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서평

데미안은 내 첫사랑이었다.

by 티라노
그 시기에 나는 눈이 먼 듯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내 안에서 폭풍이 일어났고, 걸음마다 위험이었다. 내 앞에는 심연의 어둠 말고는 다른 어느 것도 보이지 않았는데, 지금까지의 모든 길이 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지고 있었다. 내면에는 데미안과 비슷한 안내자의 모습이 보였으며, 그의 눈길 안에 내 운명이 서 있었다.



《데미안》은 내 첫사랑이었다. 데미안이라는 인물뿐 만이 아니라, 《데미안》이라는 작품 전체, 그리고 이 작품을 쓴 작가 헤르만 헤세까지, 그 커다란 덩어리를 나는 열렬히 사랑했다. 이 작품을 처음 만났던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다소 빨리 찾아온 사춘기를 겪으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괴로웠고 또 사무치게 외로웠다. 다정한 부모님과의 대화도, 실없는 친구들과의 교류도 나를 위로해 주지 못했다. 내 사춘기 시절, 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닿은 것은, 무섭고 외로웠던 내 마음을 알아주었던 것(사람, 물건, 작품을 통틀어)은 《신세기 에반게리온》, 그리고 《데미안》뿐이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버린 지금 다시 읽는 것이 두려웠다. 예전에 그렇게 깊게 사랑했던 작품과 더 이상 공명하지 못할까 봐. 마치 김 빠진 콜라처럼, 얼음이 다 녹아버린 아이스커피처럼 우리의 관계가 싱거워져 버릴까 봐.


