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세번이라고 호언장담했던 나는 연애가 시작되기도 전에 을이 되어버렸다. 그는 생각보다 신중했다. 남녀가 단 둘이 세 번 이상을 만났는데 아무 일도 없다? 그건 최소 둘 중 한 명은 이성적인 끌림이 없다는 것. 이론은 아주 연애 고수 뺨쳤다. 결국 다섯 번째까지 만나고서야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연애가 시작되고서 그는 그전의 연애들이 지속되지 않고 짧게 끝나버렸다고 했다. 본인의 마음이 어느 순간 식어버리고, 또 식어버렸다고. 정을 붙이기가 힘들었다고도 했다. 나를 만나는 동안에도 그는 그랬다. 마음을 확 놓지 않았다. 나는 그 벽을 허물려고 무던히 애썼다. 내가 받고 싶은 사랑만큼 사랑을 주려고 했다. 저 사람이 좀 채워지면 나에게 사랑을 주지 않을까 해서 내가 듣고 싶은 말을 그에게 해주었다. 그렇게 애를 썼지만 나는 채워지지 않았고 그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왜곡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분명히 나에게 마음을 쓰고 있었다. 어쩌면 내 문제 같기도 했다. 밑 빠진 독. 그때의 나는 그랬다. 채워지지 않았다. 태생이 채워질 수 없는, 그런 공허함이 나의 정체일까 봐 두려웠다. 삐걱대긴 했지만 나름대로 서로에게 익숙해지던 어느 날, 1년 가까이 준비하던 시험에 합격한 날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나의 성취를 응원했고 도왔다. 우리에게 그날은 아주 좋은 날이었다. 연휴 전날이라 지하철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 멀리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꽃다발이 들려있었다. 그걸 본 나는 입이 찢어졌다. 그가 처음 꽃을 사줬던 날, 꽃다발을 들고 다니는 게 쑥스럽다고 집에 있는 쇼핑백에 꽃다발을 숨겨왔던 모습이 생각났다. 그랬던 그가 사람이 많고 많은 지하철역 한복판에서 꽃다발을 가슴팍까지 높이 들고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다니! 그 꽃다발을 건네받은 내 마음이 빈틈없이 빵빵해졌다. 허물고만 싶던 그의 담벼락에 꽃이 폈고, 나의 장독 틈에도 같은 꽃이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