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삶 296일 차] 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나는 스케치북과 연필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연필 끝을 통해 전해지는 켄트지의 촉감과 그것이 사각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거기서 허용되는 자유 그 위에서 달팽이처럼 천천히 움직일 수 있고, 마냥 멈춰 있을 수 있고, 또 언제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사랑한다. 딱딱한 A4 용지에 볼펜으로 쫓기듯 써 내려가는 공문서 같은 글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자유가 거기 있다.
_안규철 <사물의 뒷모습>
노트 한 페이지를 자신의 손글씨로 채울 수 있는 사람, 요즘은 그런 사람이 귀하다. 특히 만년필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은 더더욱.
나 또한 만년필에 대한 로망이 있다.
펜촉에 잉크를 축여가며 신중하게 종이 위를 돌아다니는 만년필. 나는 사각사각 거리는 종이와 만년필의 하모니가 좋다.
펜촉을 잘 관리하고 잉크를 채우는 행위, 만년필과 어울리는 노트를 선택해서 정갈하게 글을 써 내려가는 신중 하면서도 여유로운 손놀림. 그 느림이 좋다. 그래서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내 눈에 그 무엇보다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자신의 정신과 마음을 펜촉 끝으로 모아서 종이로 흘려 내보내는 사람, 누군가의 마음에 잉크 한 방울 떨어뜨려 그의 세상을 온통 푸르게 물들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