《데미안》을 읽을 때를 전후로 하여, 나는 '자아'라는 녀석을 발견했다. 그때 본 내 자아는 (영혼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까) 새하얗고, 깨끗했다. 새벽에 함박눈이 내려서 하얗게 된 설원과도 같았다. 아름다웠고, 훼손되기 쉬웠다. 흙 묻은 발자국이 내 소중한 설원을 밟고 지나가는 것 같은 이미지가 자주 떠올랐다. 친구들의 인정을 받고 싶어서 거짓말을 할 때마다, 부모님의 옳은 말을 거스르고 싶은 충동이 들 때마다, 발자국들은 설원 위를 부지런히 오갔고, 설원은 녹은 눈과 흙 발로 더 이상 하얗고 깨끗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괴로웠고,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이런 마음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을 것 같았고, 고백의 대가로 돌아오는 것은 비난뿐일 것 같았다. 믿음, 안정, 평화, 사랑, 온유함과 같은 덕목이 나를 채우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질투, 박탈감, 증오, 혐오, 일탈과 같은 불청객들이 내 마음의 핵심부에 자리 잡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당시의 나는 도덕적 결벽증을 앓고 있었다. 닳고 닳은 어른이 되어버린 지금은 지금은 앓으려야 앓을 수 없는, 유년기의 열병이었다. 《데미안》과 처음 만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데미안》의 문장들은 그런 나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야, 네가 겪는 아픔들을 나도 겪었어, 하고 속삭여주는 위로 같았다. 싱클레어는 바로 나였다. 싱클레어가 프란츠 크로머와 어울리며 그에게 인정받기 위해 사과를 훔쳤다고 거짓말을 지어내는 첫대목에서부터 나는 그에게 짙은 동질감을 느꼈다. 여차하면 친구들 무리에서 쫓겨나 버릴 것 같은 존재감이 약한 아이, 호승심에 지어내는 거짓말에 스스로 당황하는 아이, 그리고… 그 거짓말이 진실이라고 하느님께 맹세했다는 사실 때문에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이.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싱클레어에게는 말할 수 없이 무거운 비밀이었고, 혼자 감당해야 하는 죄였다. 나는 그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어렸을 때 따돌림당하는 내 前 친구를 외면한 적이 있었다. 나도 따돌림당할까 봐 무서웠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소리치는 마음의 소리를 끊어내면서, 내 마음 한구석은 불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그는 갑자기 나를 풀어주었다. 우리 집 복도는 이제 더는 평화와 안전의 냄새를 풍기지 않았다. 나를 둘러싼 세계가 파괴되었다. 그는 나를 고발할 테고 그럼 나는 범죄자가 된다. 누군가 아버지에게 이르겠지. 어쩌면 경찰이 올지도 모른다. 모든 게 무너지면서 혼란의 공포가 밀려왔다. 그 모든 추악하고 위험한 일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내가 훔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맹세까지 하지 않았던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사춘기를 겪으며,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만 이렇게 힘든 걸까, 왜 매사가 어려운 걸까. 누구에게도 차마 묻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려면 내가 마음속으로 많은 죄를 지었고, 이미 하자가 생겨버린 존재라는 것을 고백해야 했다. 그것은 혐오스러운 내 일면을 대중 앞에 전시하는 것처럼 몸서리 처지는 일이었다. 그때의 나는 내 마음에 죄와 욕망으로 무수히 많은 스크래치가 났어도, 누군가는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해 주고 사랑해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누구나 겪는 내적 갈등, 살다 보면 범할 수도 있는 실수들이 내 마음속에 그렇게나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게 의아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절체절명의 문제들이었다. 프란츠에게 2마르크를 가지고 오라는 협박을 받으며 열병을 앓고, 자애로운 어머니와의 관계를 끊어내다시피 멀리하는 싱클레어의 행동이 사춘기의 나에게는 더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주 그랬듯이 단 한 번의 참회 면 되리라. 힘들고도 괴로운 한 시간, 후회에 가득 차서 힘겹게 용서를 간청하는 일 한 번이면. 얼마나 달콤한 울림이었던가! 얼마나 멋진 유혹이었던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그러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제 나는 비밀을, 나 혼자서만 감당해야 하는 죄를 지녔다. 어쩌면 나는 지금 갈림길에 서있고, 이 순간부터 영원히 나쁜 쪽에 속하고, 사악한 자들과 비밀을 공유하고, 그들에게 의존하며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같은 자가 되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싱클레어에게 거짓말을, 거짓 맹세를 하게 하고, 협박을 하여 점차 밝은 세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프란츠와 같은 존재들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만 그렇게 강렬한 기억이 아니었고, 단 한 명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질서와 밝음,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힘과 유혹과 혼란함과 광기의 세상에 익숙해지게 하는 존재들은 도처에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는 데미안처럼 신비스러운 영향력을 발휘해서 그런 존재를 제거해 주는 길 안내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것 자체가 나에게 하나의 구원이었다. 내 세계가 무너져 내리는 것이 내가 범한 죄나 실수 때문이 아니라, 새로 태어나려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라고, 지금 내가 힘겹게 투쟁하고 있는 것이 그 성장의 증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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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feather-3010848__340.jpg 유명한 구절, 나를 일으켜 준 구절이기도..



《데미안》을 읽어 내려가던 그 순간이 기억난다. 평일의 성당 뒤편이었다. 미사가 없어서 조용했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었지만 주변에는 복사들 말고 다른 이는 없었다. 앞으로 더 읽을 내용이 없어질까 봐 넘어가는 책장이 아쉬웠고, 왜인지 신성모독적인 내용처럼 느껴져서 숨기고 봐야 할 것 같은 긴장감이 느껴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데미안, 피스토리우스, 에바 부인으로 이어지는 길잡이들과 끈끈한 연대를 유지하고 싶은 싱클레어의 마음, 두려움과 고독함, 그리고 지독한 자기혐오의 감정이 강하게 느껴졌었다.


내 모습은 이랬다. 인간쓰레기이자 불결한 놈, 취하고 더러운, 역겹고도 비열한, 끔찍한 충동에 사로잡힌 상스러운 짐승! 나는 그런 모습이었다. 온갖 순수함, 광채와 사랑스러운 애정이 넘치던 정원에서 온 내가, 바흐의 음악과 아름다운 시들을 사랑하던 내가! 역겨움과 분노를 품고 나 자신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술에 취해 자제력을 잃은, 이따금 우둔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 그게 나였다!



