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게임 룰 열둘:

애정하는 캐릭터가 잘 자란다.

by 티라노

얘가 더 예쁜데 어떡해.


내가 와우에서 처음 생성했던 캐릭터는 언데드 마법사였다. 그런데 게임을 그만두기 직전 가장 많은 성장을 했던(만랩을 찍고, 템도 가장 좋은 것을 둘렀던) 캐릭터는 블러드엘프 사제였다. 언데드에게는 포세이큰의 저주 같은 특수기도 있고, 마법사도 재미있는 직업이지만, 나는 사제 캐릭터가 좋았고 블러드엘프가 예뻐서 좋았다. 로브를 바꿔 입히는 것이 재밌어서 아이템을 새로 얻고 싶었을 정도로. 그러다 보니 계속 사제 캐릭터로만 접속을 하게 되었고, 이것저것 갖춰주고 싶다 보니 억지로 노력하지 않아도 캐릭터가 쑥쑥 성장했다. 인생 게임에서도 마찬가지다. 캐릭터를 새로 생성할 수는 없지만 나라는 캐릭터를 더 예뻐할 수는 있다. 나라는 캐릭터가 플레이어인 내 눈에 예쁠 때, 캐릭터는 예쁨을 받고 성장하고 플레이어는 행복하고 힘이 들지 않는다. 헤어스타일, 의상도 잘 갖춰주게 되고, 걸음도 당당해진다. 실수를 하더라도 귀엽게 보아 넘겨줄 수 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사는 비기 중의 비기는 "나(라는 캐릭터)를 사랑하면 된다"는 평범한 진리다. 어떻게 접근하고, 실천해 내느냐가 문제 될 뿐이다.



이렇게 모자란 나인데 누가 사랑해준다는 거예요?


연애상담을 해주다 보면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 싫어하는 데는 이유가 있어도,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는 것. 싫어할 만한 합당한 이유가 많아도, 어느새 좋아져 버리기도 한다는 것. 아마 많은 사람들이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로맨틱 코미디의 대부분의 내용이 이런 공식을 따르고 있는데 계속 사랑받는 것은 우리도 그 개연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내 친우 중 한 명은 타블로처럼 체구가 작고 마른 체형의 남자인데 지금 결혼한 남편분은 다부지고 건장한, 큰 체격의 소유자다.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미녀와 결혼하겠다던 동기 오빠는 자기보다 연상인 미녀와 결혼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때로는 이렇게 불가해하다.


문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유가 의외로 많다. 첫 번째, 원래 타인이라면 보지 않아도 될 모자라고 부족한 때로는 못된 모습을 보게 되고, 듣지 않아도 될 마음속 깊은 곳의 싫은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부는 자기 자신을 "계속 같이 살고 있는 룸메이트"라고 표현했다.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깝고 노출도가 높아서 싫은 점, 참을 수 없는 점을 알게 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어지거나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는 의미다. 베스트 프렌드들도 여행을 가면 싸우기도 하고, 마냥 사랑하던 연인들도 결혼하고 나면 신혼 초에 다투기도 하는 데, 365일 24시간 붙어있는 자기 자신을 오롯이 좋아만 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두 번째, 타인에게 받는 사랑과 인정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타인이 원하는 행동을 하다가 스스로를 소외시켜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타인이 나에게 던진 상처가 되는 말이나 부정적인 평가가 내재화되어 '나는 사랑받기에 합당하지 않아'라고 습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나는 어렸을 때 자기혐오가 굉장히 심했다. 인정받고 싶은 만큼, 사랑받고 싶은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꼈고, 계속 다른 사람으로 살고 싶었다. 불가능한 것은 알지만 아이돌 같이 예쁜 외모에, 운동도 잘해서 체육시간에 빛이 나고, 조금만 공부하면 어렵지 않게 전교 1등쯤은 해내는 그런 사기 캐릭터로 사는 삶을 상상하면 상상만으로 즐거웠다. 근데 그런 상상을 구체적으로 할수록, '나는 그렇지 않은데'라는 마음에 스스로 상처받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수필을 써서 지역구 대회에서 상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외모도 비호감이고(당시 안.여.돼로 주변의 놀림과 충고를 많이 받았다) 머리도 보통이고, 그렇다고 마음이 비단결 같지도 않은데, 내가 지구에 발 디디고 있는 것이 잘못'이라는 당시 내 심경 고백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사랑하며 잘 살아보겠다는 취지로 급하게 끝맺은 글이었다. 더 좋은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당시엔 자기혐오가 심해 다른 글을 쓰려고 해도 써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하루하루가 힘들었고, 성장함이 없었다.


