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한가? 악한가? - 인간 본성에 대한 고찰
인류의 역사 속에서 인간은 때로는 이타적이고 고귀한 행동을 보여주었지만, 때로는 잔혹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이러한 모순은 인간 본성이 단순히 선하거나 악하다는 이분법적 관점으로는 설명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환경과 선택, 그리고 상황적 맥락 속에서 인간은 선과 악 모두를 품은 복잡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왔다.
사람들은 어린아이가 우물에 들어가려 하는 것을 언뜻 보면 다 깜짝 놀라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기는데, 이는 그 어린아이의 부모와 교제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동네의 친구들에게 어린아이를 구해 주었다는 명예를 얻기 위함도 아니며, 어린아이를 구해 주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소리가 싫어서도 아니다.
맹자의 이 말은 인간의 본성에 선함이 내재되어 있음을 증명하려는 중요한 사례로 제시된다. 그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에서, 누구든 조건 없이 자연스럽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응은 어떤 외부적 동기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며, 순수하게 인간의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이는 맹자의 사단설(四端說) 중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대표적인 예로,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을 지향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주장하면서, 이 선함을 단지 도덕적 판단이나 사회적 규범의 산물이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性)의 움직임으로 보았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에서 느끼는 측은지심을 예로 들어, 이러한 감정은 인간의 생각이나 판단을 초월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천명(天命)의 작용이라고 설명했다. 즉, 맹자가 말한 성선설에서의 '선'은 단순히 의식적으로 판단하거나 행하는 도덕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 본능적으로 발현되는 본질적인 선함을 의미한다.
맹자는 이 천명과 성의 작용을 인간 본성의 기초로 보며, 이를 선(善)이라고 정의했다. 측은지심,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누구나 타고나는 공통된 성질이며, 이처럼 의식 이전의 움직임이야말로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하는 '선'은 특정 행동이나 결과로 평가되는 도덕적 선함이 아니라, 인간 본질의 바탕을 이루는 보편적이고 내재적인 선의 움직임이다.
이 관점은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하며 도덕적 행위의 기반이 되는 자연적 성향을 강조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단지 학습이나 외부적 규율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다움의 핵심으로 이해될 수 있다. 맹자에게 있어 선은 인간 내면의 근원적 힘이자, 올바른 환경과 교육을 통해 꽃피울 수 있는 가능성의 씨앗이었다.
맹자의 성선설은 흔히 오해되듯 "인간은 본질적으로 무조건 선하고 착하다"는 주장이 아니다. 맹자가 말하는 선은 인간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한 본능적이고 보편적인 선의 가능성을 가리킨다. 이는 단순히 특정한 도덕적 행동을 선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질의 기초로서의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과 같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을 선으로 본 것이다.
맹자는 성선설을 통해 인간에게 선으로 나아갈 잠재적 기초가 있다고 보았지만, 이 씨앗이 저절로 자라나 모두가 선한 행동을 할 것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러한 씨앗을 가지고 있지만, 이를 올바르게 키우고 계발하지 않으면 충분히 악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선함이 내재적인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올바른 환경과 교육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따라서 성선설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한 선한 존재라는 단순한 주장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이 선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제대로 키우지 않을 경우 본성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경고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본래의 선함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계발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맹자가 주장한 성선설은 선함의 가능성을 믿는 동시에,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데 필요한 노력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철학적 관점이다.
맹자의 주장은 현대 심리학에서도 어느 정도 뒷받침된다. 예컨대, 유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아기는 자신이 본 타인의 고통에 대해 공감하거나 도우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도덕적 행동이 사회적 학습의 결과만은 아니며, 인간의 본질에 이타심과 선한 감정이 본래적으로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맹자는 이 선한 본성을 씨앗에 비유하며, 적절한 환경과 교육이 제공된다면 인간은 누구나 선을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써 그는 인간 본성의 선함이 단순한 가능성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한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주장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주의적 관점이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선과 악의 기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본성이 스스로 올바르고 공정하며 질서 있는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순자의 관점에서 선이란 자연 상태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의와 규율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묻는다. "만약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면, 성군(聖君)과 예의(禮儀)는 왜 필요한가?"
