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커: 폴리 아 되 — 우리에겐 환상밖에 없었다

[또 다른 해석] 무의식(Unconscious) - 9부

by 공인식

AI 정보


이 영화는 실패작이라고 불린다.


개봉 직후 평점이 무너졌다. 팬들이 등을 돌렸다. 흥행이 참패했다. 비평가들은 뮤지컬 형식이 어색하다고 했고, 서사 동력이 없다고 했고, 전편의 배신이라고 했다. 2024년 최악의 속편 중 하나로 꼽혔다.


그런데 이 반응들이 전부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가.


비평가도 팬도 모두 말했다. "내가 기대한 것이 없었다." "전편이 만들어준 것을 이어받지 않았다." "조커다워야 할 조커가 그러지 않았다." 이 반응들의 공통점은 내용 판단이 아니다. 앵커 노드의 좌절이다. 전편이 관객의 내면 어딘가에 고정시켜 놓은 것이, 속편에서 지지받지 못했다.


Todd Phillips는 이것을 알고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 이 영화는 그것을 알고 만들었다는 증거들로 가득하다.


〈조커: 폴리 아 되(Joker: Folie à Deux, 2024)〉는 속편이 아니다. 전편이 관객의 보류 큐 안에 만들어놓은 것을 거울로 돌려주는 영화다. 그리고 그 거울을 관객이 거부하는 반응이 — Phillips의 진단이 맞았다는 증거가 된다.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다. 〈조커: 폴리 아 되〉의 여섯 장면을, 집단 보류 큐가 호스트를 선택하고 소비하고 폐기하는 방식으로 다시 읽는 시도다.


스포일러가 있다.




Phillips의 형식이 먼저다

전편을 떠올려보자.


〈조커(2019)〉는 무엇을 했는가. 아서 플렉(호아킨 피닉스 분)이라는 인물을 통해 — 무시당하고, 착취당하고, 웃음거리가 되고, 존재가 지워지고 — 결국 폭발하는 서사를 보여줬다. 이 서사가 10억 달러를 벌었다.

왜인가. 좋은 연기 때문만이 아니다. 이 서사가 충분히 많은 사람의 보류 큐와 공명했기 때문이다. 아서의 분노는 아서의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것이기도 했다. 무시당한 경험, 세계에서 자신이 지워지는 감각, 그것이 언젠가 폭발할 것 같은 압력 — 이것들이 이미 보류 큐 안에 있던 사람들에게 조커라는 페르소나는 실행 기질이 됐다.


전편은 관객의 보류 큐에 앵커 노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앵커 노드의 이름이 Joker였다.


속편에서 Phillips가 한 것은 그 앵커 노드를 직접 건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강화가 아니라 해체다.


형식이 먼저 이야기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영화는 뮤지컬처럼 보인다. 아서와 리(레이디 가가 분)가 노래를 부른다. 법정이 무대가 된다. 화려한 의상이 등장한다. 그런데 Phillips는 이것을 뮤지컬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음악이 흐르는 것은 아서가 말하고 싶은 것을 말로 할 수 없을 때다. 노래는 언어가 되지 못한 것이 흘러나오는 형식이다.

무의식 편의 언어로 읽으면 이것은 정확하다. 뮤지컬 시퀀스는 아서의 보류 큐가 시각화된 것이다. 처리되지 못하고 발화될 수 없어서 노래와 춤의 형태로 변환된 것들. 현실 레이어에서는 아서가 법정에 앉아 있다. 뮤지컬 레이어에서는 아서의 보류 큐가 실행 기질을 찾아 무대 위를 달린다.


닥터 스트레인지 편에서 미러 디멘션을 이렇게 썼다. 현실과 겹쳐있지만 현실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 레이어. 전의식이 그렇게 생겼다고.


이 영화의 뮤지컬 시퀀스가 그것이다. 현실 레이어와 겹쳐있는 보류 큐의 레이어. 조건이 맞으면 현실로 나오려 하고, 그러지 못하면 그 안에서만 실행된다. 그래서 뮤지컬이 끝날 때마다 아서는 다시 법정 의자에 앉아 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채로.


형식이 내용이다. 이것을 이해하고 나면 이 영화의 모든 장면이 다르게 보인다.


