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버들 Jun 20. 2018

열여덟번째 요가이야기

하누만아사나



제철은 매번 돌아오지만 매번 놓치기 쉽다.


"아마 이번주가 지나면 끝이지 싶어." 산딸기를 앞에 둔 과일가게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과일들이 각각 제철이 있다. 그 중 산딸기는 제철이 아주 빠르게 지나가는 과일 중 하나. 다음에 사먹어야지 생각하고 돌아보면 철이 지나 시장에서 사라져버리기 일쑤이다. 열두개의 달 중의 여섯번째 달에, 이주나 삼주쯤 산딸기가 시장에 나오고, 그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급속냉동한 산딸기만 먹을 수 있다. 제철은 매번 돌아오지만 매번 놓치기 쉽다. 제철인지도 모르고 지나보낸 다음 뒤늦게 아쉬워하기 쉽다.

마음이 자꾸만 미끄러져 혼자 엉엉, 많이 울어대던 시기가 있었다. 누구에게나 있겠지, 그런 때. 나에게도 있었다. 이 세상이 나를 등지고도 너무 잘 돌아가고, 아름다운 풍경에서 홀로 제외되어버린 것 같다는 마음으로 가득차 가만히 세탁기 속을 들여다보다가 울고, 광화문 앞을 걸어가다가 울고, 해가 지니까 울고, 출근을 하면서 울고, 늦은 밤 집에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퍼먹다가 울던 때. 왜 그렇게 울었던 것일까 생각해도 여전히 이유는 모르겠고 그럴만 했겠지 짐작만 할 수 있는 시간. 그 때의 나는 노트를 펴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있으면 숨이 잘 쉬어지는 일, 내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만한 일을 쓰고는 최선을 다해 그 일들을 했다. 그 첫번째는 매일 요가 수련하기 였고, 두번째는 책읽기, 세번째는 물 많이 마시기, 네번째는 시장에 가기, 다섯번째는 혼자서 많이 걷기 였는데, 그 다섯가지가 내가 터널을 빠져나와 하늘을 볼 수 있게 도와주었다. 자주 미끄러져서 가누지 못했던 마음은 어느새 중심을 잡고 사뿐사뿐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시장에 가면 알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아름다운 것들. 오늘 제일 맛있는 과일과 채소가 무엇인지, 요즘 제일 예쁜 꽃은 무슨 꽃인지, 변함없는 것과 매일 변하는 것이 함께 둥그런 원을 만들며 살아가는 일은 어떤 것인지. 세월이 얼굴에 어떻게 내려앉는지, 마음이 목소리의 온도를 어떻게 바꾸는지,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것이 그의 공간에 어떤 빛깔을 담는지 같은 것들. 나는 그런 것들을 궁금해하며 관찰하고, 혼자 걷다가 그 날 가장 예쁜 꽃을 사거나 그 때에 가장 맛있는 과일을 사 먹고, 푸른 채소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두 손으로 고운 빛깔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는 동안 어느 날에는 꽃이 피고, 어느 날에는 그 자리에 열매가 맺히고, 열매를 먹고 나면 단풍이 들고, 잎들이 떨어지고 나면 하얀 눈이 그 위를 덮고, 눈이 녹고 나면 다시 여린 잎이 돋아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좋아하는 계절이 무어냐 묻는 이에게, 봄은 봄이라 좋고, 여름은 여름이라서, 가을은 가을이니까, 겨울은 겨울이기 때문에 좋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좋아하는 꽃을 묻는 이에게, 계절마다 예쁜 꽃이 달라서 그 때에 제일 향기좋은 꽃이 좋다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누만아사나에서 숨을 잘 쉬게 된 다음에, 거기에서 다시 숨이 차는 날이 올지도 모를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내가 있다. 이제 잘 되니까, 이제 그 다음을 연습하고 있으니까 다시 안되는 일 같은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던 내가 있다. 그런 내가 있었고, 긴 여행 중에 매트 위에서 숨을 헐떡이며 왜 되던 것이 안되냐고 울먹이던 내가 있었고, 다시 편안해지고 있지만 언제든 또 안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지금의 나도 있다. 매번 당시에 생겨난 마음 역시 그 때가 아니면 느낄 수가 없다. 그 순간 그런 마음을 갖았던 내가 있어서 변하는 마음을 관찰할 수 있는 내가 있다. 계절 같다고 생각한다. 이런 마음도 또 지나갈 것이고, 시간이 지난 후에는 또 이 마음 역시 추억할 것이다.

산딸기의 철에 포도에게 왜 아직 맛이 좋지 않은 것이냐 묻거나 장미의 계절에 왜 은행나무가 노랗지 않은 것이냐 묻는 것과 같은 일. 그것은 바로 제철을 맞은 마음에게 왜 지금 그 마음인 것이냐 묻는 것이다. 제철을 맞은 마음이 기쁨일 수도 있고, 두려움일수도 있고, 행복일수도 있고, 아픔일수도 있다. 제철을 맞은 지금의 마음이 무엇이든, 그렇구나. 해버린다.

두려움에게 행복이 되라 말하지 않고, 기쁨에게 아픔이 되라 말하지 않고, 슬픔에게 설렘이 되라 말하지 않는다. 사랑에게 사랑이 아닌 것이 되라고 하지도 않고. 떠오르는 마음 역시 계절처럼 지나갈 테니 그것을 알고 마음을 바라본다.

지금 제철을 맞은 마음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제철을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충분히 기뻐하고 마음껏 슬퍼하고 실컷 무너지고 정성껏 사랑한다.



글/ 예슬 (brunch.co.kr/@yogajourney)
그림/ 민지 (brunch.co.kr/@am327)

작가의 이전글 열일곱번째 요가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