순자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 욕망과 감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본성은 스스로 질서나 선을 만들어내지 못하며, 오히려 혼란과 파괴를 초래하기 쉽다. 따라서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외부에서 부과된 규율과 교육이 필요하다. 순자는 성악설의 입장에서, 선이란 인간 본성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과정에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 본성을 악하다고 단정하지만, 이 악한 본성을 교정할 수 있는 인간의 능동적 가능성을 강조한다. 여기서 순자가 말하는 ‘악’은 단순히 부정적 의미로서의 비난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본능적 욕망과 감정을 가리킨다. 인간의 본성은 규제 없이 방치되면 이기적이고 혼란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인위(人爲), 즉 인간의 노력과 외부적 규율로 교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순자는 선왕들이 제정한 예의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것이 인간의 본성을 교정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보았다. 예의는 인간의 사회적 삶을 조화롭게 만들고, 개인의 성정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기준이다. 이러한 외재적 규율은 인간의 내면적 덕성과는 구별되며, 사회적 집단 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이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말하는 인간 내면의 도덕적 직관과 달리, 외부적 규정에 의해 인간을 변화시키고 성숙시키는 과정을 중시하는 접근이다.
결국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을 그대로 방치해 악을 용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성의 악함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이를 교정하려는 능동적 노력과 사회적 규율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이다. 이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의 역할과 가능성을 철저히 믿었던 순자의 철학적 특징을 보여준다.
순자의 주장은 인간의 행동을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데 강점을 가진다. 그는 인간의 자연 상태에서 드러나는 이기심과 탐욕이 어떻게 사회적 혼란과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강조했다. 이 관점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이상주의적 관점을 지니는 대신, 본성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고 이를 제어할 방법을 모색한다. 결국 순자는 선이란 본성이 아니라 예의와 규범에 의해 길러지고 유지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 사회의 규율과 교육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며, 인간 본성을 단순히 선하다고 보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자연 상태의 인간은 악한 성향으로 흐르기 쉽기에, 이를 다스리고 조정하는 구조적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것이 순자의 입장이다.
고자가 주장한 성무선악설은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 사이에 위치하며, 인간 본성에 대해 보다 중립적인 관점을 제시한다. 고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상태로 보며, 선과 악은 본성이 아니라 환경과 교육,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이나 악의 기질을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은 단지 가능성과 잠재력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물이 동쪽으로도 서쪽으로도 흐를 수 있는 것처럼, 고자는 인간 본성 역시 외부 환경과 조건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이 선한 행동을 하거나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은 타고난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놓인 환경과 상황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성무선악설의 핵심은 인간의 도덕적 성향이 선천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후천적 요인에 의해 형성되고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후에 수많은 연구에서, 인간의 행동은 유전적 요인뿐만 아니라, 성장 과정에서 겪는 사회적 상호작용, 문화적 배경, 교육 수준 등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는 고자가 주장한 환경의 중요성과 맥락을 같이한다.
고자의 관점에서, 선과 악은 인간 본성의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선택과 외부적 환경 속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사회는 선한 행동을 촉진하고 악한 행동을 억제하기 위한 올바른 환경과 교육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책임을 가진다. 이는 성무선악설이 인간 본성을 변화 가능성으로 이해하며, 도덕적 성취는 개인의 노력과 사회적 지원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는 이유다.