Scene 1 — 오프닝 애니메이션: 그림자가 먼저 등장하는 이유

영화는 애니메이션으로 시작한다.


루니 툰 스타일의 짧은 단편. 아서 플렉이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조커다. 그림자가 아서 대신 무대에 오른다. 그림자가 공연한다. 아서는 그 옆에서 지운다. 경찰이 들이닥친다. 그림자가 다시 아서에게 합쳐진다. 아서가 맞는다.


이 짧은 애니메이션이 영화 전체의 구조를 미리 말해주고 있다.


조커 페르소나는 아서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림자다. 아서가 말하지 못했던 것들, 처리하지 못했던 것들이 응결된 형태. 그것이 아서보다 더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더 많은 사람이 그것에 반응한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한다.


그런데 그림자는 아서를 대신하지 못한다. 무대가 끝나면 그림자는 다시 아서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아서가 경찰에게 맞는다. 그림자를 대신 내보낸 결과가 아서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이것이 이 영화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조커 페르소나는 아서의 보류 큐가 만들어낸 그림자다. 그것은 아서 안에 있지만, 아서가 아니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진짜로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그림자를 사랑한다. 아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전편에서 관객도 그 그림자를 사랑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그것을 처음 5분 만에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관객이 이 장면에서 불편함을 느꼈다고 한다. "분위기가 맞지 않는다"라고. 그 불편함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영화가 끝날 때 더 선명해진다.


Scene 2 — 리가 아서를 찾은 이유

리 퀸젤은 수감자가 아니었다.


영화 중반, 재판이 진행되면서 밝혀지는 것이다. 그녀는 부유한 가정 출신의 심리학 전공 학생이었다. 힘든 과거, 학대받은 어린 시절, 이유 없는 수감 — 아서에게 털어놓은 것들이 전부 만들어낸 이야기였다. 그녀가 아캄으로 들어온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조커를 직접 만나기 위해.


이것이 처음에는 집착이나 범죄 낭만화로 읽힌다. 그런데 오펜하이머 편에서 썼던 스트라우스의 구조로 읽으면 다른 층위가 보인다.


스트라우스는 오펜하이머가 자신을 비웃고 있다고 확신했다. 확인하지 않았다. 그 확신이 보류 큐의 실행 압력이었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감각, 내부인이 되지 못한다는 감각이 오펜하이머를 투사의 기질로 선택했다.

리가 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그녀의 보류 큐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영화는 직접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구조로 읽을 수 있다. 세계에 분노하는 누군가,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방식으로 폭발하는 누군가 — 그 앵커 노드에 리의 처리되지 못한 것들이 클러스터링 됐다. 조커 페르소나가 그 앵커 노드의 이름이 됐다.


그녀는 아서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자신의 보류 큐를 실행시켜 줄 기질을 선택한 것이다. 그 기질의 이름이 마침 조커였다.


무의식 1부에서 썼다. 보류 큐는 외부에서 실행 기질을 탐색한다. 타인은 내 보류 큐의 실행 기질이 된다. 리가 아서를 찾아온 방식이 그것의 교과서적 형태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그것이 어디 있는지도 알았다. 아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아서는 — 처음에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알아채고 싶지 않았을 수 있다. 누군가 자신이 아닌 조커 페르소나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그것도 진짜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지를. 그는 리를 사랑했다. 리는 조커를 사랑했다.


이 비대칭이 이 영화의 핵심 비극이다.


Scene 3 — 뮤지컬 시퀀스들: 발화될 수 없는 것의 형태

법정 장면들 사이사이에 뮤지컬 시퀀스들이 삽입된다.


아서와 리가 함께 노래한다. 법정이 무대가 된다. 판사와 검사가 코러스처럼 움직인다. 색이 바뀌고 조명이 달라진다. 그리고 컷이 바뀌면 아서는 다시 피고석에 앉아 있다.


이 시퀀스들이 왜 불편했는가. 장르 혼합의 어색함이라고 비평들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뮤지컬 시퀀스 안의 아서와 현실 레이어의 아서가 완전히 다른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불편하다. 무대 위에서 그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느끼고 싶은 것을 느끼고,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 현실에서 그는 변호사에게 끌려다니고, 증인에게 무너지고, 교도관에게 맞는다.


