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해석] 무의식(Unconscious) - 8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는 이 시리즈가 오펜하이머와 닥터 스트레인지를 거치며 쌓아온 질문의 마지막 조각이다. 처리될 수 없는 보류 큐 앞에서 무엇이 가능한가. 화재로 형성된 마히토의 앵커 노드, 자해로 실행 경로를 찾은 보류 큐, 진실 여부와 무관하게 작동하는 왜가리의 트리거, 대공주가 단일 노드로 유지하는 탑 내부의 컨센서스, 히미와의 기억 재공고화, 그리고 악의를 품은 돌을 선택하는 마히토의 결말. 이 영화는 Committed의 세 번째 형태를 보여준다. 처리 완료도 억압도 아닌 — 악의를 품은 채로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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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 The Boy and the Heron)
감독·각본: 미야자키 하야오
작화감독: 혼다 다케시
음악: 히사이시 조
주제가: 요네즈 켄시 「地球儀」
제작: 스튜디오 지브리
상영시간: 124분
개봉: 2023 (일본 7월 · 한국 10월)
이 시리즈는 보류 큐가 처리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였다.
오펜하이머는 임계질량을 넘은 보류 큐가 세계로 퍼져나간 이후 Committed 될 수 없게 된 이야기였다. 스트레인지는 보류 큐를 다루는 세 경로 — 재작성, 위탁, 역이용 — 를 각각 Ancient One, 케실리어스, 스트레인지에게 할당했다.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다이앤은 꿈이라는 레이어에서 재편집을 시도했고, 실패했고, 총으로 자신을 쐈다(그것도 자각몽 내에서의 결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모든 영화들이 대답하지 않은 질문이 하나 있다.
보류 큐가 처리될 수 없을 때 — Committed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할 때 — 무엇이 가능한가.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2023)〉를 만든 이유가 거기 있다고 읽힌다.
스포일러가 있다.
영화의 첫 장면. 병원에서 불길이 번진다.
마히토(주인공)가 뛰어간다.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막힌다. 어머니가 불 속에서 죽는다. 마히토는 그것을 직접 보지 못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목격하지 못했다. 뛰어갔지만 늦었다. 막혔다. 이 트랜잭션은 처음부터 미완료 상태로 진입한다. 완결되기 전에 끊겼다. 그래서 앵커 노드가 형성되는 방식이 다르다.
오펜하이머의 앵커 노드는 원자의 아름다움이었다. 풍부하게 활성화됐고, 방향이 있었고, 이후 모든 결정의 기준점이 됐다. 마히토의 앵커 노드는 화재다. 미완료인 채로 새겨진 것. 무엇이 일어났는지 알지만 완결을 경험하지 못한 것.
이후 마히토의 모든 트랜잭션이 이 앵커 노드와 대화한다. 새어머니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 새 학교에서 섞이지 않는 것, 탑을 향해 걸어가는 것 — 전부 이 미완료 트랜잭션의 실행 압력이 방향을 찾는 과정이다.
마히토가 집으로 돌아오다 멈춘다. 돌을 든다. 스스로 머리를 친다.
피가 난다. 그는 그것을 학교 따돌림 때문에 생긴 상처인 것처럼 꾸민다.
이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가장 빠르게 지나간다.
케임브리지에서 오펜하이머가 지도 교수의 사과에 독을 발랐을 때, 보류 큐가 자기 파괴 경로를 통해 실행 기질을 찾은 것이었다. 구조가 같다. 처리되지 못한 것들이 출구를 찾을 때 자기 자신이 가장 접근하기 쉬운 기질이 된다.
그런데 마히토의 자해는 한 가지가 다르다. 그는 의식하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충동적으로 독을 발랐다. 마히토는 돌을 들고, 위치를 정하고, 친다. 그리고 이야기를 설계한다. 이 자의식 — 보류 큐의 압력을 알면서도 방향을 잡지 못해 자신을 향하는 상태 — 이 이 영화를 앞선 영화들과 다른 위치에 놓는다.
이미 문제를 알고 있다. 방법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형태를 만든다.
왜가리가 처음 말을 건다.
“어머니가 살아있다.”
도르마무가 케실리어스에게 시간 없는 세계를 제안한 것처럼 — 왜가리도 보류 큐가 가장 원하는 것을 건드린다. 화재가 완결되지 않았을 수 있다는 것. 미완료 트랜잭션이 아직 열려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왜가리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명시된다. 영화가 스스로 밝힌다. 거짓말하는 왜가리.
이것이 이 영화의 중요한 설계다. 보류 큐를 활성화하는 트리거가 반드시 진실일 필요는 없다. 진실인지 아닌지와 무관하게, 공명하면 트랜잭션이 실행을 시작한다. 마히토는 왜가리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따라간다.