그땐 사랑받기 위해서 지금 내가 가진 나쁜 요소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살을 빼고, 피부관리를 받고, 라섹수술을 받고, 열심히 공부하고, 성공해야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남들이 소위 말하는 좋은 요소들을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틀린 말이다. 먼저 1) 타인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어떤 상태든 나를 좋아할 의무가 없다. 다만 나를 좋게 봐줄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김연아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훌륭한 인성, 세계 신기록을 가진 사람도 안티팬이 있다. 내가 어떤 걸 이뤄내더라도 누구에게 날 사랑해 달라고 강요할 권리는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2) 나는 내가 어떤 상태이든 나를 좋아할 수 있다. 이건 결단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쉽지는 않다. 마음의 힘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들이 '너는 사랑스러워, 사랑받기 합당해, 예뻐, 멋져, 좋아' 같은 메시지를 줄수록 나 자신도 그렇게 믿고 결단하기 쉬워진다. 하지만 세상은, 타인은 언제나 그렇게 친절하지만은 않다. "왜 저래, 이상해, 자기가 잘난 줄 알아, 어디 잘되나 두고 보자' 같은 말을 더 많이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평가와 상관없이 내가 일단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한다(타인의 평가는 감정을 걷어내고, 사실에 대한 내용만을 골라 자기 자신의 현재 모습에 대한 진단자료로 사용해야 한다.)


"너 스스로를 사랑해야 해. 너 스스로 사랑받기 합당한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해." 사부는 자주 말해줬는데 나는 망설였다. "사부, 저는 이때까지 오기랑 절박함으로 성장했는데요. 힘들어도 두고 보자, 완전히 달라진 나를 보여주겠다, 뭐 이런 마음으로 버텼는데 나를 갑자기 사랑하려고 하면 마음이 풀려서 앞으로 나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게 네가 성장한 이유기도 하지만, 그만큼밖에 성장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해. 앞으로 성장하려면 다른 마인드로 성장해야 해. 그리고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가, 태어났으니 그걸로 되었다, 하는 거 봤어? 사랑하더라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더 잘해주고 싶고, 잘 되기를 기도하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일단 사랑하기로 결단해."


신의탑_.PNG 신의탑 2부 257화

<신의 탑> 2부 257화의 대사를 "겨우 '그 정도' 성장을 위해 자신을 미워하다니."로 바꿔 읽어보자!




하지만 어떻게 하냐고요?


그다음에 사부를 만났을 때는 질문이 좀 달라졌다. "사부, 사랑하기로 결심했는데, 아무것도 안 바뀌는데요. 사랑하게 된 것 같지도 않아요." "그동안 계속 너 미워, 하다가 사랑해 봐야지, 한다고 하루아침에 사랑하게 되는 게 아냐. 억지로 사랑하는 게 쉽냐. 이럴 땐, 아 이거 진짜 비싼 가르침인데.. 처음엔 오글거리고 힘들더라도 거울을 보고 자기 자신한테 대고 '사랑해' 이렇게 하루에 열 번씩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분명히 달라진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보면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들은 물은 결정이 예쁘게 맺힌다는 내용이 나와. 말에 힘이 있는 거지. 자꾸 사랑한다고 말하면 뇌는 그것을 사실로 인식해. 그러니까 일단 오글거리더라도 해봐. "으.." "그리고 너에게 추천하는 방법은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어보는 거야. 얼짱 각도 아닌 여러 가지 각도로."

스프릿핑거스 16화.PNG 네이버웹툰 <스프릿 핑거스> 16화


시도해 봤지만, 역시 오글거리고 표정이 잘 나오지 않아서(웹툰 <스프릿 핑거스>를 보다가 완전 공감이 되었던 컷을 공개한다. 주인공 우연이가 모임에서 만났던 블랙 핑거도 우연이에게 비슷한 조언을 해준다) 몇 번 시도해보다가 말로 하는 건 그만두었다. 대신 노트에 몇 번씩 썼다. "나는 사랑스럽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같은 오글거리는 말, "너는 사랑받기 합당해" 같은 조금 할만한 말들을 짬이 날 때 노트에 주문을 걸듯 썼었다. 그게 효과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정말 최악, 암흑기였던 시절, 생각만 해도 이불킥 하고 싶었던 시절(당시 내가 카카오톡으로 사부나 친구에게 연락을 했는데 바로 연락이 오지 않으면 바로 불안하고,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인 것 같고 1자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씩 창을 들락날락 거리는 의존증적 증상도 심했다)에도 항상 멘토로서 걸음을 함께 해줬던 사부, 친구 Y 덕분인지 확실히 스스로를 미워하고 몰아붙이던 감정이 누그러지고 좀 작아졌다.



사랑이 다했네.


마음이 좀 낫고 보니 보이는 것이 있었다. 사랑받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무기이자 스펙이라는 것이다. 애정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탐색 욕구가 높다. 겁먹지 않고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알아보려고 한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은 안전지대를 좁게 설정하고 그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더라도 용감하게 세상과 타인과 소통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의 성장발달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난 이 멘토링 노트를 통해 사부를 만나서 인생의 변화를 체험했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사부가 내가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고, 스스로를 사랑할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한걸음 더 나가봐. 떨어지면 내가 잡아줄 테니까' 같은 메시지를 주면서. 사부에게 지혜를 배우고 적용하는 건 그다음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스로를 사랑하고, 또 자신이 사랑받기 시작할 때 우리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나에게 보이는 나는 사랑을 받아 건강해지고, 나를 보는 나는 사랑을 할 줄 알고 꾸준히 그 사랑의 결단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큰다. 이건 원금 보장되고, 연 이자율이 15% 이상 나오는 말도 안 되게 유리한 적금이다. 그러니 결단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리고 빨리 결단하면 할수록 이윤은 더 많이 남는다.


배경 이미지 출처: http://cafe.naver.com/kisetsu/91005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인생게임 룰 열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