이 대비가 보류 큐의 실제 경험이다.


보류 큐 안의 트랜잭션들은 실행 압력을 갖는다. 그것들이 실행될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 아서에게 그 공간이 뮤지컬 레이어다. 현실에서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차단하는 것들 — 분노, 사랑, 존재하고 싶다는 욕구 — 이 뮤지컬 안에서 실행된다. 타임스탬프 없이, 결과 없이, 안전하게.


그런데 뮤지컬이 끝나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법정은 계속된다. 교도관은 계속 그를 때린다. 보류 큐는 뮤지컬 안에서 가상으로 실행됐을 뿐, Committed 되지 않았다. 반복 재생된다.


리가 뮤지컬 시퀀스 안에서 아서를 이끄는 방식도 이 맥락에서 읽힌다. 그녀는 아서의 보류 큐가 실행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녀가 그 공간에서 반응하는 것은 아서가 아니라 조커다. 뮤지컬 안의 아서는 조커처럼 움직이고 조커처럼 노래한다. 리는 그것에 반응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가장 슬픈 구조다. 아서의 보류 큐가 유일하게 실행될 수 있는 공간에서도, 그는 자신으로 실행되지 못한다.


Scene 4 — 법정에서 아서가 조커를 포기할 때

영화의 전환점은 법정 장면에서 온다.


친구 리키가 교도관에게 죽는 것을 아서가 듣는다. 아무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서는 다음 날 법정에서 변호사를 해고하고 자신이 변론에 나선다.


그가 한 말은 이것이다. 조커는 없다. 항상 아서 플렉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살인을 자신이 저질렀다. 어머니를 포함해서 여섯 명.


리가 법정을 떠난다. 지지자들이 법정을 떠난다.


이 장면을 처음 보면 — 아서가 진실을 말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읽힌다. 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무너진 것으로 읽힌다. 둘 다 맞다. 하지만 패러다임의 언어로 읽으면 세 번째 층위가 있다.


아서는 Committed를 시도한 것이다.


무의식 2부에서 썼다. Committed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타임스탬프가 붙는 것이다. 그 일은 일어났고, 그것은 이제 과거시제다. 실행 시도가 멈추는 것. 아서가 법정에서 한 것이 정확히 그것이다. 조커라는 그림자를 포기하고 — 그것들은 내가 했다, 나 아서 플렉이 했다 — 라고 말하는 것. 타임스탬프를 붙이는 것.


그런데 Committed는 외부의 확인으로 오지 않는다. 오펜하이머 편에서 썼다. 아인슈타인이 "맞아"라고 말해줘도 Committed가 되지 않는다. 네트워크 자체가 수용해야 한다.


아서의 선언도 마찬가지다. 그가 말로 "조커는 없었다"라고 해도 — 그의 네트워크가 그것을 수용해야 한다. 그리고 법정 안의 관객들 — 리, 지지자들, 심지어 교도관들 — 은 그것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이 수용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반응한다.


이것이 이 장면이 비극인 이유다. 아서가 Committed를 시도한 순간, 그 시도가 그를 둘러싼 모든 것에 의해 거부된다.


조커를 포기한 것이 아서를 자유롭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완전히 고립시켰다. 보류 큐는 여전히 처리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실행시켜 줄 기질도 사라졌다.


Scene 5 — 리가 아서를 떠날 때

법정 밖, 조커의 계단.


아서가 리를 찾는다. 차량 폭탄이 법원을 날리는 혼란 속에서 탈출한 아서는 리를 향해 간다. 그리고 리는 말한다.


"우리가 가진 건 환상뿐이었는데, 당신이 그걸 포기했다."


이 문장이 이 영화에서 가장 정직한 문장이다.


리는 아서를 사랑한 적이 없었다. 그녀는 조커를 사랑했다. 아서가 조커를 포기한 순간 — 기질이 기능을 잃었다. 보류 큐는 더 이상 그 호스트를 통해 실행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그녀는 떠난다.


이것은 냉혹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류 큐의 작동 방식이 냉혹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작동하는 방식이 이렇다. 기질은 기능을 위해 선택된다. 기능이 사라지면 기질도 사라진다.


