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기인데여행기는아닌그렇지만여행기가맞긴한아무튼방콕에있는나의얘기
2025.2.10.
방콕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전날 편의점에서 산 간단한 야식과 맥주를 마시면서 넷플릭스를 보다 잠들었는데도 아침 7시가 되자마자 눈이 번쩍 떠졌다. 출근할 때나 이렇게 쉽게 일어나면 좋을 텐데. 일찍 일어난 김에 늦지 않게 조식을 챙겨 먹고 여행을 시작했다. 차와 오토바이로 가득 찬 도심 중앙의 도로, 아침밥을 파는 노점들, 바쁘게 지하철을 타러 가는 사람들. 한국과 도로 방향이 반대인 탓에 모든 차 머리가 내 쪽으로 향해있다. 나는 내가 가야 하는 길을 가는 것뿐인데, 왠지 모르게 가야 하는 길을 거슬러 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침에 꽤 오랜 시간을 걸으며 이 ‘거스르는 기분’을 계속 추적했다. 이 기분을 파헤쳐보니 흐뭇하고도 애틋하며, 왜인지 조금 으스대고 싶으면서도, 한편에는 묘한 긴장감이 서렸다. 말하자면 모두가 어떠한 세력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는 와중에 나는 아무런 쓸모와 책임이 없는 일개의 객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느낌이었다. 월요일 오전 9시, 당연하게도 모두가 자기 자리에 있다. 그러나 나의 일터는 직선거리로만 3,000km 이상을 날아가야 하는 곳에 있다. 나는 내 자리에 서는 대신, 정착하지 못한 객에게 내어주는 타국의 일부를 마냥 걷고 있었다.
차라리 목적지가 있었더라면. 아니면 나에게 더 많은 시간이 있었더라면. 나는 관광객이라고 하기에는 관광을 하지 않았고, 거주자라고 하기에는 방콕에 있는 시간이 너무 적었다. 문득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곳에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럴 땐 오로지 걸으려고 방콕에 온 사람처럼 걷는 수밖에 없었다. 걷다 보면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 마냥 맑지 않은 도시의 매캐한 공기, 귀를 가득 메우는 온갖 소음들이 내가 방콕에 있음을 깨닫게 했다. 나는 이렇게 걸으면서 나의 목적을 반드시 증명하지 않고도 이곳에 있을 수 있었다.
이 밖에도 나는 다양한 이유로 걸었다.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기 위해, 붐비는 대중교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주한 휴식과 노곤한 여행을 감상하기 위해, 반기지 않을 냄새를 기억하기 위해, 소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해가 진 후 땅이 가진 열기를 쐬기 위해, 전 세계에서 탄소발자국을 찍으며 날아온 이들과 죄책감을 나누기 위해.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운 날씨에도 도시 곳곳의 땅을 꼼꼼히 밟고 걸으며 목적 없는 발자국을 남긴다. 눈에 익어 낯섦이 사라진 도시를 다시 바라본다. 거스르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이 도시가 낯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