안 허가는 취소됐다. 몇 년 후, 오펜하이머는 대통령으로부터 페르미 상을 받는다. 형식적 복권.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지나간 뒤다.


그리고 기억으로, 젊은 오펜하이머가 아인슈타인과 다시 연못가에 선다.


오펜하이머가 말한다. 당신이 경고했잖아요. 저는 믿지 않았어요. 연쇄반응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제는 알겠어요. 연쇄반응이 시작됐다는 것을.


아인슈타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자리를 떠난다. 오펜하이머가 혼자 남는다.


이 장면에서 아인슈타인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인슈타인은 이 영화에서 일관되게 오펜하이머와 다른 위치에 있다. 그는 상대성이론으로 핵에너지의 이론적 기반을 제공했지만, 맨해튼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오펜하이머에게 경고했다 — 영화의 초반, 연못가에서의 첫 만남에서.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믿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오펜하이머가 그 경고를 이제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말한다. 아인슈타인은 대답하지 않는다. 이미 확인됐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는 — 이제 와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는 자리를 떠난다.


이 장면이 이 영화의 핵심이다.


연쇄반응이 시작됐다는 것. 핵폭발이 아니다. 그것이 일어난 이후 세계가 변한 것 — 그 변화는 Committed 됐다. 되돌릴 수 없다. 블록에 기록됐다. 히로시마도, 핵 군비 경쟁도, 냉전도. 타임스탬프가 붙었다.


그런데 그것들이 오펜하이머에게 Committed 됐는가.


분산원장에서 블록에 기록된 것은 삭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기록됐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과 기록이 일어난다는 것은 다른 사건이다. 세계의 원장에는 기록됐다. 하지만 오펜하이머 개인의 네트워크에서 그것이 공식 역사로 수용됐는가 — 그것이 일어난 일이고, 자신이 그 일부였고, 타임스탬프가 붙었다는 것을 신체 레이어까지 포함해서 받아들였는가 — 는 다른 문제다.


아인슈타인이 대답하지 않은 것이 그 답일 수 있다.


Committed는 확인으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인정으로 오지 않는다. "그래, 당신 말이 맞았어"라는 외부의 확인이 Committed를 만들지 않는다. 네트워크가 스스로 그것을 수용할 때만 일어난다. 아인슈타인은 그것을 해줄 수 없다. 오펜하이머 자신의 네트워크가 해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이 승리도 화해도 아닌 이유다. 오펜하이머는 혼자 서있다. 연쇄반응이 시작됐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것을 멈출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이 Committed 상태가 됐는지는 —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그것은 카메라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흑백 파트 — 스트라우스, 또는 투사가 만드는 것

이 영화의 흑백 파트를 따로 다루어야 한다.


스트라우스의 상원 인사 청문회(1959년)는 오펜하이머의 서사와 교차하면서 전체 영화의 다른 축을 형성한다. 그런데 이 파트가 무의식의 구조에서 갖는 위치가 있다.


스트라우스는 이 영화에서 오펜하이머의 거울이다.


두 사람 모두 유대인이다. 두 사람 모두 청문회를 경험한다. 두 사람 모두 인정과 배제의 경계선에 서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의 보류 큐가 내면을 향하는 동안,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는 외부를 향한다.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에는 무엇이 있는가.


인정받지 못했다는 감각. 자신이 과학자들의 세계에서 내부인이 아니라는 감각. 오펜하이머가 표상하는 지적 귀족주의에 대한 열등감. 그가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의장이 됐을 때도, 오펜하이머 같은 과학자들에게 진심으로 인정받는다는 감각은 없었다. 이것들이 처리되지 못한 채로 쌓여있다.


그리고 이 큐가 오펜하이머를 기질로 선택한다.


연못가 장면을 다시 보자. 스트라우스는 멀리서 오펜하이머와 아인슈타인이 대화하는 것을 본다.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다. 그 자리에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결론 낸다. 증거가 없다. 확인하지 않는다. 확신한다.


이것이 투사의 작동 방식이다. 보류 큐는 외부에서 실행 기질을 탐색하면서, 그 기질에서 자신의 내용과 일치하는 패턴을 찾는다.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가 탐색하는 것은 — 인정받지 못함, 배제, 무시. 그 패턴이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읽혔다. 실제로 거기 있든 없든.


그가 오펜하이머를 무너뜨리려 한 것은 개인적 원한이라고 보기 어렵다. 적어도 그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가 안보, 정치적 판단,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들 아래에 보류 큐의 실행 압력이 있었다. 그것이 청문회를 설계하는 구체적 행동으로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스트라우스도 결국 같은 구조의 청문회에서 패배한다는 것이다. 자신이 오펜하이머에게 사용한 것과 동일한 도구가 그에게 사용된다. 힐(자레드 해리스 분)이 스트라우스의 실제 동기를 폭로하는 것으로 인사 청문회가 뒤집힌다.