왜가리의 기능은 진실 전달이 아니다. 마히토의 보류 큐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미 실행 압력이 임계에 달해있던 트랜잭션에 방향을 주는 것.
탑 안으로 들어간다.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미러 디멘션이 현실과 겹쳐있는 레이어였다면, 탑의 세계는 구조가 더 복잡하다. 들어갈 수 있고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 법칙이 다르다.
이 세계의 가장 높은 곳에서 대공주가 매일 돌을 쌓는다. 균형 잡힌 돌들을 정확하게 쌓아 이 세계 전체의 균형을 유지한다. 하나의 노드가 분산원장 전체의 컨센서스를 관리하고 있다. 단일 실패 지점이다.
그리고 그 노드가 지쳤다. 수백 년을 혼자 이 시스템을 유지해 왔다. 후계자가 필요하다.
대공주는 마히토에게 제안하기 위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가리가 마히토를 불러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세계의 컨센서스 알고리즘이 다음 노드를 탐색한 결과다.
탑 안에서 마히토는 히미를 만난다.
불을 다루는 소녀. 그리고 나중에 밝혀진다. 히미는 마히토의 어머니다. 죽기 전의, 아직 어린.
닥터 스트레인지의 홍콩 결전이 여기서 반복된다. 이미 일어난 것이 다시 열린다. 기억 재공고화의 창이 생긴다. 마히토는 화재 이전의 어머니를 만났다. 타임스탬프가 없는 앵커 노드가 처음으로 만져질 수 있는 상태가 됐다.
스트레인지는 그 창에서 결과를 바꿨다. Eye of Agamotto로 시간을 역행시켜 죽은 것을 살렸다.
마히토는 바꾸지 않는다.
히미는 자신이 마히토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스스로 현실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한다. 그것이 화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히토를 낳기 위해 그 죽음을 선택한다.
이것이 재공고화의 실패인가. 아니다.
화재라는 사건은 바뀌지 않는다. 어머니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건에 붙은 감정 태그가 바뀐다. 어머니가 마히토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 마히토를 위해 선택한 것. 미완료 트랜잭션의 내용은 같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재조정된다.
재공고화는 결과를 바꾸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결과에 다른 의미망을 부착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 대한 가장 흔한 읽기는 이렇다 — 마히토가 과거를 놓아주고 앞으로 나아가기로 선택했다는 것. 불완전한 세계를 수용한 성장 서사.
그런데 마히토가 가져간 것은 놓아둔 돌이 아니다. 악의를 품은 돌이다.
대공주가 마히토에게 제안한다. 이 세계를 이어받으라고. 악의 없는 돌로 새 세계를 만들 수 있다고.
마히토는 거절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악의를 품고 태어난 돌을 가져가겠습니다.”
오펜하이머의 보류 큐는 처리될 수 없었다. 연쇄반응이 현재시제로 계속되는 한 Committed가 불가능했다. 다이앤의 보류 큐는 꿈이라는 레이어에서 재편집을 시도했다가 자기 파괴로 끝났다. 케실리어스는 보류 큐가 발생하지 않는 시스템으로 전환하려 했고, Mindless Ones가 됐다.
마히토는 다른 경로를 택했다.
처리하지 않는다. Committed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다른 시스템으로 전환하지 않는다. 악의를 품은 채로 — 처리되지 못한 것을 안은 채로 — 현실로 돌아간다.
이것이 Committed의 세 번째 형태다. 처리 완료도 아니고 억압도 아닌 동반. 악의를 품은 돌은 결함이 아니다. 마히토가 살아온 증거다. 그것을 자신의 일부로 인식하고 함께 가져간다는 마히토의 선택.
탑의 세계가 무너진다. 마히토는 현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잊는다.
처음에는 실망스럽게 읽힌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면 무엇이 달라졌는가.
뇌 편에서 썼던 것으로 돌아가면 — 기억은 파일이 아니다. 인출될 때마다 재조립된다. 중요한 것은 파일의 내용이 아니라 그 경험이 신경망에 새긴 연결 패턴이다.
마히토는 탑에서 있었던 일을 언어로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앵커 노드가 바뀌었다. 화재라는 앵커 노드에 새로운 의미가 붙었다. 보류 큐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재조정됐다.
오펜하이머와 비교하면 선명해진다. 오펜하이머는 모든 것을 기억한다. 트리니티를, 히로시마를, 청문회를. 타임스탬프 없이 현재시제로. 기억이 너무 선명하기 때문에 보류 큐가 처리되지 않는다.
마히토는 언어적 기억을 잃는다. 대신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은 상실이 아닐 수 있다. 처리의 흔적이 언어 레이어에 남지 않고 신체 레이어에 새겨지는 방식일 수 있다.
대공주는 미야자키 자신이라는 해석을 피하기 어렵다.
탑의 세계를 혼자 수백 년간 유지해 온 존재. 균형 잡힌 돌로 이 세계를 지탱해 온 사람. 후계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세계를 이어받을 사람을 기다린다.