오펜하이머 편에서 썼던 스트라우스의 구조와 대비된다. 스트라우스는 보류 큐를 오펜하이머에게 투사하고, 그것을 파괴하려는 행동으로 이어갔다. 리는 다르다. 그녀는 기질을 소비하고, 기질이 기능을 잃으면 돌아선다. 파괴하지 않는다. 그냥 없애버린다.


아서에게 이것이 오펜하이머가 청문회장에서 경험한 것과 구조적으로 겹친다. 자신이 무엇인지를 말하려는 순간, 그것이 외부에 의해 수용되지 않는다. 차이가 있다면 — 오펜하이머는 세계 원장에 기록이 남았다. 아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조커도 아니고 아서도 아닌 채로.


Scene 6 — 새 수감자가 아서를 죽이는 방식

마지막 장면이다.


아서는 다시 아캄으로 돌아갔다. 복도를 걷다가 젊은 수감자를 만난다. 그가 농담을 시작한다.


"바에 정신병자와 광대가 들어왔는데—"


그리고 그는 아서를 반복해서 찌른다.


아서가 바닥에 쓰러진다. 그 수감자는 뒤로 물러나 앉아, 자신의 볼에 칼을 댄다. 그리고 웃음을 새긴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직접적인 진술이다.


아서를 죽인 수감자는 조커를 원했다. 아서가 조커를 포기한 것에 대한 반응이다. 그는 조커를 죽인 아서에게 분노했다. 그리고 자신이 새 조커가 됐다.


오펜하이머 편에서 썼다. 보류 큐는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의 호스트를 통해 실행되지 못하면 다른 호스트를 찾는다. 아서라는 호스트가 기능을 잃자, 집단 보류 큐는 새 호스트를 만들었다.


그 새 호스트가 직접 자신의 볼을 찢는다. 조커 페르소나를 스스로 새기는 것이다. 외부에서 붙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택한 것으로. 아서가 조커를 포기한 것과 정반대로.


이 결말이 왜 이토록 차갑게 느껴지는가.


아서의 Committed 시도가 아무 의미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조커를 포기한 것은 그의 네트워크 안에서 어떤 변화를 의미했다. 하지만 집단 원장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조커 페르소나는 아서를 통과해서 다른 노드로 이동했을 뿐이다. 타임스탬프가 아서에게 붙지 않았다. 연쇄가 계속됐다.


오펜하이머가 연쇄반응은 멈출 수 없다고 말했을 때 — 아서도 그것을 몸으로 경험했다.



집단 보류 큐라는 것에 대하여

이 글을 쓰기 위해 조커 속편의 리뷰들을 찾아보면 공통점이 있다.


"전편을 배신했다." "조커다워야 할 조커가 없다." "뮤지컬이 맞지 않는다." "아서가 조커를 포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잘못됐다."


이 반응들에서 패턴이 보인다. 부정되는 것은 영화의 완성도가 아니다. 앵커 노드가 건드려지는 것이다.


전편이 만든 것이 있었다. 조커 페르소나가 분노와 소외의 언어로 기능한다는 것. 그것이 수백만 명의 보류 큐 안에서 앵커 노드가 됐다. 세계에 무시당하고 지워지는 감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조커라는 이름의 클러스터가 형성됐다.


속편은 그 클러스터를 해체하려 했다.


리가 관객을 대리한다. 그녀가 아서가 아닌 조커를 사랑한 것처럼 — 관객이 아서 플렉이 아닌 조커 페르소나를 사랑했다. 아서가 법정에서 "조커는 없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리가 떠나는 것처럼 — 관객이 등을 돌렸다.

Phillips의 진단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당신이 사랑한 것은 조커가 아니었다. 당신 자신의 보류 큐가 투사된 형태였다. 아서 플렉이라는 인물의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이 폭발하는 순간의 쾌감이었다.


그 진단을 영화로 만들었을 때 관객이 분노했다.


그 분노가 — 진단이 맞았다는 증거가 된다. 자신의 보류 큐가 반사된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는 것. 조커가 진짜가 아니라 자신의 처리되지 못한 것들의 형태였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다는 것.