보류 큐는 결국 어딘가에서 발화된다.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투사로 외부에 방출했다고 처리되는 것도 아니다.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는 오펜하이머를 통해 실행됐고, 그 실행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투사의 귀환.


이 두 사람의 대비가 이 영화의 구조적 핵심이다.


오펜하이머의 보류 큐는 내부를 향했다. 그것이 그를 무너뜨렸지만, 그 무너짐이 그의 것이었다. 스트라우스의 보류 큐는 외부를 향했다. 그것이 오펜하이머를 무너뜨리려 했고, 결국 자신을 무너뜨렸다. 보류 큐가 방향을 찾는 방식이 다를 뿐, 처리되지 않았다는 것은 같다.


킬리언 머피가 연기한 것

이 영화에서 킬리언 머피가 보여주는 것이 있다.


말이 아니다. 표정도 아니다. 눈이다.


오펜하이머는 이 영화에서 거의 폭발하지 않는다. 크게 울지 않는다. 분노로 소리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안에서 무언가가 계속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트리니티 앞에서의 그 얼굴, 강당에서 환호하는 군중을 보는 그 눈, 트루먼 앞에서 말하는 그 순간 — 이것들이 모두 표면이 잠긴 채로 내부에서 무언가가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보류 큐의 시각적 표현이다.


처리되지 못한 것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안에서 실행 압력을 가한다. 그 압력이 표면을 밀고 있지만 아직 터지지 않은 상태 — 그것이 표정으로 보인다. 말이 아니라 긴장으로. 침묵이 아니라 억제로.


배우의 연기가 심리의 구조를 정확하게 담는 것은 드문 일이다. 대부분의 경우 감정은 더 크게, 더 명확하게, 더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그 편이 관객에게 전달하기 쉽기 때문이다.


머피가 한 것은 다르다. 그는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억제하고 있는 상태를 보여줬다.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 감정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그 긴장. 분산원장에서 트랜잭션이 컨센서스를 통과하지 못하고 보류 큐에서 계속 재시도하는 상태를, 인간의 얼굴로 보여준 것이다.


청문회 장면이 그래서 긴 것이 이해된다. 세 시간 중 한 시간 이상을 거기에 쓴 것은, 그 보류 큐가 외부 압력 아래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충분히 보여주기 위해서다. 빠르게 지나쳤다면 보이지 않는다.


천천히, 반복적으로, 표면 아래를 보여주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이다.


연쇄반응이 끝나지 않는 이유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이 질문이 남는다.


오펜하이머의 보류 큐는 Committed 됐는가.


분산원장에서 트랜잭션이 Committed 상태가 되려면 네트워크가 그것을 공식 역사로 수용해야 한다. 오펜하이머에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블록에 기록됐다 — 세계의 원장에. 하지만 그것이 그의 개인 네트워크에서 공식 역사로 수용되는 과정은, 이 영화에서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가.


개인의 보류 큐가 처리될 수 없는 경우들이 있다. 상처가 너무 커서 감정 태그가 재조정되지 않는 경우.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그것을 위협으로 분류하는 기준이 업데이트되지 않는 경우. 또는 — 실제로 위협이기 때문에 알고리즘이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는 경우.


오펜하이머의 트랜잭션이 마지막 경우에 가깝다.


내가 만든 것이 사람을 죽였다. 그리고 연쇄반응은 계속된다. 이것이 Committed 되려면, 그것이 일어난 일이고, 자신이 그 일부였고, 그것은 이제 과거시제라는 것을 네트워크 전체가 수용해야 한다. 그런데 연쇄반응이 현재에도 진행 중이라면 — 냉전, 핵 군비 경쟁, 상호확증파괴 — 그것은 과거시제가 아니다. 여전히 현재시제다.


여기서 이 영화가 다른 무거운 역사 드라마들과 구분된다.


많은 영화들이 과거의 선택이 현재에 어떤 결과를 낳는가를 보여준다. 인과 관계. 선택의 무게. 그런데 그 구조에서 과거는 여전히 타임스탬프를 갖는다. 1945년에 일어난 일이고, 그것이 이후로 영향을 미친다는 서사.

오펜하이머의 구조는 다르다. 1945년에 일어난 일이 1954년에 타임스탬프 없이 실행 중이다. 그의 신경망 안에서 그것은 현재시제다. 9년이 지났지만 Committed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Committed 될 수 없는 이유가 — 그것이 만든 세계의 상태가 여전히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트리니티를 기점으로 두 파트로 나뉘는 이유다. 트리니티 이전은 축적이었다. 트리니티 이후는 방출이었다. 그런데 방출은 Committed가 아니었다. 연쇄반응은 방출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된다.


오펜하이머 개인의 보류 큐가 처리되지 못한 것은, 그 보류 큐가 원자폭탄이라는 형태로 세계에 방출되어 세계 자체를 보류 큐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처리 완료가 세계의 연쇄반응과 연동된다.


