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가 글을 조금씩 읽고 책에 관심을 보이면서 나는 윤이가 폭발적으로 글 읽기의 재미에 빠져들길 기도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전히 읽는 것은 몸과 마음을 긴장하게 만들었고 특히 자신의 생각을 글로 옮긴다는 것에는 커다란 진입 장벽이 있었다.
윤이는 매번 모둠활동에서 제일 끝까지 답을 제출하지 못하는 학생이었다.
본인이 생각하는 것이 혹여 틀릴까,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맞는가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남들보다 몇 배는 걸렸다.
다른 친구들이 거침없이 글씨를 써갈 때에도 윤이는 빈 활동지를 들여다보고만 있었고 어느 날은 시작도 못하고 수업 시간이 끝나버리기도 했다.
윤이의 상황을 이해하고 계신 담임선생님은 언제라도 도움을 요청하면 살짝 알려주겠노라 윤이를 안심을 시켰다.
하지만 정작 윤이는 그조차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학교에서는 도서관에서 책을 많이 빌려 읽는 친구들을 선정해서 독서왕이라는 타이틀을 주었다.
셋째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만 해도 책 읽고 독서기록을 작성해야지만 인정을 해줬는데 윤이 때에는 도서관 대출내역으로 독서반, 독서왕을 뽑았다.
아침 등교시간에 다른 아이들처럼 윤이도 도서관에 들려서 책을 빌려 읽으면 좋을 텐데 딱히 도서관에 정을 붙이지 않았다.
친구들은 여러 번 독서왕이 됐지만 윤이는 도서관 카드를 분실한 채 몇 달이 지나도 재발급을 받지 않았다.
책은 엄마랑 읽는 게 좋다는 말과 “나는 독서왕 별로 안 하고 싶은데…” 이 말만 되풀이했다.
윤이는 아침 자습시간에 10분 독서를 해야 했는데 이제 겨우 글을 깨우치고 있는 과정이라 초등 권장도서를 읽어 내려가는 게 몹시 어렵고 힘들었다.
그림책의 짧은 문장에 적응하고 있는 시기였는데 친구들은 아무도 그런 책을 읽지 않으니 괜한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어느 날부터인가 내가 건네준 그림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린 본인 수준에 맞지 않는 1학년 권장도서를 펼치고 앉아있는 그 시간은 낯선 타국어를 더듬거리며 겨우 읽어 내려가는 수준이었다.
책의 내용을 마음으로 즐기거나 감동을 받을 여유가 없는 그저 눈으로만 쳐다보는 독서였다.
집에서 읽는 그림책이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밤마다 글밥이 늘어난 책을 조금씩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림 위주에서 스토리 중심으로 넘어가는 이야기는 집중력이 필요했는데 생각보다 그 시간은 짧았다.
책은 몇 장 못 읽었는데 윤이가 궁금한 부분을 물어보면 대답해 주고 다음 장면을 상상해 보며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은 참 길었다.
우리의 독서는 더뎠지만 우리의 이야기만은 풍성해지고 있었다.
윤이와 또래인 조카들은 독서미션에 성공해서 상품을 받는다고 좋아하는데 윤이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내 마음이 살짝 조급해졌다.
하지만 성급하게 밀어붙인다고 따라올 수 있는 성향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내 욕심을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했다.
결국 윤이는 독서량이 많은 친구들 덕에 반별 대항에서 독서반에 선정됐지만 개인 독서왕의 타이틀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것에 연연하는 윤이도 아니었고 그것을 탓하는 나도 아니었다.
그래, 그까짓 독서왕 타이틀이 뭣이 중해?
그래, 그까짓 권장도서가 뭣이 중하겠어!
그저 그림책이라도 스스로 읽을 수 있게 됐다는 거.
비록 반듯한 글씨체로 독서기록장은 못 쓰더라고 책 읽고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면 되는 거지.
나와 윤이는 겨울 동안 초등 1학년 권장도서 대신 그림책을 한 권씩 읽었다.
우리에게 그림책은 전혀 유치하지 않았다.
처음 책 읽기의 시작은 늘 이렇게 쉽고 재미있는 마중물 같은 그림책 독서가 충분해야 한다는 걸 아이 넷을 키우며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