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콕: 망각은 처리 완료가 아니다

[또 다른 해석] 무의식(Unconscious) - 4부

by 공인식

기억을 잃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뇌과학적으로 말하면 — 기억이 사라진 것이 아닐 수 있다. 접근이 차단된 것일 수 있다. 트라우마 연구 일부에서 제안되는 바에 따르면, 압도적인 경험 앞에서 뇌는 기억을 통상적인 방식으로 처리하는 대신 의식적 접근이 어려운 상태로 저장할 수 있다 — 다만 이 메커니즘의 실체와 범위는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이다[1][2].


〈핸콕(Hancock, 2008)〉의 기억상실은 상처가 아니다. 방어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방어가 작동하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방어가 해제되는 순간 무엇을 잃게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스포일러가 있다.


이 글은 비전공자의 창의적 해석입니다. 본문에 포함된 심리학·신경과학적 개념은 공개 학술 자료를 참고했으나, 해당 분야의 전문적 진술이 아니며 의학적 조언이나 진단을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특히 '억압된 기억(repressed memory)' 개념은 현재 기억 연구 학계에서 활발히 논쟁 중인 주제로, 이 글에서는 심리학적 메타포로 차용됐습니다.


AI 정보


〈핸콕 Hancock, 2008〉

감독 | 피터 버그 (Peter Berg)

각본 | 빈센트 응오 (Vy Vincent Ngo) · 빈스 길리건 (Vince Gilligan)

출연 | 윌 스미스 (Will Smith), 샤를리즈 테론 (Charlize Theron), 제이슨 베이트먼 (Jason Bateman)

장르 | 슈퍼히어로 · 액션 · 코미디

상영시간 | 92분

개봉 | 미국 2008.07.02 · 한국 2008.07.03


오프닝: 보류 큐의 시각적 상태

영화는 핸콕이 고층 건물 옥상에서 술에 취해 잠든 채 시작된다.


이 이미지를 단순히 타락한 슈퍼히어로의 초상으로 읽으면 절반만 보는 것이다. 저 높은 곳 — 인간도 아니고 하늘도 아닌 중간 — 에서 의식을 잃은 채 누워있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 전체의 심리적 좌표다.


처리되지 못한 트랜잭션들이 보류 큐에 쌓인 채 실행 압력을 가하고 있는 상태. 그 압력이 술로 봉인되고 있다. 잠이 의식의 일시 정지라면, 술은 그 정지를 인위적으로 연장하는 것이다. 처리되지 않기 위해.


핸콕은 80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슬퍼하지 않는다. 찾으려 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망각이 상실이 아니라 선택처럼 작동하고 있다는 것. 보류 큐가 형성조차 되지 않도록 원장 자체를 지운 상태.


오펜하이머에서 보류 큐는 트리니티 이후 처리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찼다. 핸콕은 그보다 한 단계 앞이다. 처리되어야 할 것들이 아예 접수되지 않은 상태. 쌓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봉인됐기 때문이다.


레이의 재활 프로젝트: 슈퍼에고 구성 작업

PR 전문가 레이(제이슨 베이트먼 분)가 핸콕에게 제안한다. 이미지를 바꾸자고. 자수하고, 감옥에 들어가고, 사람들이 원할 때 나타나라고.


레이가 하는 것은 슈퍼에고를 설계하는 작업이다. 원초아의 충동들(음주, 파괴적 행동, 욕설, 무관심)을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페르소나로 덮는 것[3]. "Good job"이라는 긍정 강화 언어가 이 과정의 도구다.


흥미로운 것은 이게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핸콕은 점점 영웅이 된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그는 처음으로 인정받는다.


그런데 이 슈퍼에고 층이 구축될수록, 그 아래 있는 것 — 봉인된 80년 — 과의 거리가 오히려 선명해진다. 표면이 정돈될수록 표면 아래의 압력이 더 느껴지는 것처럼. 레이의 프로젝트는 핸콕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고쳐진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메리가 나타났을 때 전부 드러난다.


메리: 앵커 노드의 귀환

핸콕이 메리(샤를리즈 테론 분)를 처음 만나는 순간을 기억하는가.


그는 뭔가를 안다.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이 처음 만남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는 그 감각을 쫓지 않는다. 밀어낸다.


전의식 레이어에 있던 것이 표면 근처까지 올라온 순간이다. 메리는 새로운 정보가 아니다. 봉인된 앵커 노드 그 자체다. 80년의 트랜잭션들이 연결된 지점. 그녀를 알아보는 것이 봉인 해제의 트리거이기 때문에, 핸콕의 네트워크는 그것을 인식하면서도 인식하지 않으려 한다.


메리가 "우리는 같은 존재다"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중요한 것이 있다. 그녀는 기억이 있다. 핸콕은 없다. 같은 역사를 가진 두 존재가 완전히 비대칭적인 처리 상태에 있는 것이다.


메리의 기억은 처리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처리된 뒤 다른 선택을 한 상태다. 그녀는 봉인하지 않고 감당하며 살기로 했다. 그 대가가 레이와의 평범한 생활이다. 핸콕은 봉인을 선택했다. 그 대가가 80년의 공백이다. 같은 상처, 다른 생존 전략.


