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게임 룰 열셋:

남에게 훈수를 두다 보면 는다.

by 티라노

지혜로워지는 방법은 바로 훈수 두기에 있다.


2009년 겨울 즈음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다가 진지하게 사부에게 '사부, 어떻게 하면 사부처럼 지혜로워질 수 있어요?' 하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M2모임에 나갔다가 사부의 다른 제자가 사부에게 질문하는 것을 들었다. '사부, 어떻게 해야 사부처럼 지혜로워질 수 있어요?' 약 7년 전의 내 모습이 생각나서 아득하게 그리운 느낌도 들고, 묘한 기시감도 느껴졌다. 그리고 사부의 대답은 답은 '훈수 두기'에 있다는 것이었다. 어조는 조금 달랐다. 나에게는 "지혜로워지고 싶다고 생각만 하지 말고 뭔가 시도를 해봐. 나 같은 경우에는 탁월함에 대한 엄청난 추구함이 있었지. 그래서 내 사부들도 열심히 따라다녔고, 책도 열심히 읽었고. 그런데 내가 진짜 성장하게 된 건 사람들이 나에게 조언을 구하면서였어. 그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주면서, 그 사람들의 인생의 문제들이 정말 해결되는 것을 본거지. 그때 정말 살아있는 지혜를 갖게 되는 거지."하고 좀 강하게 얘기했고, 다른 제자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해주다 보면 메타인지가 생겨. 자기가 처한 상황은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보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패턴을 읽을 수 있게 되지. 그러다 보면 예측이 가능하고,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도 알 수 있어."하고 말해줬다.



시야가 다르다: 옵저버 맵을 보는 훈련


훈수라는 말에는 다소 부정적인 뉘앙스가 있다. 사전에서 찾아봐도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고 나온다. 이 포스팅에서 말하는 훈수는 2) 번의 의미가 아닌 1) 번,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당사자가 아닌 제삼자가 수를 알려주는 경우를 말한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얼마나 잘났길래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고까울 수 있다.

훈수 : 네이버 국어사전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43637000)

1. 바둑이나 장기 따위를 둘 때에 구경하던 사람이 끼어들어 수를 가르쳐줌.
(예문) 내기 장기니까 훈수 두지 마라.
2. 남의 일에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하는 말
(예문) 누가 내 사업에 이러쿵저러쿵 훈수를 걸어온다면 난 결코 유쾌한 기분이 아닐 거야


그럼에도 훈수를 두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시야'를 달리 갖는 법을 훈련하기 위해서다. 나는 스타 크래프트 팬이어서 대학생 시절에는 용산이나 코엑스에 중계를 보러 가곤 했다. 나는 팀플레이도 깍두기로 껴주는 형편없는 실력이지만, 옵저버 맵으로 중계를 볼 때는 '아, 4드론이잖아. 배럭 먼저 지어야지, 리파이너리를 지으면 어떻게 해!'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빨리 파악할 수 있다. 절대 실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시야가 다르기 때문이다. 더 재능 있고, 더 경험이 많고, 더 손이 빠른 프로게이머들도 자기 자신이 하는 경기는 시야가 가려져 있어 항상 최적의 결정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둘 중 한 플레이어가 옵저버 맵을 보고 경기할 수 있다면 당연히 옵저버 맵을 볼 수 있는 플레이어가 승리한다(엄청난 기량의 차이가 있지 않는 한 100% 그렇다).


