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와 함께 추가해 보는 삶의 단어들

[읽고 쓰는 삶 209일 차] 메리 루플 산문집 <가장 별난 것>

by 윤서린

오늘은 좀 늦은 아침을 시작한다.

새벽 3:30분에 잠이 깨서 뒤척이다가 새벽독서하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깨어있는 두 딸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며칠 병원에 입원해서인지 왜 이렇게 누군가를 붙잡고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건지. 입에 모터가 달려 나보다 한 발치 앞서가는 것 같다.


뒤척이다 잠시 잠이 들었는데 6시에 알람이 울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자기로 했다.

208일째 아침, 나는 새벽독서 대신 나에게 휴식을 선물하기로 한다.

이번에 아프면서 "무리하지 않는다"가 내 삶의 중심에 들어왔다.

아프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아버려서 그런 것 같다.

아픈 게 겁이 나는 나이가 되었다.


7시 반쯤 일어나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처방받은 항생제와 약을 먹은 후 어슬렁어슬렁 책장에서 책을 살펴본다.

비가 오니까 뭔가 감상에 젖고 싶어지는 아침이라 시인의 산문을 고른다.


메리 루플 산문집 <가장 별난 것>

메리 루플 : 1952년생 시인, 에세이스트, 퓰리처상 최종 후보 및 전미도서상 후보에 오른 <던스>를 비롯 십여 권의 시집을 냈다. 이 산문집은 시인이 되고 30년 만에 출간한 첫 산문집이다.


책 사이즈도 아담하고 손에 잡히는 촉감이 단단해서 마치 질 좋은 나무 조각을 만지는 느낌이다.

이 느낌을 사랑하기 때문에 전자책으로 못 넘어가고 매번 책을 산다.

표지, 종이의 촉감, 텍스트의 배열, 줄 긋는 희열, 휘리릭 넘길 때 느끼지는 엄지손가락의 미세한 떨림. 나의 흔적과 작가의 문장이 만나는 시간, 만나지 못했지만 시공간을 초월해 공유된 우리의 감각들. 나는 그것들을 사랑한다.


검정 배경에 다양한 모양의 유성체가 떠다니는 듯한 모습의 표지 디자인이 눈에 들어온다.

<가장 "별" 난 것>의 "별"과 유성체가 무한한 세상 속 작은 생각의 조각들처럼 느껴진다.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나는 섹스를 하고 싶다.


맨 앞의 <눈>이라는 글의 첫 문장이다.

잠이 확 깬다.

오늘은 비가 와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작가를 검색해 본다.

이렇게 대담한 문장의 주인인 중년의 여성작가는 흑백 사진 속 미소가 아름답다.

다음 이어지는 문장을 읽는다.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눈 내리는 날의 새와 무덤에 대한 이야기다.

'섹스'라는 일상적인 행위를 빌어 사랑하는 존재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작가는 그 관계 속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다른 세상의 것들을 자신의 마음으로 불러들인다.


"나는 폭설이 내릴 때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새들이 모두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진다. (...) 눈이 내리는 동안 깊숙이 몸을 숨긴 채, 눈에 무감하지는 않되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히 받아들이는, 온기를 얻기 위해 깃털 덮인 머리를 수그린, 타고난 나름의 용감한 방식으로 눈을 견디는 새들을." (14면)


그러게. 이렇게 비 오는 날 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뒷집 옥상 난간에 앉아서 쉬던 물까치도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한동안 먹이가 풍부해 우리 집 새 모이통에 놀러 오지 않았던 참새들이 궁금해 어제 모처럼 새 모이를 놓아줬는데 지금 내다보니 새 모이가 비에 다 젖어있다. 이렇게 비 오는 날 새들은 무슨 생각으로 비를 바라보고 있을까. 새들도 인간을 생각하고 있을까.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처럼.

겨울이 되면 참새들이 우리 집 창문에 달린 새 모이통에 들릴 것이다. 그때 그 답을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혼잣말은 쓸쓸하니까.



나는 무덤 위로 내리는 눈을 지켜보는 것이 좋다


눈이 급히 내리고 있을 때조차
평온한 느낌이 드는 건,
잠든 이들이 평온하기 때문이다.


무덤 위에, 관 위에 떨어지는 눈송이들을 떠올려 본다.

아무래도 그런 풍경은 일본영화 <러브레터>의 첫 장면과 연결된다.

온 세상이 하얗게 덮인 설원에서 연인의 추도식에 참석한 여주인공의 모습, 눈 밭에 누워 숨을 참다 깊게 뱉어내는 하얀 입김 속에서 그리움도 뱉어내는 듯한 느낌에 담담한 슬픔에 젖는다. 물론 최근에 실제 영화의 여주인공이 죽은 후 재개봉한 영화를 보며 그 장면에서 눈물이 터져 나오긴 했지만...


"눈이 땅에 대한 불변의 헌신을 보이며 내리면, 세상의 모든 근심은 사라진 듯하고 연인 품에 안겨 깊이 파묻힌 나처럼 세상도 침대에 깊이 파묻힌 듯하다. 그래, 이렇게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나와 함께 고립과 정적 속에 든 것만 같다." (16면)


눈이 내리고 온 세상이 하얗게 되면 이 세상이 흰 이불을 덮고 침대에 깊이 파묻힌 것 같다는 작가의 말에 포근한 미소가 어린다. 세상의 고립과 정적이 싫지 않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세상이 빗물 샤워를 하는 중일까? 여름을 씻어내고 가을을 맞이하는 새단장중인것 같다.


"눈"이라는 계절감에 "섹스"라는 단어가 나란히 붙는 낯선 경험, 자연 속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들의 무력함, 그리고 휘몰아지는 눈발 속에서도 평온할 수 있는 존재에 대한 환기.

역시 비오는 날 시인의 산문을 읽는건 옳은 선택이다.



가을비가 오는 아침, 몇 개의 단어들을 내 삶에 추가해 본다.

시인의 산문

비에 젖은 새의 깃털

나무 수피에서 묻어나는 나무와 가을비의 뒤엉킨 냄새

따뜻한 차 한잔과 사람의 온기

빗물 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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