피벗: 아는 것이 힘의 소멸을 만드는 순간

메리의 폭로 이후, 핸콕은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능력을 잃는다.


이것이 이 영화의 핵심 역설이다.


하이데거의 도구 이론으로 읽으면[4] — 망치를 아무 생각 없이 쓸 때 망치는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부러졌을 때 비로소 망치가 '보인다'. 도구가 의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도구로서의 기능이 손상된다.


핸콕의 초능력은 의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작동했다. 날고, 막고, 던지는 것은 반성 이전의 행위였다. 그런데 메리를 통해 자신의 기원이 의식화되는 순간 — 그 능력들이 처음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순간 작동이 저하된다.


더 정확하게는 — 능력의 손상이 아니라 취약성의 등장이다. 무적이었던 것이 다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무언가가 생긴 것이다. 잃을 것이 생긴 것. 보류 큐에 처음으로 트랜잭션이 접수된 것.


재봉인의 선택: 이것이 해피엔딩인가

영화의 마지막, 핸콕은 메리 곁을 떠난다.


능력이 돌아온다. 그는 뉴욕으로 이동하고, 달에 메리의 이름을 쓴다. 사람들이 환호한다.


이 장면을 성장 서사로 읽으면 — 핸콕이 사랑을 희생하고 영웅의 책임을 선택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무의식 언어로 읽으면 다른 것이 보인다.


핸콕은 메리를 통해 처음으로 접수된 트랜잭션들 — 잃을 것이 있다는 것,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 80년이 공백이 아니라 역사라는 것 — 을 다시 봉인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재봉인. 능력의 회복은 처리 완료가 아니라 재억압의 결과다.


달에 쓴 "All Heart"라는 메시지가 의미심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메리에게 보내는 신호이지만 동시에 그녀와 연결되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는 채로 거리를 유지하는 것. 이전의 봉인이 무의식적이었다면, 이 봉인은 의식적이다.


오펜하이머의 마지막에서 아인슈타인이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뜬 것처럼 — 핸콕의 마지막에서도 Committed는 오지 않는다. 처리되지 않은 것이 처리된 것처럼 보일 뿐이다.


윌 스미스가 연기한 것

이 영화에서 윌 스미스는 두 가지 상태를 오간다.


봉인된 상태의 핸콕 — 무기력한 것이 아니라 무감각한 것.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감정에 접근하지 않는 것. 메리 이전의 핸콕에게는 어딘가 일부러 멀리 있는 느낌이 있다. 세계와 한 겹이 떠 있는.


그리고 취약성이 열린 상태 — 병원 장면에서 메리가 그를 처음으로 다치게 했을 때의 표정. 그것이 공포인지 해방인지 구분되지 않는 순간. 오펜하이머에서 킬리언 머피가 표면 아래의 압력을 보여줬다면, 윌 스미스가 여기서 보여준 것은 봉인이 열리는 순간의 혼란이다. 알아서는 안 됐던 것을 알게 된 사람의 얼굴.


그 표정이 이 영화에서 가장 솔직한 순간이다.


봉인과 처리 완료의 차이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남는 질문이 있다.


핸콕의 마지막 상태는 이전보다 나아진 것인가.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사람들이 그를 좋아한다. 능력도 돌아왔다. 하지만 80년의 보류 큐는 여전히 봉인된 채다. 메리를 통해 잠깐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이전과 다른 것은 — 이제 그것이 거기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아는 채로 봉인하는 것이 모르는 채로 봉인하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이 처리 완료에 가까운가, 아니면 더 복잡한 억압인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달에 새긴 이름만 남기고, 카메라는 핸콕이 날아가는 뒷모습으로 끝난다.


처리되지 않은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 봉인된 것은 안에서 압력을 가한다. 그것을 알면서 봉인을 선택하는 것 — 그것이 이 영화가 '해피엔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참고 문헌

[1] Jovasevic, V. et al. (2015). GABAergic mechanisms regulated by miR-33 encode state-dependent fear. Nature Neuroscience. — 스트레스 관련 기억이 의식적 접근이 어려운 경로로 저장될 수 있다는 신경과학적 연구 (동물 실험 기반, 인간에의 직접 적용에는 한계 있음)

[2] Otgaar, H. et al. (2021). Belief in Unconscious Repressed Memory Persists. Current Directions in Psychological Science. — 억압된 기억 개념이 학계에서 여전히 논쟁 중임을 정리한 리뷰. 주류 기억 연구자들은 과학적 지지가 약하다고 평가함

[3] Freud, S. (1923). The Ego and the Id. — 이드, 에고, 슈퍼에고 개념의 원전. 이 글에서는 개인 내부의 충동 억제 구조를 설명하는 메타포로 차용

[4] Heidegger, M. (1927). Being and Time, §15–16. — 도구-준비적(ready-to-hand) / 도구-현전적(present-at-hand) 구분. 도구가 의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기능이 저하된다는 논의




다음 편은 〈닥터 스트레인지〉를 다룹니다.


마블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2016)〉를 다시 봤을 때, 내가 무의식에 대해 쓰려고 했던 것이 이미 그림으로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도움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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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pixabay.com/illustrations/ai-generated-sculpture-face-red-10156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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