재미있는 것은 '남의 현재 상태에 대해 비판하고 훈수 두는 것'은 참 쉽고, 누구나 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볼 수 있고, 감정에 휩싸이거나 어려움이나 역경을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때문에 자기가 처한 환경에 플레이어적 관점 외에 좀 더 멀리서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옵저버 맵을 보는 능력을 탑재한다면 자기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생각하는 것보다 이 능력을 갖춘 사람이 많지 않다. 회사생활을 5년 넘게 해오면서, 차장/부장급이 사원/대리급, 과장급의 주니어에게 야단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야, 회의 전에 회의할 내용 숙지해서 정리해오는 건 기본이잖아. 이 정도도 못하면서 어떻게 이 회사 들어왔냐." "컨퍼런스 콜을 그렇게 잡으면서 아직도 영어 하나 똑바로 못해? 요즘은 영어는 기본, 중국어는 필수인 시대 아냐?" 같은 핀잔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내용이 본인 자신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회의 전 내용을 정리해오라고 야단쳤던 상무님은 본인이 회의 전 해당 내용을 다 숙지하지 않으시고 늘 1페이지 요약본과 그 뒤에 상세 설명 첨부한 PPT를 요구하시는 분이었고(물론 임원들은 다른 업무로 공사다망할 수는 있으나, 회의 내용을 숙지하시는 것은 물론 원하는 답만 빨리 찾아 속전속결로 진행하시는 다른 임원들도 계신 걸 보면 불가능한 건 아닐 터였다), 영어로 타박을 놓으셨던 부장님은 지법인과 회의 시 꼭 통역을 해 드려야 하는 분이었다. 그러니까 남에게 훈수를 둬 보고, 그 훈수를 자신에게 대입해 보면 의외로 자신의 삶의 문제들이 풀리는 경우가 많다.



훈수 경험 (1): 소홀한 남자 친구와 대화를 할 것인가?


<청춘시대 1>의 은재처럼, 학과 선배가 먼저 좋아한다고 해서 사귀었고, 그러다 보니 선배를 좋아하게 되어 잘 만나고 있는 후배가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선배가 자신을 소중히 대하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그런데 먼저 서운하다고 말하면 싸움이 되고, 그 싸움으로 인해 이별하게 될 수도 있으니 서운한 감정을 참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냥 참을까? 얘기를 해볼까?" 고민하고 있었다. 들으면서 생각했다. '당연히 얘기를 해야지. 말하지 않으면 서운한지, 어떻게 행동을 바꿔주면 좋은지 남자 친구가 알 수 없잖아. 그리고 만약 남자 친구의 속마음이 여자 친구가 서운한 마음이 들어도 어쩔 수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마음이라면 이미 언젠가는 헤어지게 되어 있어. 그러려면 하루라도 일찍 헤어지는 게 나아. 그럼 말을 해봐야지. 나라면 하겠다.' 근데 이렇게 말하는 건 좋은 훈수가 아니다. 당시 나는 사귀고 있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도 감당할 만했고, 때문에 어떤 대화를 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 사람이 처한 상황은 1)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가 올 수도 있는 어려운 대화를 할 것인가와 2) 적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결과가 올 때까지 시간을 벌며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겠는가의 문제다.


청춘시대 연재.PNG JTBC <청춘시대> http://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4741208&memberNo=11773044


오히려 나의 경우에 이건 회사와의 연봉협상이나 보직 변경 요구의 경우 고민하게 되는 내용이었다. 현재 상황에서 만족할 수는 없고 회사 측에서 좀 더 신경을 써주길 원한다. 하지만 인사평가를 나쁘게 받거나 회사에서 강제로 퇴출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다. 생계의 문제는 언제나 무거우니까. 이 경우에 말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상황이라면, 얘기를 해보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럼 내 식대로 생각해서 쉽게 말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훈수를 둘 수 있다. "진짜 어려운 문제야. 이럴 땐 이대로 그냥 진행되면 어떨지를 고민해 보는 게 좋아. 이대로 참을 만한지, 그럼 관계가 지속될 가능성이 있는지. 근데 나는 말을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말하는 방법에 굉장히 주의해서. 일단 말을 해보면 가장 좋은 경우, 남자 친구의 태도가 바뀔 수 있어. 그리고 너는 감정적인 어려움에 대해 남자 친구와 소통을 시도해 보았다는 경험을 얻지. 그건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거야. 결혼해서도 상대방과의 소통은 필요하니까. 그리고 만약 굉장히 어렵게 조심스럽게 내 마음을 표현했는데 그걸 상대가 기분 나쁘게 받아들여 결별에 이르게 될 수도 있지만 그건 감당해야 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깨질 수밖에 없는 관계인 것 같아.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게 너에게 나을 수 있지."