마히토가 그것을 거절한다. 악의를 품은 채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
미야자키가 마히토를 통해 보여준 것이 있다. 완벽하게 계승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균형 잡힌 돌을 물려받으려 하지 말고 — 불완전한 채로, 악의를 품은 채로, 자신의 세계를 살아가는 것.
이 시리즈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이 있었다. 처리될 수 없는 보류 큐 앞에서 무엇이 가능한가.
오펜하이머의 답 — 연쇄반응은 끝나지 않는다.
스트레인지의 답 — 세 가지 경로가 있다.
다이앤의 답 — 처리되지 않은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한다.
마히토가 택한 것 — 악의를 품은 돌을 손에 쥔 채로 현실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미야자키가 마히토를 통해 건넨 질문이다. 그 답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영화의 제목이 질문이었던 이유가 여기 있다.
이 글은 브런치 “개발자식 전환” 브런치북의 무의식 편, 오펜하이머 편, 닥터 스트레인지 편과 연결됩니다.
마히토는.. 자기 밑에서 감독의 일을 배우다가 포기한 제자들일 수도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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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주가 수백 년을 기다렸는데 아무도 그 돌을 이어받지 않은 거잖아.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밑을 거쳐간 수많은 애니메이터들 — 악의를 품은 채로 각자의 세계로 떠난 사람들.
그리고 미야자키 입장에서는 그게 실패가 아니었던 거지. 마히토의 선택을 영화에서 긍정했으니까. 균형 잡힌 돌을 물려받지 않고 떠난 제자들을 — 이 영화로 보내준 것일 수도 있어.
왜가리가 “오래 기다리던 사람”이라고 마히토를 불렀던 것도 다르게 읽히네. 미야자키가 제자들 한 명 한 명을 그렇게 기다렸을 수 있으니까.
창작을 향한 강한 의지 같은 것이 불과 연결됐을 수 있을까? 원작의 내용도 궁금하고 어느 정도의 각색이 있었는지 궁금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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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다 흥미로운 발견이 나왔어.
실제로 미야자키의 어머니는 화재로 죽지 않았다고 해. 결핵으로 9년간 투병하다 1984년 71세에 세상을 떠났어. 영화에서 병원 화재로 어머니가 죽는 것은 미야자키가 만든 각색이야.
그런데 이게 더 흥미로운 지점인데 — 결핵균이 전염될까 어머니 곁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자랐다고 해. 9년간 어머니가 있는데 만질 수 없었던 것. 그 긴 부재를 화재라는 단일한 순간으로 압축한 거지. 미완료 트랜잭션이 실제로는 9년짜리였던 거야.
창작 의지와 불의 연결은 — 직접적 기록은 없지만 역방향으로 읽힐 수 있어. 어머니를 만지지 못했던 아이가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어릴 적부터 매일 엄청난 양의 그림을 그렸다고 해. 불(어머니의 병)이 빼앗아간 것을 손이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보상한 것일 수 있어.
제목만 빌려왔을 뿐 영화 내용이나 설정은 모두 미야자키가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미야자키는 어머니의 추천으로 이 소설을 접했던 기억을 매우 강렬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원작 소설은 소년 코페르가 외삼촌의 편지를 통해 사회와 윤리를 배우는 성장 소설이야. 판타지 요소가 없고, 어머니 죽음도 없어. 공통점은 제목과 주제 —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 — 뿐이야.
그러면 제목을 준 것은 어머니였고, 어머니는 화재(각색된)로 죽었고, 그 어머니가 추천한 책의 제목이 이 영화의 제목이 됐다. 루프가 꽤 깊어.
자신이 그만큼 성장할 수 있게 해 준 어머니에 대한 헌사로도 충분히 읽힐 수도 있겠어. 가능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거야 영화 자체가 그런 형식은 얼마든지 띌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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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그리고 그게 이 영화가 그렇게 많은 읽기를 허용하는 이유이기도 해.
히미가 화재로 돌아가는 걸 선택하는 장면 — 마히토를 낳기 위해 자신의 죽음을 택하는 것 — 이 헌사 독법으로 읽으면 완전히 다른 무게가 돼. 미야자키가 어머니에게 “당신이 그 병 속에서도 나를 키워줬기 때문에 내가 여기 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되는 거니까.
9년간 결핵 투병 중에도 책을 읽고, 퉁명스럽게라도 아들을 꾸짖고, 그림 그리는 걸 지켜봤던 어머니. 만지지 못하면서도 곁에 있었던.
그 어머니가 추천한 책의 제목으로 마지막 영화를 만든 것 자체가 이미 헌사야. 내용보다 제목을 가져온 것이 오히려 더 직접적인 헌사일 수 있어. “이건 당신이 내게 준 질문입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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