결국, 성무선악설은 인간 본성을 선하거나 악하다고 규정짓는 것 자체를 거부하며, 인간의 행동과 도덕성이 후천적 영향의 산물임을 설파한다. 이는 인간 본성에 대한 이분법적 관점을 넘어서, 선과 악의 문제를 보다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성선설과 성악설은 인간 본성에 대한 철학적 깊이를 담고 있지만, 현대에는 이 두 관점이 종종 왜곡되거나 단순화되어 이해된다. 특히, 성선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선하고 착하다"는, 성악설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극단적인 입장으로 오해되곤 한다. 그러나 맹자와 순자의 원래 주장은 훨씬 더 복잡하고 균형 잡혀 있다. 성선설은 인간의 내면에 선의 씨앗이 존재하지만, 이를 올바르게 계발하지 못하면 악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 마찬가지로, 성악설은 인간 본성이 이기적이고 악한 성향을 띠고 있지만, 사회적 규율과 교육을 통해 선을 이루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현대인들이 종종 자신이 성무선악설을 지지한다고 착각하면서, 실제로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논리를 펼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은 사회적 규범 덕분에 착해지는 것이므로 성무선악설이지!"라는 주장은 성악설에 가깝다. 사회적 규율과 교육이 없다면 인간 본성은 이기적이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머문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인간은 어릴 때부터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경험을 통해 변질된다"는 논리는 성선설의 맥락을 따른다. 이는 인간 본성의 선한 출발점을 강조하며, 환경적 요인이 그 선함을 왜곡하거나 파괴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혼동은 성선설과 성악설에 대한 철학적 무지에서 비롯되며, 자신의 논리가 어떤 철학적 입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오는 것이다. 성무선악설은 인간 본성이 선도 악도 아닌 중립적 상태에서 시작하며, 환경과 경험에 의해 형성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단순히 후천적 요인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성무선악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선설과 성악설 역시 환경과 교육의 중요성을 인정하며, 인간 본성이 외부적 조건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는 성무선악설과 공통점을 가진다.
결국, 성선설과 성악설은 단순한 선악 이분법이 아니라,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상반된 틀을 제공하며 각각의 논리적 깊이를 지닌다. 이 관점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입장을 성무선악설로 착각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선설이나 성악설의 논리를 펼치는 모순에 빠질 수 있다. 인간 본성과 윤리를 논의할 때, 자신의 논리적 기반이 무엇인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인간 본성을 둘러싼 성선설, 성악설, 성무선악설의 논의는 단순히 철학적 사변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가 인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며, 어떤 사회를 구축해야 하는가에 대한 실질적인 메시지를 제공한다. 성선설은 인간 내면에 있는 선의 가능성을 신뢰하고, 이를 계발하기 위한 교육과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성악설은 인간의 본성이 가진 이기적 속성을 인정하면서도, 규율과 제도를 통해 선한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인간의 능동적 가능성을 주장한다. 성무선악설은 인간 본성을 중립적 상태로 보고, 선과 악의 형성 과정에서 환경과 사회적 조건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성선설은 인간 본성에 대한 희망을 제공하며, 성악설은 인간 본성의 한계를 냉철하게 지적하고, 성무선악설은 그 사이에서 환경과 교육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을 단순히 선하거나 악한 존재로 규정하는 것을 넘어, 복잡하고 다면적인 존재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얻게 된다.
현대 사회에서 이 논의는 개인의 행동뿐만 아니라, 교육, 법, 사회 제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믿음이 지나치면 규율과 책임의 중요성을 간과할 위험이 있고, 반대로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믿음이 지나치면 인간의 선한 가능성을 무시한 채 억압적인 것들이 강화될 수 있다. 또한, 인간 본성을 중립적 상태로만 보는 관점 역시 개인의 도덕적 책임이나 노력의 중요성을 경시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인간 본성을 논의할 때는 특정 관점에 매몰되기보다, 각 관점이 제시하는 통찰을 균형 있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인간은 선과 악 모두를 품은 복잡한 존재이며, 이를 어떻게 계발하고 조화롭게 만들어갈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우리의 과제는 이 철학적 논의를 바탕으로, 더 나은 인간관계와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