그런데 지금 다 자라 버린 어른이 되어 읽는 《데미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예전에 《데미안》을 읽으면서 느꼈던 신성모독적인 색채, 미세한 떨림까지 공명하던 마음의 통증은 어느새 희미해져 있었다. 지금 머리에 때려 넣듯 강하게 들어오는 문장은 오히려, 키르케고르의 그것 같은 나의 '실존'에 관한 문장들이었다. 유년시절의 나는, 이제 무대의 뒤편으로 내려왔다. 지금 나와 주요 무대에서 동행하고 있는 것은 '구도자'로서의 싱클레어다. 이제는 죄 많은, 어둠의 세계에 속한, 혐오스러운 나를 누군가 지금의 모습 그대로 수용해 주는 것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분명 안심이 되고 기분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를 수용하고 살아내는 것이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진정한 소명이란 오직 자기 자신에게로 가는 것, 그것뿐이다. 그는 마지막에 시인이나 미친 사람, 예언자나 범죄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은 그 자신의 문제가 아니며, 결국은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의 과제는 멋대로의 운명이 아닌 자신의 운명을 찾아내 내면에서 안전하고도 끊임없이 그에 따라 사는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모두 반쪽이자 벗어나려는 시도이며 대중의 이상(理想)으로의 도주, 그냥 적응, 자신의 내면에 대한 두려움일 뿐이다. 내 앞에 새로운 모습이 두렵고도 거룩하게 떠올랐다. 이미 수없이 예감했고, 어쩌면 자주 표현했던 것. 그러나 나는 이제야 비로소 진짜를 체험했다. 나는 자연의 내던짐이었다.


나 자신에게로 가는 것, 나 스스로를 탐색하고, 내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지금도 늘 나는 스스로를 더듬어 탐색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내 소명은 무엇인지, 나의 길이 이 길이 맞는지. 그런데 꺼내 드는 나의 편린들은 모두 다른 이야기를 한다. 상호 모순적이고, 시기에 따라 장소에 따라 천태만상으로 변한다. 나 자신에 대해서 어떤 수식어도, 어떤 명제도 정말 맞다고 단언하기 어렵다. 언제가 되어야 비로소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를 찾아가는 글쓰기' 때 글을 쓰는 것도, 그래서 생각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구도의 길에서 내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내 앞에 심연이 있고, 그 심연을 뚫고 나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는 자도, 내 안에 있다는 것이다.



새로운 신들을 원하는 것은 잘못이다. 세계에 그 어떤 새로운 것을 부여하려는 것은 완전히 잘못이다! 깨어난 인간에게는 단 한 가지, 자기 자신을 탐색하고, 자기 안에서 더욱 확고해지고, 그것이 어디로 향하든 자신만의 길을 계속 더듬어 나가는 것 말고는 달리 그 어떤, 어떤, 어떤 의무도 없다. 이 깨달음이 나를 깊이 뒤흔들었다.




나를 찾아가는 길의 여정은 앞으로도, 막막하고 외로운 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안에 답이 있다는 것. 더듬어 찾아야 할 것이 나의 내면이라는 것만큼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이번에 첫사랑과 오랜만에 해후하면서, 첫사랑의 새로운 얼굴을 만났다. 20여 년 동안이나 잊고 살았던 첫사랑의 얼굴은 여전히 아름답고, 신비스러웠다. 예전에 알았던 모습에 새로운 매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반갑고, 좋았다. 특히 좋았던 것은, 내가 그동안 찾아 헤매었던 고민에 대한 답을, 살아내고 있는 삶의 방향을 첫사랑의 새로운 얼굴 안에서 찾아냈다는 것이었다. 나 스스로는 인식하고 있지 못했지만,《데미안》의 문장들이 내 안에 계속 살아있었고, 그동안 나와 동행해 왔다는 것을, 이번 재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신비하고도 짜릿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데미안》은 내 마지막 사랑 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보다 더 청소년 권장도서로 적합한 책이 있을까 싶다.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 책이 구원이 되기를. 나에게 그러했듯이.)



내가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나 자신 안으로 완전히 내려가면 그곳 어두운 거울에서 운명의 모습들이 잠들어 있었다. 그럼 나는 검은 거울 위로 그냥 몸을 숙여 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 모습은 이제 완전히 그와 같았다. 내 친구이며 길 안내자인 그 사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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