훈수 경험(2): 직장, 이대로 그냥 다닐 것인가?


이건 나를 비롯한 주변 많은 사람들이 같이 고민하고 있는 내용이다. 매일 성실하게만 살면 매달 정해진 시간에 적지 않은 돈을 꽂아주니까 쉽게 타성에 젖는다. 그러다 보면 직장을 다닐 것인지에 대해 고민조차 하면 안 될 것 같은 무서운 기분이 든다. 하지만 회사에서 일한다는 것이 결코 쉽지 만은 않다. 때로는 부서 간 알력싸움도 있고, 부당한 업무지시도 있고, 하루 종일 인형 눈 붙이듯 엑셀만 하게 되는 날도 있고, 정당한 이유 없이 욕받이가 되는 날도 있다. 그렇게 지내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이대로 괜찮을까?'하는 생각이 꽤나 세게 머릿속을 휘젓는다. 나도 아직 답을 찾지 못했지만, 친구들과 후배들과 고민을 나누면서 또렷하게 보였다. 내 미래를 볼 때보다 다른 사람의 미래를 볼 때 더 선명하게 보였다. "이대로 흘러가면 회사에서 시켜주는 일만 하게 될 것이고 네 정체성이나 흥미와는 상관없이 특정 업무능력만 발달할 거야. 그럼 협상력을 잃지. 고과, 승진, 주재원 발탁에 있어 당연히 회사 눈치를 보게 될 것이고, 과장 말년 차부터는 고만고만한 사람들 사이에서 눈에 들기 위해 과잉 충성과 정치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그러다 보면 어느새 퇴직하겠지. 네가 원하는 삶이 그런 거야?"


나는 사부를 만나서 '내가 원하는 삶을 디자인해보고 실행계획을 세워라. 실행하고 피드백해보고, 그리고 결과물을 점검해라'하고 끊임없이 가르침을 받았다. 하지만 모두 스펙을 쌓고, 경력을 쌓고,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나가는데 조금도 뒤쳐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한 번 뒤쳐지면 생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에 그 가르침에 따라 내 삶의 방향성에 대해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을 뿐 점검하는 행동을 시작하지 못했다. 하지만 후배들을 보면, '생각만 해보는 건 돈과 비용이 들지 않아. 지금 아니면 언제 할래?' 같은 훈수를 둘 수 있다. 그 누구보다 사실 내가 들었어야 하는 말이었다.


회사에 대해 회의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추가 스펙을 쌓기 위한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제2외국어, 제3외국어를 따거나, 새로운 자격증을 딴다. 하지만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어디로 갈 건지에 대한 인식 없이 막연히 '더 좋은 곳'을 생각하고 있어서 나쁜 경우에는 중도에 포기하고, 잘 된 경우에도 자격증과 제2외국어에 대한 능력은 추가되지만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충분히 알지 못한다. 이들이 해야 하는 것은 사실 '내가 팔 수 있는 서비스, 상품은 무엇인지,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디에 집중해야 되는지'에 대한 구상과 전략이다. 막연히 더 좋은 스펙의 노동자가 되려고 하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동안도 이렇게 생각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 작년 다이어리에는 자격증, 외국어 등 스펙 향상을 위한 계획으로 점철되어 있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훈수를 자신에게 두기 시작해야 할 때라는 뜻이다. 그래야 는다.



사부가 말한 "훈수 두기"의 의미를 요새 깨달아가고 있다. 남에게 훈수를 두면 시야를 넓게 보게 되어 내가 자기 일이라서 보지 못했던 맹점(blind spot)을 깨달을 수 있다. 상대방에게 말하지만, 나 자신도 그 조언을 듣게 되는 셈이다. 또한 내 조언으로 인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면서 나 스스로의 생각과 믿음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말하면서 자신의 통찰력에 더해 의지를 다지게 되는 부분도 간과할 수 없는 장점이다.


배경 이미지 출처: https://blog.naver.com/pihs/220593678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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