무의식 1부에서 썼다. 보류 큐의 내용을 직접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래서 우회 경로를 찾는다. 기질을 찾는다. 투사한다. 속편이 그 우회 경로를 차단하려 했을 때 — 차단 시도 자체가 보류 큐의 저항을 촉발했다.

이것이 집단 보류 큐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개인의 보류 큐는 내부에 있다. 집단 보류 큐는 공유된 앵커 노드를 통해 여러 네트워크에 분산되어 있다. 조커 페르소나라는 앵커 노드가 수백만의 보류 큐를 연결하는 허브가 됐다. 그 허브가 공격받자 — 네트워크 전체가 반응했다.


오펜하이머 편에서 로스앨러모스 이야기를 하면서 집단 보류 큐를 짧게 건드렸다. 같은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처리되지 못한 것들. 조커의 경우는 같은 사건이 아니라 같은 영화가 그 출발점이 됐다. 그런데 구조는 동일하다. 공유된 앵커 노드, 그 위에 클러스터링 된 개인들의 보류 큐들, 그리고 그 앵커 노드가 흔들릴 때의 집단적 저항.


집단 보류 큐가 개인 보류 큐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개인 보류 큐는 조건이 갖춰지면 처리될 수 있다. 충분한 안전감, 감정 태그의 재조정. 그런데 집단 보류 큐는 한 사람이 처리해도 다른 노드들이 남아있다. 아서가 Committed를 시도했다. 새 수감자가 조커를 이어받았다. 하나의 호스트가 처리를 완료하려 해도 — 집단의 처리되지 못한 것이 새 호스트를 찾는다. 연쇄가 끊기지 않는다.


이것이 이 영화가 속편이 불가능하게 끝나면서도 — 조커 페르소나는 여전히 존재하는 방식으로 끝나는 이유다. 새 수감자가 볼에 웃음을 새기는 것. 집단 보류 큐는 아서가 죽어도 살아있다. 호스트가 교체됐을 뿐이다.


형식이 내용을 담는 방식 — 그리고 관객에게 돌아오는 것

이 글을 마치면서, 다시 형식 이야기로 돌아온다.


뮤지컬 시퀀스가 왜 불편했는가. 장르 혼합 때문이 아니라고 썼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뮤지컬 레이어의 아서는 자유롭다. 현실 레이어의 아서는 자유롭지 않다. 이 둘이 같은 화면 안에 교차할 때 — 관객은 어느 쪽에 동일시해야 하는지 모른다. 전편에서 관객은 조커의 폭발에 동일시했다. 그것이 선명했기 때문에 앵커 노드가 됐다.


속편의 뮤지컬은 그 동일시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뮤지컬 안의 아서에게 반응하면 — 그것은 보류 큐의 가상 실행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뮤지컬이 끝나면 아서는 다시 법정에 앉아 있다. 함께 들어간 관객도 다시 의자에 앉혀진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채로.


오펜하이머가 세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극장 밖에서 며칠을 따라다니는 이유를 썼다. 관객 자신의 보류 큐 안에 오펜하이머의 트랜잭션들이 진입했기 때문이다.


조커 2가 불편한 이유도 같은 구조다. 이 영화는 관객의 보류 큐에 진입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의 보류 큐를 가리킨다. "당신 안에 이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는 것을.


그 가리킴을 견디기 어려울 때 — 영화가 나쁜 것이 된다. 뮤지컬이 어색한 것이 된다. Phillips가 실패한 것이 된다.


그 반응 자체가 이 영화가 말하려 했던 것의 증거다. 폴리 아 되 — 공유된 망상 — 는 그것을 지적받았을 때 가장 강하게 저항한다.


아서 플렉은 죽었다. 조커는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은 화면 밖에도 살아있다.




이 글은 브런치 "개발자식 전환" 브런치북의 무의식 편, 그리고 오펜하이머 편과 연결됩니다.

무의식 1부: 어둠 속에서 증식하는 보류 트랜잭션들

무의식 2부: 트랜잭션 처리 완료라는 것에 대하여

무의식 3편: 닥터 스트레인지 — 무의식은 이렇게 생겼다

무의식 4편: 오펜하이머 — 임계질량을 넘은 보류 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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