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환승역에서 ]

[읽고 쓰는 삶 299일 차]

by 윤서린

책에서 찾은 빛나는 문장


세상의 일상은 무사하다. 그 무사함 안에 팩트들이 들어 있다. 팩트는 암혹한 칼이다. 정확하고 용서가 없다. 이 칼의 무심함에 나는 기록을으로 맞선다. 기록은 사랑이다. 사랑은 희망이다. 문득 파란 버스가 풍경 안으로 들어와서 정류장에 선다. 그리고 떠난다. 카프카의 마지막 일기가 맞았다. “모든 것들은 오고 가고 또 온다.”

_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윤서린의 마음으로 쓰는 이야기


[ 인생의 환승역에서 ]


초행길, 목적지로 향하는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늦을 것 같다. 분명 예상 시간에 맞춰 나왔는데 미처 환승할 버스의 도착 시간 간격을 염두하지 못한 탓이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넣으며 잠시 생각에 빠진다.


인생에도 환승 타이밍이 존재할까?

40대의 끝, 나에게 잠깐의 대기시간이 생긴 것 같다.


내 삶을 이곳까지 태워다 준 버스에서 내릴 결심을 하고 하차벨을 누른 것은 다름 아닌 나다. 이대로 타고 가면 무난한 인생의 끝에는 도착할 테지만 늘 같은 자리에 서서 늘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가야 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부대낌 속에서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 다른 풍경과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40년 넘게 타고 달려온 버스에서 내리기로 결심한다.


인생의 환승역에서 낯선 풍경 속, 낯선 사람들과 함께 다음 버스를 기다린다. 마음에 끌리는 버스가 올 때까지. 내가 오르는 버스에 몇몇은 같이 올라타고 몇몇은 다른 버스를 기다린다. 이미 버스에 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내 자리를 찾아본다. 비어있는 누군가의 옆자리에 편히 앉아갈까, 풍경이 보이는 창문가면 더 좋고. 그렇지만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는다. 나는 넘어지지 않게 적당한 손잡이와 기둥을 찾는다.


편안함도 잠시 내 주위에 사람들이 붐빈다. 다시 삶은 복작거리고 나는 조금 지친다. 하차벨을 찾고 있다. 아무래도 다음 버스로 갈아타야 할 것 같다.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문으로 몸을 튼다. 나와 방향이 같은 사람들인 걸까. 곧 다음 정류장이 다가온다. 한적한 들판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는 정류장. 나는 그곳에 내리기로 한다. 굳이 다음 버스의 시간표를 보지 않는다. ‘급할 것 없지…’ 혼자맛을 뱉으며 나는 우두커니 인생의 버스정류장에 서서 흐릿한 칸막이 사이로 비치는 나를 들여다본다. 그곳에 비친 미래의 내가 조금은 들뜬 얼굴로 말한다. ‘곧 새로운 버스들이 도착할 거야, 그런데 굳이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직행버스만 타려고 하지는 마. 네가 예상하지 못한 몇몇 곳을 경유해 보는 것도 꽤 괜찮은 경험일 거야. 만약 도중에 내리고 싶어지면 목적지가 아니어도 겁내지 말고 하차벨을 눌러. 남이 데려가는 곳이 아니라 네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봐.’


나는 손에 든 인생버스의 낡은 티켓을 본다. 운이 좋으면 30년 정도 이 여정을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제는 나를 위해 아낌없이 환승하며 새로운 곳, 더 먼 곳까지 가봐야지. 운이 좋아 몇몇의 소중한 사람들과 같이 타고 내릴 수 있다면 더 좋고. 나는 오늘도 주머니 속의 티켓을 만지작 거린다. 곧 내가 타야 할 버스가 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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