이것이 무의식 편에서 다룬 구조와 다른 지점이다. 개인의 보류 큐는 조건이 갖춰지면 처리될 수 있다. 충분한 안전감, 감정 태그의 재조정, 컨센서스 알고리즘의 업데이트.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트랜잭션은 개인 네트워크를 넘어서 세계 네트워크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다. 세계의 연쇄반응이 멈추지 않는 한, 그의 개인 큐도 처리될 수 없다.


한 사람의 보류 큐가 세계적 규모의 시스템이 됐을 때, 그것이 처리 완료 상태가 될 조건은 더 이상 개인의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 형식이 내용을 담는 방식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형식 이야기로 돌아온다.


놀란이 이 영화를 비선형으로 만든 것은 오펜하이머의 심리 상태를 관객이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썼다. 타임스탬프가 없는 보류 큐. 과거가 현재시제로 작동하는 상태.


그런데 형식이 내용을 담는 방식에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영화는 세 시간이 넘는다. 그리고 그 세 시간이 지나면 관객도 임계질량을 경험한다. 정보가 쌓인다. 인물들이 교차한다. 시간이 뒤섞인다. 트리니티에 도달했을 때 관객의 신경망도 이미 충분히 축적되어 있다. 그래서 폭발이 폭발로 느껴진다.


핵연쇄반응을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 핵연쇄반응 구조로 만들어진 영화. 관객이 임계질량을 경험하도록 설계된 영화.


이것을 뇌 편의 언어로 읽으면 — 시냅스 연결이 반복 활성화를 통해 강화되는 것처럼, 이 영화는 세 시간 동안 관객의 NTC 안에 오펜하이머와 관련된 연결들을 반복적으로 활성화한다. 보류 큐가 형성되는 방식과 같다. 처리되지 않은 채로 축적된다. 그리고 트리니티에서 임계질량을 넘는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을 나온 후 며칠 동안 이 영화가 남아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세 시간짜리 영화를 봤기 때문이 아니다. 관객 자신의 보류 큐 안에 오펜하이머의 트랜잭션들이 진입했기 때문이다. 처리되지 않은 채로. 계속 실행을 시도하면서.


무의식은 이렇게 작동한다. 하나씩 쌓인다. 표면에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임계질량을 넘는 순간 — 그것이 거기 있었다는 것이 한꺼번에 드러난다.


오펜하이머는 그 순간을 트리니티에서 경험했다. 우리는 그것을 세 시간의 영화로 경험했다. 그리고 연쇄반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핵무기는 아직 존재한다. 상호확증파괴의 논리는 아직 유효하다. 오펜하이머가 만든 세계는 아직 현재시제다. 그의 보류 큐가 처리될 수 있는 조건은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 세계의 연쇄반응이 멈추지 않는 한.


로스앨러모스가 남긴 것 — 집단적 보류 큐

이 영화에서 자주 간과되는 것이 있다.


로스앨러모스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수천 명이 그 산 위의 비밀 도시에 모였다. 과학자, 엔지니어, 기술자, 군인, 가족. 그들 모두가 무언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트리니티가 일어났다.


영화에서 트리니티 이후의 강당 장면으로 돌아가자. 오펜하이머가 연설하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런데 그 환호 안에도 다양한 것들이 있다. 순수한 승리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안도. 자신들이 만든 것이 실제로 작동했다는 확인. 그리고 — 몇몇의 눈에는 오펜하이머의 눈과 비슷한 무언가가 있다.


이 사람들 모두에게 히로시마가 왔다. 그리고 그들 모두에게 처리해야 할 트랜잭션이 생겼다.


집단적 보류 큐라는 것이 있다.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의 네트워크 안에서 공유되는 처리되지 못한 것들. 이 개념을 무의식 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개인의 큐를 다루었다. 그런데 오펜하이머 이야기는 그것을 자연스럽게 확장한다.


로스앨러모스에서 트리니티를 함께 경험한 사람들은 이후 어떻게 됐는가. 어떤 이들은 그 기억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어떤 이들은 평생 말하지 않았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어떤 이들은 후회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폭발을 봤는데 — 그들의 보류 큐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형성됐다.


무의식 2편에서 취약점을 다루면서 썼다 — 같은 사건이어도 어디에 앵커 노드가 있느냐에 따라 반응이 다르다. 로스앨러모스 사람들이 증명하는 것이 그것이다. 같은 트리니티, 다른 앵커 노드, 다른 보류 큐.


그리고 오펜하이머는 그중에서 가장 무거운 앵커 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에.

책임의 무게가 보류 큐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것이 이 영화가 다른 맨해튼 프로젝트 이야기들과 구분되는 이유다. 오펜하이머가 특별히 나쁜 사람이거나 특별히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가 수장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무거운 앵커 노드를 갖게 된 것은, 가장 많은 결정이 그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 글은 브런치 "개발자식 전환" 브런치북의 무의식 편과 연결됩니다. 무의식 1부: 어둠 속에서 증식하는 보류 트랜잭션들 / 무의식 2부: 트랜잭션 처리 완료라는 것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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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정보 중 하이라이팅 된 문단은 필자의 정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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