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작가의 글을 좋아한다. 박완서의 글은 구김살도 허례허식도 없는 순한 무던함 속에 날카롭게 벼려진 시각이 잠재한다. 6.25라는 굴곡의 세월을 직격으로 돌파하며 '글을 쓰기'로 한 굳건하고 강건한 결심이 그녀를 글쓰기로 이끌었기에 그럴 것이다. 글쓰기란 박완서 작가의 사명이자 숙명, 시대의 특명이므로.
400페이지에 육박하는 에세이집인 이 책에서 작가는, 자연, 시골, 고향에 대한 희붓하고 아련한 그리움을 그리면서도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당당히 시인한다. 또한 개인으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삶, 소박하고 정갈한 살림, 일제강점기와 6.25를 통해 남겨진 상흔에 대한 증언, 가족에 대한 사랑을 아낌없이 고백한다.
대부분의 글이 7~80년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고착되어 버린 분단의 아픔, 성차별, 물질만능주의 등에 대한 문제들이 이 책을 통해 다시 우리에게 제기된다. 좋은 책을 읽으면 꼭 이 질문이 따라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 것인가?" 사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들이 쓰이고도 반백년을 그 답을 찾아 헤맸으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정답대로 살고 있는가?" 도저히 끄덕여지지 않는 고개가 누구에겐가 송구하다.
그러나 내 속엔 항상 6.25의 상처가 욱신거리고 있었다. (p.42)
법 대신 편법을, 원칙 대신 변칙으로 사는 걸 은연중 권장하는 사회는 뭔가 잘못된 사회다.(p.136)
그렇지만 이광수의 가야마 미쓰로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서할 수는 없다. 그가 작가였기에, 침묵만 했어도 독자들에게 감사와 용기를 줄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p.247)
오래 행복하고 싶다. 오래 너무 수다스럽지 않은, 너무 과묵하지 않은 이야기꾼이고 싶다. (p.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